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쉰 넘어 20대 시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 조철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13.06.26 14:0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80년대 다룬 장편소설 연재 시작한 최영미 시인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최영미 시인(51)은 어느 날 현실을 바라보는 방법의 하나로 풍자시를 쓰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쓰게 되면서 엮어낸 것이 2005년 11월 출간한 <돼지들에게>다. 그가 이 시집에서 돼지라고 부른 사람들은 실명을 밝히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만한 사람들이다. 잔치가 끝났으면 돼지머리도 치워졌어야 옳은데, 돼지머리가 그의 시야에 거슬렸던 것일까. 그런데 시인은 이런 식으로 ‘오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단다. 6월20일 기자는 그가 집필실처럼 종종 이용한다는 경기 일산시의 한 카페에서 만나 오해를 풀었다.

‘오해’의 출발은 1994년 첫 시집을 냈을 때부터였다. 기자들과 평론가들은 ‘잔치’를 ‘운동’으로 해석하는 것을 시작으로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시인 최영미에 대해 온갖 오해를 세간에 띄웠다. 물론 그에게도 혐의가 없지는 않았다. ‘운동보다 운동가를 좋아했던’ 일이나 시위대에 섞여 있다가 15일간 유치장 신세를 진 전력 등이다. 그래서 첫 시집의 시들을 싸잡아 운동권과의 의절 혹은 1980년대라는 과거를 지우는 것으로 ‘오역’하는 일도 있었다.

ⓒ 시사저널 전영기
첫 시집 내고 생긴 오해 푸는 계기 될 수도

“1995년이던가, 어느 문예 계간지로부터 ‘386’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386세대라는 용어가 언론의 인기 상품이었던 때다. 전화기 너머 사무적인 목소리에 실린 ‘386’이 내 귀에 닿는 순간, 딱딱한 덩어리가 속에서 올라왔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런저런 변명을 내세워 계속된 청탁을 거절했다. 할 말이 많아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오해에 대한 변명 같은 글을 쓰면서 1980년대에 갇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 속에 속하는지도 불확실한 386세대를 대표하는 듯한 글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해가 아직도 남아 있다면 이 또한 끝낼 계기가 생겼다. 그가 문학 계간지 <문학의 오늘> 2013 여름호부터 1980년대를 무대로 한 장편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제목은 <토닉 두세르>. 프랑스 화장품 브랜드 랑콤의 제품 이름으로 ‘부드럽고 순한 물’이라는 설명이 달렸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작가가 자전적 이야기를 펼친다는 느낌도 들었다. 최 시인이 다닌 서울대가 배경이며, 주인공이 1994년 단편집 <축제의 끝>을 펴내는 소설가라는 대목 등이 그랬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오해할까 봐 극구 부인했다.

“주인공인 여대생 진주는 1980년대에 대학 생활을 한 세 사람 이상의 캐릭터를 종합해 만든 인물이다. 내가 소설로 다루고 싶은 건 운동권 후일담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어느 청춘이다. 폭압적인 체제에 앞장서 싸우지도 못하고, 멀찍이 물러나 모르는 척하지도 않았지만,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았던 주변부의 삶이다.”

그는 운동권 커플의 폭력적 관계로 시작하는 이 소설의 초고는 1988년 이미 써놓았던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시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훨씬 전이다. 그는 원고지 450장 분량으로 썼던 것을 25년 동안 간직해왔다고 덧붙였다. 그렇다고 방치한 것도 아니었다. 이 화두는 언젠가는 끝내야 할 숙제 같은 것이었다. 그동안 고치고 다시 쓰며 여러 개의 파일이 만들어졌다. 최근 <문학의 오늘>에 발표하기로 마음먹고 파일을 정리하는 데만 한 달 넘게 걸렸다. 그는 자료를 정리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역사는 집단의 기억을, 문학은 개인의 기억을 다룬다. 역사보다는 문학이 더 깊게 시대를 드러낸다. 쇠와 살이 부딪치던 청동시대를 통과하며 어디에 있었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모두 개인이었다. 개인의 기억이 집단의 기억보다 더 정확하고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의 영혼에 각인된 흉터와 무늬를 그려내는 작업에 성공한다면 이 소설은 우리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개인의 기억을 그려내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집단의 기억을 그려내는 것보다 좀 더 폭넓은 시공간이 필요했나 보다. 주인공들은 1978년 즈음의 기억에서 시작해 그들의 현재 사는 곳까지 들락거렸다. 그렇게 1980년대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최 시인은 등장인물들의 기억 속으로 파고들었다. 1980년 광주가 33년이나 지났는데, <흉터와 무늬>라는 소설을 쓴 작가로서, 많은 이의 마음속에 트라우마로 남은 그 시절을 결국 쓰려고 했던 것이다.

소설 속 여대생 진주 또한 세월이 지나 이름을 떨친 작가가 된다. 이런 설정을 한 것은 그가 이 소설을 위해 발품을 팔아 취재한 내용 때문이었다. 육성을 그대로 살려 전하고 싶은 것을 어떻게 살릴까 고민하다가 편지나 대담 형식으로 처리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원래 주인공을 큐레이터로 설정했던 것을 작가로 바꾸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1980년대 모르는 세대와의 단절감 해소됐으면”

“독자 편지는 이 소설을 쓰면서 ‘1980년 광주’를 경험했던 사람들과 1980년대에 상처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과 인터뷰할 때 녹음기를 가지고 가서 녹취했다. 그 부분만큼은 팩트를 충분히 살리고 싶었다.”

