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고 쫄깃한 삼겹살의 기원
  • 황교익│맛 칼럼니스트 ()
  • 승인 2013.06.18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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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돼지라고 다 토종 아니다…춘향골 남원에선 ‘순종 바크셔’ 사육

흑돼지 하면 제일 먼저 토종부터 떠올린다. 흰 돼지는 근대 이후 서양에서 온 품종이고, 흑돼지는 한반도에서 우리 조상들이 오랫동안 키워왔던 돼지라는 생각이다. 맞기는 맞다. 한반도의 토종 돼지는 흑돼지였다. 그러나 지금의 흑돼지는 한반도 토종 흑돼지가 아니다.

한국인은 ‘토종’이라면 모두 맛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한반도의 것이라 해도 세계 여러 지역 것보다 열등할 수 있다. 한국 농수축산물을 수입 농수축산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강박감이 만들어놓은 ‘신토불이’ 정신은 과도한 민족주의를 부추겨 이성적인 판단을 방해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돼지는 대개 흑색으로, 마른 것은 적으며 복부가 부풀어 늘어진 열등종인데 대개 사양(사육)되는 소와 마찬가지로 도처에 없는 곳이 없다. 그 수는 일본 이상이고, 매우 불결하다. 우리에서 사육되는 것이 보통인데 도로에 방양(放養)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 드물게는 귀를 새끼줄로 매어 말뚝이나 나무막대기에 매달기도 한다. 잔반, 겨, 간장 찌꺼기, 술지게미, 두부 찌꺼기, 채소 부스러기 등을 주어 기른다.’

영국 바크셔 지방에서 개량된 바크셔는 고기가 부드러운 듯 쫄깃하다. 기름은 탄력 있다. 보통의 흑돼지와는 다르다. ⓒ 황교익 제공
한반도 토종 돼지는 열등했다

1905년 일제가 펴낸 <조선토지농산조사보고>에 실려 있는 돼지에 관한 기록이다. 그 당시 한반도의 토종 돼지는 흑색이라고 적었다. 복부가 부풀어 늘어진 열등종이란 문구도 눈길을 끈다.

제국이 식민지 경영에서 처음 하는 일은 식민지 자원에 대한 조사다.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에서 무엇을 빼먹을 것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일제도 한반도의 자원에 대해 조사했고, 그 기록이 <조선토지농산조사보고>에 남아 있다. 그 다음으로 제국주의자가 하는 일은, 우등한 자원은 확대 생산하게 하고 열등한 자원은 개량하는 것이다. 일제가 한반도의 가축 중에서 우등한 자원으로 꼽은 것은 딱 하나 소였다. 돼지는 개량의 대상이었다.

‘금년 10월 바크셔 잡종 수컷 한 마리와 암컷 두 마리를 번식용으로 동경에서 수입하였는데 이 동물은 기후 풍토의 변화에 민감하지 않아 발육이 양호하고 활발했다. 조선의 재래종 돼지를 사양하고 비육 시험을 실시한 바 마른 체구를 기름지게 살찌우는 특성이 모자라서 비육 목적을 달성하기는 어려웠다. 더욱이 ‘울프 씨의 법칙(독일의 외과의사 줄리어스 울프에 의해 발견된 이론으로, 건강한 사람이나 동물의 뼈는 가해지는 부담이나 충격에 따라 변형된다는 내용)’을 기준으로 2기로 나누어 영양률을 정하고 세심하게 주의하였음에도 그 결과는 도저히 육용 동물로서 경제상의 가치가 없음이 증명됐다. 따라서 빠르게 개량 실적을 올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1907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권업모범장 보고>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한반도의 토종 돼지가 열등해 경제적 가치가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일제는 바크셔 잡종 보급에 나선다. 1908년 <권업모범장 보고>에는 ‘종돈으로 배부한 것은 바크셔 잡종 새끼 돼지 수컷을 평안북도·경상북도·전라남도 3개도에 각각 한 마리씩, 경상남도에 두 마리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발행된 <권업모범장 보고>에서도 일제가 일본에서 바크셔 잡종을 도입해 한반도에 꾸준히 보급한 흔적이 보인다. 1910년 <권업모범장 보고>에는 맷돼지과에 몸 빛깔이 하얀 돼지 품종인 요크셔도 보급한 것으로 돼 있다.

