“힘으로 뒤집는 건 자유민주주의 아니다”
  • 윤해동│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 ()
  • 승인 2013.06.12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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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행동은 언어도단…역사교과서 발행제 공론화할 때

2008년 교과서포럼이 펴낸 ‘대안교과서’에 드러나는 뉴라이트 역사 해석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식민지근대화론, 대한민국 중심주의 그리고 북한 배제론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이란 일제가 제국주의 지배를 통해 조선에서 경제적 근대화를 일정한 수준에서 수행하였다고 보는 이론이다. 이런 분석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식민지 시기 경제 분야 연구에 상당한 자극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를 두고 경제적 측면에만 한정하여 그 공과를 평가할 수는 없다. 식민지근대화론이 ‘경제 편향의 근대화이론’으로 비판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 중심주의란 남한의 건국과 경제성장 그리고 민주화의 달성을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위대한 성취로 보는 관점이다. 북한의 체제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특유의 북한 배제론 역시 이런 국가주의적인 시각을 뒷받침한다.

이런 관점은 다분히 결과론적인 입장이다. 결과적으로 성공했으므로 그 과정도 위대하다는 식의 ‘승자의 논리’에 가깝다. 물론 대한민국의 성취를 일부러 폄하해야 할 이유는 없기에 일리가 있는 견해다. 그럼에도 이런 시각이 학계로부터 비판받아온 것은 지나친 국가 중심의 논리가 가진 위험성 때문이다.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현대사학회의 역사 교과서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과거 집필된 대안교과서와 얼마나 비슷할지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중심적인 가치관에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2011년 5월20일 한국현대사학회가 주최한 창립 기념 학술회의. ⓒ 뉴스뱅크
공적 논의의 장 말살되면 안 돼

5월31일 한국현대사학회가 개최한 토론회에서도 뉴라이트 세력의 역사 인식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드러났다. 뉴라이트 세력은 지금 사용되고 있는 역사교과서가 ‘민중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본다. 이것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나 헌법적 가치와 위배된다고 평가한다.

기존의 교과서는 민중민족주의에 사로잡혀 균형을 잃은 것이며, 이것이 ‘스탈린-김일성-박헌영’과 역사관을 공유하는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런 인식은 “운동권 세력에 의해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에 교과서 쿠데타가 벌어졌으므로 뉴라이트가 교과서를 뒤집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결론으로 이어졌다.

당초 한국현대사학회는 민주주의의 정체가 명확하지 못하므로 자유민주주의로 교육과정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정도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러한 뉴라이트의 행동은 언어도단에 가깝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힘으로 뒤집는 것’과 자유민주주의는 정반대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 가치를 바탕으로 한다. 이를 기반으로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이데올로기가 곧 자유민주주의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협의해 최소한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공공 영역이 존재할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뉴라이트 세력은 말이 오가는 길 자체를 막아버리고 있다.

이들은 민주화 이후 주도권을 빼앗긴 사상과 역사 교육의 장에서 ‘분노의 치킨게임’을 벌이려는 것인가. 공공 영역에서 논의를 주고받아야 할 상대는 결코 절멸할 대상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라면 역사와 사상을 둘러싼 공공적 논의의 장은 말살되고 말 것이다. 공공 영역이 사라지면 그 사회가 지속되기 어렵다. 이런 사태를 대하는 심정은 착잡하고 참담하다. 매번 반복되는 역사교과서 논란을 역으로 ‘지속 가능한 사회’로 만드는 계기로 반전시킬 수는 없을까.

우선 교과서 검정 제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는 1974년 유신 체제 당시 국가주의 교육의 핵심으로 간주돼 국정교과서 체제로 전환됐다. 이것이 검정교과서 체제로 변화된 것은 민주화 이후였다.

국가가 직접 저술한 교과서를 일괄적으로 가르치는 방식에서, 민간에서 개발한 도서 중 국가의 검정심사를 통과한 다수의 도서를 교과서로 인정하는 방식으로 변화한 것이다.

현재 역사교과서에 대해서는 국가가 검정 기준을 제시하고 적합성 여부를 검토한다. ⓒ 연합뉴스
교과서 자유 발행제·교육 자치 활성화가 대안

그러나 검정교과서 체제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것은 제도의 형식과 관련된다. 검정 기준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적합 여부를 심사하는 것이 여전히 국가의 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검정 기준을 제시하고 적합성 여부를 검토하는 권한을 모두 갖고 있다. 그 권한만 장악하면 모든 검정교과서의 성격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뉴라이트 세력은 바로 이 제도의 틈새를 노렸다. 2011년 역사교과서 검정 기준의 바탕을 이루는 교육과정 개정에 깊이 개입했다. 이번에는 역사교과서를 직접 집필해 본심사에서 통과됐다. 결국 본질적으로는 교과서 국정 제도와 검정 제도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다는 사실을 이번 역사교과서 논란이 잘 보여줬다

‘교과서 자유 발행제’가 대안이 될 수 있다. 역사교과서를 자유로이 발행해 일선 학교에서 사용한다는 것은,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역사교과서를 자유 발행 방식으로 발간하는 사례는 많다.

여기에는 중요한 제도적 전제가 있다. ‘교육 자치’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2010년부터 광역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교육감을 시민들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하게 됨으로써 본격적인 교육 자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현행과 같은 교육부 체계에서는 교육 자치의 정착이 사실상 어려운 실정이다.

이를 대체할 기관으로 국가미래교육위원회 신설을 검토해볼 만하다. 국가미래교육위원회는 정파를 초월한 정치적 중립성에 바탕을 두고, 교육 전문가와 이해 당사자가 중심이 돼 중·장기 교육 정책을 수립하는 새로운 국가 기관을 말한다.

국가미래교육위원회가 교육의 중·장기적 비전을 만들고, 이에 기반을 두고서 지방의 교육 자치를 활성화해나가는 것이다. 국가미래교육위원회는 이미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언급하기도 했으며, 시민사회에서 공적 의제로 제기된 적도 있다.

뉴라이트 세력이 촉발한 역사교과서 논란은 무엇보다 공공 영역의 존재를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이 기회에 역사교과서 발행 제도에 대한 논의를 공론의 장에서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 제도적 대안을 바탕으로 역사 및 사상의 문제가 공공 영역에서 자유롭게 토론될 수 있을 때 한국은 ‘지속 가능한 사회’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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