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의 반란, 개혁 돛 올랐다
  • 이유주현│한겨레 국제부 기자 ()
  • 승인 2013.06.26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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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로하니 선택한 이란, 고립주의 벗어날까

6월15일(현지 시각) 이란 테헤란 도심에 쏟아져나와 하산 로하니의 승리를 환호한 이란 시민들은 지난 한 달을 어떤 심정으로 보냈을까. ‘정치적 조울’을 집중적으로 체험한 시기였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작은 대선 후보 등록 마지막 날인 5월11일이었다. 마감 시간을 30분 남겨놓고 갑자기 알리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이 후보 등록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 전엔 현재 대통령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의 ‘정치적 경호실장’(현재는 비서실장)인 에스판디아르 라힘 마샤이가 후보 등록을 마쳤다. 두 사람이 6월14일에 열리는 대선에 등판하자 이란 안팎에서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라프산자니가 누구던가. 1989~97년 8년 동안 대통령을 지낸 인물로, 이라크와의 8년 전쟁 이후 폐허가 된 이란을 재건한 정치 거물이다. 그는 2005년 대선에도 출마해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으나 결선투표에서 신진 정치인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에게 패했다. 그런 그를 정치적으로 부활시킨 이는 역설적이게도 라이벌 아마디네자드였다.

차기 이란 대통령에 당선된 하산 로하니. ⓒ AP연합
이란은 2009년 아마디네자드의 부정 선거 논란이 벌어지며 전역이 항의 시위로 들끓었다. 그에게 패한 미르호세인 무사비 전 총리가 선거 캠페인에서 썼던 상징 색이 녹색이었기 때문에 당시 이 시위는 ‘녹색 운동’(그린 무브먼트)이라고 불렸다. 라프산자니는 본래 개혁보다는 실용과 온건·보수 사이에 있는 인물이었지만 이때 아마디네자드를 비판하며 적극적으로 시위대 편에 섰다. 시위가 진압된 뒤 가택 연금된 무사비가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라프산자니는 개혁파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중량감 있는 라프산자니가 나설 경우,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강경 보수파와 맞짱을 뜰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하지만 하메네이가 장악한 헌법수호위원회는 치명적 반격을 가한다. 등록 마감 열흘 뒤인 5월21일, 이들은 686명 후보의 자격을 심사해 라프산자니와 마샤이를 탈락시키고, 하산 로하니(전략연구센터 소장), 모하마드 바케르 칼리바프(테헤란 시장), 사이드 잘릴리(이란 핵협상 대표), 알리 악바르 베리야티(전 재무장관) 등 8명의 후보에게 출마를 허락한다고 밝혔다. 8명 모두 하메네이와 친한 인물들로, 로하니와 모하마드 레자 아레프 전 부통령 정도가 그나마 중도에 속했고 나머지는 강경 보수파였다.

표 던질 곳을 잃은 개혁 성향 시민들의 관심이 싸늘하게 식었다. 외신들은 녹색 스카프를 두른 소녀들이 광장에서 롤러보드를 탔던, 2009년의 그 뜨거웠던 테헤란과 비교하며 썰렁한 분위기를 부각시켰다. BBC는 개혁 성향 유권자들이 선거를 보이콧할지, 아니면 ‘그래도 그나마 덜 보수적인’ 후보를 선택할지가 관건이라고 전했다.

유력 후보 라프산자니와 마샤이 중도 탈락

하지만 다시 반전 드라마가 펼쳐졌다. 개혁파 대통령이었던 모하마드 하타미 전 대통령이 판을 짰다. 그는 투표일을 사흘 남겨둔 6월11일 로하니를 공개 지지했다. 라프산자니도 이에 가담했다. 하타미는 자신이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낸 아레프 후보를 설득해 사퇴시켰다. 개혁 세력이 중도 세력과 연합하고, 중도 후보로 단일화를 이룬 것이다.