박화춘 박사가 키우는 순종 바크셔. 코와 꼬리, 네 발이 하얗다. 일본에서는 바크셔를 육백흑돈(六白黑豚)이라 한다. ⓒ 황교익 제공
부드러운 살코기 맛 내는 순종 바크셔

현재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먹는 돼지 품종은 흰 돼지인 요크셔다. 요크셔는 1970년대 양돈업이 규모화하면서 크게 번졌다. 그 이전 농가에서 부업으로 한두 마리씩 키우던 돼지는 검었다. 이 흑돼지는 다 크면 적어도 100kg이 넘었다. 크기만으로도 한반도의 토종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흑돼지를 토종이라 여기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이 흑돼지에 익숙해진 탓이다. 특히 1970년대 이후 크게 번진 요크셔가 외래종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풍기면서 반사적으로 검기만 하면 토종이라는 관념이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전 세계 돼지 품종은 1000여 종에 이른다. 이 중에 바크셔는 맛있는 돼지 축에 든다. 또 사료 효율이 높지 않아 비싸게 팔리는 돼지다. 우리 땅에서 자라는 흑돼지는 바크셔 피가 섞여 있을 가능성은 크지만, 바크셔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 바크셔는 코와 꼬리, 네 발에 하얀 털이 있는 것이 특징인데, 우리 땅에서 자라는 흑돼지는 온몸이 까맣다. 혈통을 확정할 수 없는 잡종 돼지인 것이다. 이를 먹통 돼지라 한다.

전북 남원에 바크셔 순종을 키우는 농장이 있다. 서울대 축산학과 출신의 육종 전문가 박화춘 박사가 미국에서 바크셔 순종을 가져와 남원 지역 풍토에 맞게 개량한 것이다. 이 바크셔는 정식으로 품종 등록이 돼 있다. 잡종이 아니라는 말이다.

순종 바크셔의 맛은 이렇다. 첫째, 살코기는 부드러운 듯 쫄깃하다. 부드러움과 쫄깃함이 어찌 공존하는가 싶을 텐데, 부드러움의 반대말로 딱딱함을 생각하지 말고 질김을 떠올리면 그 부드러움의 실체가 분명해질 것이다. 살은 가느다란 근섬유 결합 구조로 돼 있다. 근섬유가 얼마나 가는가에 따라 부드러움의 정도가 달라진다. 그러니까 가는 실의 비단은 부드럽고 굵은 실의 삼베는 질긴 것과 같은 이치다. 이 근섬유는 다발로 묶여 있는데, 바크셔는 근섬유가 가늘고 여느 돼지의 고기보다 다발 안에 근섬유가 촘촘히 박혀 있어 쫄깃하다. 근섬유가 촘촘하니 조리 후에도 수분을 잘 쥐고 있어 육즙의 풍미가 강한 것도 한 특징이다.

둘째, 단맛이 있다. 돼지고기뿐만 아니라 모든 육류에는 단맛이 있다. 포도당이나 유리아미노산의 맛이다. 이 단맛은 은근해서 감칠맛이라 표현되기도 한다. 박화춘 박사의 연구 자료에 의하면 돼지고기가 맛있기로 이름난 또 다른 품종인 랜드레이스보다 포도당은 9%, 유리아미노산은 8.5%가 많다.

셋째, 지방에 수분이 적다. 그래서 지방이 쫄깃한 맛을 낸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먹는 요크셔는 지방 중 수분이 9~10%인데, 바크셔는 7~7.7%이다. 지방의 수분 차이는 돼지고기 맛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돼지고기 맛은 지방에 크게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지방 맛으로 돼지고기를 먹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코기가 부드럽게 씹히면서 지방이 탄력 있게 버텨주면 대다수 한국인은 “야, 고기 좋다” 하는 소리를 절로 하게 된다. 특히 돼지고기를 쌈에 싸서 먹는 한국인의 식습관에서 지방의 탄력 있는 조직감은 무척 중요하다. 쌈을 싸 먹게 되면 상추, 마늘, 풋고추 등을 씹기 위해 턱에 힘을 잔뜩 주게 되는데 그 턱의 힘에도 탄력 있게 버텨주는 돼지고기이니 더욱 맛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검다고 다 토종이 아니며, 또 검다고 다 맛있는 게 아니다. 맛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시각도 필요하다. 박화춘 박사가 키우는 순정 바크셔는 남원흑돈클러스터사업단 1층 식당에 가면 먹을 수 있다. 88고속도로 지리산IC를 나가자마자 왼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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