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거인', 한반도로 진격하다
  • 김병수│만화가·목원대 교수 ()
  • 승인 2013.06.26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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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화잡지 인기 연재물…4월 애니메이션 방송으로 신드롬

실로 오랜만에 코믹스 쪽에서 대박이 터졌다. 출판 만화를 넘어서 애니메이션이 터지고 유행어로 등장하고 있다. 만화  <진격의 거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드래곤볼> <슬램덩크> <나루토> <강철의 연금술사> <원피스>로 이어지던 일본산 코믹스의 메가 히트 계보가 뚝 끊긴 지 10여 년. 코믹스 중심의 일본 만화계가 침체 일로를 걷던 와중에 들려온 반가운 소식이다. 일본에서 시작된 메가톤급 흥행 태풍은 한반도에도 상륙해 말 그대로 ‘진격에 진격을 거듭’하고 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진격의 거인>은 물론 ‘진격’이 들어간 단어가 수시로 순위권을 오르내린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을 풍자한 ‘진상의 거인’처럼 시사적인 것부터 진격의 코스, 진격의 게임, 진격의 베어, 진격의 때밀이, 진격의 관우 등 ‘진격’을 붙인 패러디물과 관련 콘텐츠가 넘쳐난다. ‘진격의 준하’와 같이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서 ‘진격’ 패러디 자막이 등장하는 것도 일상화됐다. 한 방송사 공개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진격의 가족’이라는 코너를 신설하며 온라인을 통해 선공개하는 진풍경까지 벌어졌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웹툰’ 이 아니면 명함조차 내밀기 힘들었던 국내 인기 만화 반열에 일본산 코믹스가 현재까지 35만부나 팔려나가며 선전하는 것도 보기 드문 풍경이다.

<진격의 거인>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3~15m 크기의 식인 거인과 이로 인해 멸종 위기에 처한 인간의 사투를 그린 액션 판타지물이다. 대다수 인류가 거인에게 잡아먹히고, 살아남은 인간은 50m 높이의 거대한 3중 성벽 안에서 100년 동안 평화롭게 살아왔다는 독특한 설정이 작품의 배경이다. 50m에 육박하는 초거대 거인이 난데없이 등장해 가장 바깥쪽의 ‘월 마리아’ 성벽을 파괴하면서 만화는 시작된다. 거인들의 내습으로 엄마를 잃은 엘런과 동료 미카사, 아르민을 축으로 거인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훈련병단 졸업생의 처절한 사투가 숨 가쁘게 전개된다. 치밀한 복선과 암시, 이미 결론까지 구상을 마친 탄탄한 스토리에 더해 거친 펜 선으로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액션 연출이 백미다. 식인 거인을 바탕으로 한 종말론적 세계관과 다양하고 정교한 설정 역시 몰입도를 높인다. 어시스턴트 생활을 거치지 않았음이 분명한 숙련되지 않은 라인 드로잉과 데생이 오히려 장점으로 느껴질 정도로 화면 연출이 압도적이다.

ⓒ 애니플러스
“애니메이션이 100배 퀄리티 높다”

놀라운 점은 이 작품이 만화가 이사야마 하지메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이다. 담당 편집장의 권유를 받고 19세 때 <진격의 거인>을 시작했다고 한다. ‘확실히 흔치 않고, 빤하지 않은 전개와 흔치 않은 대사와 연출’을 하고 싶었다는 작가는 주위의 반대와 독자의 저항감을 무릅쓰고 주인공을 거인으로 변신시킨다는 결정을 내리는 등 신인답지 않게 내공이 만만치 않다.

<진격의 거인>은 일본 3대 만화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고단샤(講談社)에서 발행하는 월간 만화잡지 <별책 소년 매거진>에 2009년 10월호부터 매월 45쪽 분량으로 연재 중이다. 일본에서는 단행본 판매량이 올해 6월 초 2000만부를 돌파했으며 ‘이 만화가 대단해!’ 2011년판 남성 부문 1위, 전국 서점 직원이 선정한 추천 코믹 2011년 1위, 제35회 고단샤 만화상 소년 부문 수상 등 만화 관련 주요 상을 휩쓸었다. 당초 이 만화에 퇴짜를 놓았던 일본의 대표적인 소년만화잡지 <주간 소년점프>는 두고두고 속이 쓰릴 만하다. 히트작의 성공 노선에만 골몰해왔던 <주간 소년점프>의 안일한 자세에 대한 비판도 속출했다.