로하니. 그는 1979년 이란 혁명에 참여해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뒤, 노선 투쟁으로 혼란스러운 현실에서도 ‘제도권 정치’ 밖으로 밀려난 적이 거의 없던 인물이다. 호메이니가 어릴 적 공부했던 콤신 학교 출신인 그는 20대에 반(反)팔레비 활동을 벌이다 체포될 위험에 놓이자 1970년대 말 프랑스로 도피했다. 이때 파리에서 망명 중인 호메이니를 만나 감화를 받고 혁명에 참여했다. 라프산자니 대통령 시절엔 대통령 국가안보자문으로 활동했으며, 하타미 대통령 때는 2003~05년 핵협상 수석대표를 지냈다. 출마 당시는 전문가회의 산하 전략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었다. 성직자 출신으로 하메네이와도 관계가 원만하다. 군·외교·정치 분야를 경험한 ‘양지의 정치인’이, 이제 개혁 세력의 어깨에 올라탄 것이다.

그럼에도 보수파 후보들은 연대를 거부했다. 이란의 현지 보수 언론들도 ‘저쪽’의 단결과, ‘이쪽’의 분열에 대해 “이러다간 보수가 근소한 차이로 이기게 된다”고 걱정하는 수준에 그쳤다. 6명의 후보 모두 뚜렷하게 부각되는 인물이 없는 탓에 어차피 결선투표까지 가리라고 예상한 것이다.

이란은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득표한 후보가 없으면 1, 2위 후보를 놓고 2차 투표를 한다. 이번 결선투표는 6월21일로 잡혀 있었는데 애타는 개혁 세력이나 느긋한 보수 세력이나, 전문가들이나 언론이나 모두 이날 대통령이 결정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투표함이 열리자 더 큰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6월15일 투표 집계가 마무리됐다. 모두 깜짝 놀랐다. 로하니가 50.7%를 얻어 1차 투표에서 ‘깨끗이’ 이겨버린 것이다. 젊은 정치인 칼리바프는 16.5%, 강경한 핵협상가 잘릴리가 11.3%로 2, 3위를 차지했다. 로하니를 지지한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우리가 이겼다” “개혁이여, 영원하라”고 외쳤다.

기쁨과 흥분의 밤은 지나가고, 이제 로하니는 암울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가장 큰 걱정은 경제다. 이란은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서방 국가들로부터 지목받은 뒤 지루한 협상을 벌여왔다. 결국 2006년 7월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696호를 시작으로 무려 6번이나 우라늄 농축을 중단하라는 결의와 함께 이를 위반한 데 따른 경제 제재를 가했다. 2012년 7월 이란 원유 수입 금지 조치가 가시화되면서 지난해 한 해에만 이란 통화 가치가 반 토막 났다. 생필품값이 급등했고 실업률은 치솟았다.

이란 경제를 살리는 길은 일단 고립주의 외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로하니는 유럽연합을 대표한 영국·프랑스·독일 3개국과 협상을 벌여 2004년 11월 ‘파리 협약’을 이끌어낸 인물이다. 당시 로하니는 우라늄 농축 중단을 양보하는 대신, 유럽연합과의 무역 및 경제 협력 협상 재개,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지지를 받아냈다. 하지만 이듬해 5월, 헌법수호위원회와 의회는 핵연료 사이클 개발을 법제화하며 파리 협약에 찬물을 끼얹었다.

2005년 6월 아마디네자드의 대통령 당선을 계기로 이란은 급격히 고립주의 노선을 밟았다. 로하니는 아마디네자드와 갈등을 벌이다 핵협상 대표에서 물러났다. 

20세기에 이란 국민이 ‘석유 민족주의’에 열광했던 것처럼, 21세기 이란 국민은 ‘핵 민족주의’를 고수한다. 로하니는 핵문제를 놓고 국제사회와의 대화를 강조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핵은 주권의 문제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핵 개발을 중단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서방 국가들과 경제 회생을 위한 다리를 놓는가가 그의 가장 큰 숙제다. 이란 전문가인 유달승 한국외대 교수는 “현재 시리아 내전 등 중동 정세가 이란에게 불리하지 않은 상황”이라며 “그동안 같은 시아파인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과 레바논의 무장 정파 헤즈볼라를 지원해왔던 이란이 이를 협상 카드로 쓸 수 있다”고 전망했다.