최 시인의 독자 중에는 젊은이들이 많은데, 이 소설이 그들에게 읽힐까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한 생각도 확고했다. “지금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당시 20대를 보냈던 40~50대이지 않는가. 그런데 그들의 아들딸 되는 10~20대 젊은 애들은 그 시대에 한 개인의 삶이 그 시대의 일로 해서 어떻게 변했는지 잘 모르지 않나. 그런 세대 간의 단절감 같은 것을 해소시켜주려 한 측면도 있다.”

그는 이 소설의 얼개를 짜면서 <레미제라블>에서 자극을 받기도 했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소설 <레미제라블>을 쓴 것도 프랑스 혁명이 끝난 후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던 것이 그중 하나. 최 시인은 “나도 1980년대의 청춘을 이해하는 데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다. 최근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면서 약간 욕심이 생겼다. 한 개인만 다루는 것보다 폭넓게 많은 사람을 다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토닉 두세르>를 읽으며 좌파·우파 등 흑백논리가 끼어드는 것도 경계했다. 아예 어느 편인지 궁금해하지도 말고 읽을 것을 당부했다. 이 당부를 무시하는 것은 오해하는 자의 몫인 셈이다. 그는 어느 작가에 대해 변절했다는 말을 쓰는 데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작가에게는 무한한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동에 대해서 비판한다고 해도 흑백논리로 단죄하듯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좌파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그 사람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좌파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우파라고 말하고 우파 성격의 글을 쓰는 사람이 실생활에서는 좌파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더라.”

그는 덧붙여 소설 제목 <토닉 두세르>에 대한 설명을 한 번 더 강조했다. 시대 상황 때문에 자신의 성향과 어울리지 않게 운동권 주변부를 맴도는 주인공을 은유한 것이다. 여대생 진주가 혁명에서 멀어진 자신을 숨기는 도피처로 혁명의 나라 프랑스에서 온 화장품을 바르는 장면이 소설에 등장한다.

풍자시로 사랑받고 싶은 욕심도 여전

오래된 기억에 천착한 그는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 계정을 만든 것이 있다면 카카오톡이 유일하다. ‘단순하게 살자’가 생활 원칙이라는 그는 당분간 <토닉 두세르>에만 몰두하겠다고 했다. 이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그는 다섯 번째 시집 <이미 뜨거운 것들>을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 이 시집에도 풍자시는 넘쳐난다. 그는 “첫 시집에서도 풍자시가 있는데, 의식적으로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2005년 펴낸 <돼지들에게>부터였다”고 설명했다.

풍자시인데, 기자나 평론가들은 쉽고 솔직하다는 평을 달았다. 너무 직설적이어서 처절하다고까지 했다. 이에 대해 그는 “굉장히 진부한 평이다. 첫 시집부터 그런 평들이 따라다니는데, 그런 평을 쓰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게으르다고 생각한다. 시도 제대로 안 읽고 쓴 것들이지 싶다. 어려운 것을 쉽게 풀어내는 사람과 쉬운 것을 어렵게 쓰는 작가, 이 둘 중 누가 더 재능이 있나 묻고 싶다. 미국과 일본에서 내 시에 대해 평한 것들을 보면 ‘쉽다’고 한 대목은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그가 <이미 뜨거운 것들>이라는 제목을 올리게 된 시 ‘이미’의 전문은 이렇다. ‘이미 젖은 신발은/ 다시 젖지 않는다// 이미 슬픈 사람은/ 울지 않는다// 이미 가진 자들은/ 아프지 않다// 이미 아픈 몸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미 뜨거운 것들은/ 말이 없다’

그런데 이 시를 쓰게 된 계기에 대한 설명을 들은 이들이 많이 공감했다고 한다. “몇 년 전 어머니 간병 때문에 병원에 있을 때였다. 환자들은 처음에는 수술로 몸에 난 상처, 뇌 수술로 일그러진 얼굴을 간병인이나 가족들에게 보이기 부끄러워했다. 아파하기 시작하면서 부끄러움을 모르게 되는 것을 봤다. 인간의 조건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아픔에 대한 서정시를 쓴 것인데, 우연한 자리에서 만난 송호근 교수가 이 시가 좋다며 조용필씨에게 줘보라고 농담 삼아 이야기하기도 했단다. 그가 쓴 시 중에 노래로 만들어진 것이 꽤 있다고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안치환이 부른 <선운사에서>였다. 이 시는 네 명의 작곡가가 각각 다른 버전으로 곡을 붙여 세상에 나왔다. 허가받지 않고 만들어진 것이 더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고 했다.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북한산에 첫눈 오는 날>도 노래로 만들어졌고,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는 <선운사에서>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라고.

그런데 그는 이미 많이 읽힌 옛날 작품들보다 최근 펴낸 <이미 뜨거운 것들>이 독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받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