연재 직후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흥행에 기름을 부은 것은 올해 4월7일 일본 마이니치 방송에서 방송되기 시작한 애니메이션이다. <데스노트> 감독으로 유명한 아라키 테츠로의 애니메이션판은 압도적인 그래픽과 현란한 액션 연출로 원작 만화를 뛰어넘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만화가 자신이 “애니메이션이 100배 퀄리티가 높다”고 감탄했을 정도다. 우리나라에서 <진격의 거인>이 본격적인 인기를 얻은 것은 애니메이션이 공개된 지난 4월 이후부터다.

<진격의 거인>이 신드롬 수준의 인기를 얻으면서 각종 해석과 분석, 논란이 난무하고 있다. 식인 거인에 도륙당하는 인류가 오랜 경기 침체로 무기력해진 일본인을 상징한다는 분석이 있는가 하면, 저출산·고령화 위기 속에 뾰족한 해결책이 없는 일본의 상황과 겹친다는 해석도 있다. 중국을 거인으로, 일본을 성벽에 갇힌 인류로 연결 짓는 분석은 나름대로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일본 우익의 발호를 식인 거인의 등장으로 해석하는 주장은 만화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재미를 준다.

중국을 거인, 일본을 인류로 분석하기도

이사야마 하지메 작가가 2010년, 자신의 블로그에 구한말 일본 육군대장을 지냈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도 참전했던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好古)를 존경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린 것을 두고 우익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아키야마는 실제 조선 합병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관동 대지진 당시 우물에 독을 탔다는 조선인에 대한 악성 루머에 유감을 표시하는 등 일본 군국주의 극우 세력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아키야마의 이미지가 작품에 등장하는 픽시스 사령관과 닮았고, 여주인공 미카사가 러일전쟁 당시 일본 전함의 이름과 같으며, 일본의 침략 전쟁을 미화한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런 극우 논란에도 <진격의 거인>이 한국에서까지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빤하지 않은 세계관과 흔하지 않은 연출이 기존의 코믹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박진감을 선사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거인으로 거듭난 주인공 엘런의 진격은 실사 영상물은 감히 따라오기 힘든 압도적인 파워를 보여준다. 신인이라 오히려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 물불 가리지 않는 장면 연출을 추구할 수 있었다는 점도 매력이다. 거인의 정체, 지하실의 비밀 등 작가가 곳곳에 배치해놓은 궁금증을 해결해가는 과정 역시 작품에서 시선을 떼기 어렵게 만든다.

각종 패러디물의 범람은 <진격의 거인>이라는 제목의 작명에 힘입은 바 크다. <進?の巨人>을 직역해 사용했지만 우리말에서는 ‘진격하는 거인’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그러나 <진격의 거인>이라는 직관적인 제목을 붙임으로써 ‘진격의~’ 로 패러디하기 좋은 용어를 낳았다. ‘앞으로 나아가 적을 침’이라는 뜻을 가진 ‘진격’은 단어 자체도 일본식 표현에 가깝고, 우리 일상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생소한 것이어서 패러디의 재미를 더해준다.

일본 문화 콘텐츠 산업 구조에서도 <진격의 거인> 신드롬의 요인을 찾을 수 있다. 세계 최대 만화 강국 일본은 성공한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게임과 영상, 팬시 상품까지 이어가는 제작 체계를 갖추고 있다. 초대박 작품이 아닌 중박 정도 되는 만화도 곧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다. 애니메이션의 인기가 거꾸로 원작 만화의 인기를 이끄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진격의 거인>의 메가 히트에 만화와 애니메이션·게임·영상·팬시 산업이 시너지를 일으키는 일본의 엔터테인먼트 산업 구조가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진격의 거인>은 만화를 축으로 한 문화 콘텐츠 산업이 어떻게 연결돼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신드롬의 또 다른 원인으로 거대한 재난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일본식 ‘잇쇼켄메이(一生懸命)의 미학’이 제대로 구현된 이야기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모든 이야기는 결국 인간에 대한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존재의 이유,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모험이기 마련이다. <진격의 거인>은 이야기의 본분에 가장 충실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웹툰 중심의 우리 만화계에서도 <진격의 거인> 같은 출판만화가 성공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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