로하니는 민주개혁 세력이 지지를 철회하지 않도록 정치 개혁도 해나가야 한다. 개혁 세력은 로하니가 2009년 녹색 운동의 주역인 무사비 전 총리와 메디 카루비 전 국회의장을 가택 연금에서 하루빨리 해제해주길 기다리고 있다.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와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갈지도 관건이다. 하타미는 외국인 투자 증진, 언론 자유, 서방과의 교류 등 국내외 개혁 정책을 펼쳤으나 헌법수호위원회 등의 반대에 부닥쳐 좌절을 거듭하다 아마디네자드에게 정권을 내줬다. 로하니가 성공하려면 ‘양지에서 살아온 정치술’을 발휘해 하메네이와 적절한 타협을 모색해야 한다. 하메네이와도 나쁘지 않은 관계를 만들면서 자기의 정책을 밀고 나가는 데는, 어쩌면 그의 ‘인사이더 경력’이 자산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로하니는 당선 직후 “하룻밤에 이란의 문제를 해결할 순 없다”고 말했다. 8년마다 정권 교체를 통해 개혁과 보수의 균형을 절묘하게 맞춰온 이란 국민들은 이번에 로하니를 선택했다. 점진적이나마 개혁을 성공시킬 경륜과 능력, 지혜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달승 지음, (한겨레출판) 203쪽

이란 혁명이 일어나기 8년 전인 1971년, 당시 팔레비왕조의 탄압으로 이라크에서 머무르던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현재의 이란을 통치할 정치 이론을 정립한다. “이슬람에서 입법권은 신에게만 귀속된다. 신만이 유일한 입법자이며 인간은 어떠한 자도 법을 제정할 권리를 갖지 못하고 이슬람법 이외의 어떠한 법도 집행할 수 없다. 이슬람 정부는 이슬람법에 의한 정부이다. 이슬람 정부에서 주권은 신에게 귀속되고 이슬람법은 신의 명령이다. 이슬람법은 모든 개인과 정부에 대해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다.” 그의 이슬람 정부론은 “이슬람법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이슬람 법학자가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1979년 출범한 이란이슬람공화국의 헌법은 호메이니의 ‘이슬람 법학자 통치론’을 그대로 계승했다. 비록 헌법에는 삼권 분리 원칙이 나와 있지만 국정 전반을 통치하는 최고 지도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다. 그는 이슬람법과 헌법을 해석할 권리를 가질 뿐 아니라 외교·국방·언론·사법·군을 지휘한다. 최고 지도자는 국민 직선으로 선출된 8년 임기의 종교 지도자 86명이 구성한 전가회의에서 선출되는데 사실상 종신직이다. 1989년 아야톨라 호메이니 사망 이후 지금까지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24년 동안 최고 지도자를 맡고 있다.

그의 권력 기반 중 하나는 ‘헌법수호위원회’라는 이란만의 독특한 헌법기구다. 헌법수호위원회는 국회가 만든 법안이 이슬람법을 준수하는지 여부를 심사해 통과 또는 거부를 결정한다. 또 대선, 총선, 전문가회의 선거 등에 출마하는 후보들의 자격 심사권도 가진다. 개혁파의 지지가 두터웠던 알리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후보를 탈락시켜 선거 구도를 보수 일색으로 만든 것도, 여성 후보들의 출마를 허락하지 않은 것도 모두 헌법수호위원회다. 이 헌법수호위원회는 12명으로 구성되는데 위원 6명은 최고 지도자가 성직자들 중에서 뽑고, 나머지 6명은 최고 지도자가 임명한 사법부 수장이 선택한다.

최고 지도자는 사법부의 수장, 각종 이슬람재단장, 국가중재위원회 일부 위원의 임명권도 쥐고 있다. 국가중재위원회는 헌법수호위원회와 국회가 갈등을 일으킬 때 중재에 나서는 기구다. 최고 지도자로부터 한 방울의 권력마저 새나가지 않도록 겹겹이 보호 장치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란에선 성직자들이 정치 일선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 현 대통령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2005년 취임~2013년 8월 임기 종료)는 1981년 이란에서 대통령제가 안정된 이래 유일한 비성직자 출신 대통령이다. 최고 지도자에 오르기 이전 대통령을 지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1981~89년), 개혁파 대통령이었던 모하마드 하타미(1997~2005년)는 모두 검은색 터번을 쓰고 있는데, 이는 ‘예언자 가문’ 에서 태어난 고귀한 신분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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