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는 피해가지 못했다
  • 김지영 기자 (young@sisapress.com)
  • 승인 2013.07.0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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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 CJ 회장, 배임 등 혐의로 사법처리

“내가 이재현 CJ 회장을 2007년 처음 만났을 때 ‘재벌 아들이 이런 것도 몰라?’라고 할 정도로 세상 물정을 잘 모르더라. 나는 다른 재벌 아들들과도 자주 어울려봤는데, 속되게 말해서 ‘까진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 회장은 점잖고 순박한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술친구가 있기 마련인데, 나와 어울리기 전까지 이 회장은 편하게 함께 술 마실 패밀리도 없었다. 그는 100% 외로운 사람이었다.”

지난 6월 말 기자가 만난 이 회장의 절친한 ‘술친구’가 한 말이다. 이 술친구는 현재 사업을 하고 있다.

이재현 CJ 회장이 서울중앙지검에서 비자금 조성 및 탈세 의혹에 대해 조사받은 뒤 6월26일 새벽 귀가하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박근혜정부에 ‘읍소’했으나 허사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6월25일 오전 9시35분, 검찰청사 포토라인에 섰다. 이 회장과 검찰의 악연은 이번이 세 번째. 1997년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현철씨의 뇌물 수수에 대한 수사 당시 참고인으로 검찰에 처음 출석했다. 2009년 ‘박연차 게이트’ 사건 수사 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하면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때까지는 운이 좋았다. 그리고 4년이 흘렀다.

하지만 이번엔 분위기가 180도 달랐다. 검찰은 득의만면했고 CJ측은 좌불안석했다. CJ는 박근혜정부 앞에 바짝 엎드렸다. 신문과 방송 등에 ‘CJ E&M이 대한민국 창조경제를 응원합니다’라는 문구의 광고를 도배질했다. ‘창조경제’는 박근혜정부의 핵심 국정 철학. CJ 소유의 tvN 채널 프로그램인 <SNL 코리아>의 한 코너였던 시사 풍자 ‘글로벌 텔레토비’도 5월 말부터 자취를 감췄다. 글로벌 텔레토비에선 박근혜 대통령도 풍자 대상으로 등장했었다. 하지만 박근혜정부를 향해 선처를 호소했던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재계에서 이재현 회장은 ‘은둔의 경영자’ ‘폐쇄 경영자’로 불린다. 그만큼 대외 활동이 많지 않았다. 어찌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지, 언론사마다 그의 얼굴 사진이 몇 장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번 사건이 불거진 이후인 6월5일, 이건희 회장의 장모인 고 김윤남 여사의 빈소를 찾으면서 언론사 카메라에 포착된 게 고작이다. 언론과의 인터뷰도 극도로 꺼렸다.

CJ그룹의 한 전직 임원은 “이 회장은 폐쇄적으로 경영하는 스타일이다. 경복고와 고려대 동문 등 극소수와만 가깝게 지냈다”며 “그러다 보니 이 회장을 옹호하는 우군이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좋게 평가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고 회고했다.

이 회장은 1960년 3월 서울 중구 장충동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이 회장의 아버지는 창업주의 장남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어머니는 손영기 전 경기도지사의 딸인 손복남 CJ 고문이다.

이맹희 전 회장도 비운의 황태자였다. 삼성 후계자로 점쳐졌으나, 1970년대 초부터 후계 구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 등으로 이병철 창업주와 이 전 회장 사이가 크게 벌어졌다. 이 전 회장은 삼성전자 부사장을 끝으로 일찌감치 삼성가(家)와 인연을 끊었고, 이후 삼성가에서 ‘이맹희’는 껄끄러운 존재였다.

이재현 회장의 누나인 이미경 CJ E&M 부회장. ⓒ CJ E&M 제공
이미경 부회장 역할 커질 듯

현재 이 전 회장은 동생 이건희 삼성 회장과 유산을 둘러싸고 소송을 벌이고 있다. 이재현 회장 입장에선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다투고 있는 형국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번 CJ 사건이 불거지자 재계 일각에서는 “삼성이 전 방위로 막강한 파워를 동원해 ‘CJ 죽이기’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출처 불명의 소문이 돌았다. 이는 삼성과 CJ의 관계가 그만큼 좋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재현 회장은 경복고와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후 1983년 씨티은행에 입사했다. 삼성과는 무관한 곳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경영 수업을 시키려는 할아버지 이병철 회장의 의중에 따라 1985년 제일제당(현 CJ) 경리부에 들어갔다. 1992년 12월부터 잠시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이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1993년 이 회장은 제일제당 계열 분리 결정과 함께 어머니 손 고문으로부터 제일제당 주식을 증여받아 최대 주주가 됐다. 사실상 삼성그룹에서 분리된 것이다.

이 회장은 2002년 3월 제일제당 회장에 올랐다. 당시 재계에선 “이맹희 회장의 꿈을 아들인 이재현 회장이 일부나마 이뤘다”는 말이 나돌았다. 2002년 10월 제일제당은 삼성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사명까지 CJ로 바꿨다. CJ가 삼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이지만, 장손가의 명맥은 유지했다. 이병철 선대 회장이 장남(이맹희)은 많이 싫어했지만 맏며느리(손복남)와 장손자(이재현)에 대한 정은 각별했다고 한다. 이병철 회장은 1987년 타계할 때까지 서울 장충동 자택에서 며느리, 장손과 함께 살았다. 창업주의 장례식 때 영정을 든 사람도 물론 장손이었다. 창업주의 부인 박두을 여사도 2000년 타계하기 직전까지 이 회장과 함께 장충동에서 살았다.

이 회장의 누나인 이미경 CJ 부회장은 경기여고와 서울대 가정교육학과를 졸업한 후 삼성전자에 근무하다 1995년 제일제당 이사로 합류했다. 그는 다국적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드림웍스 설립을 주도한 후 CJ엔터테인먼트 사업부 해외파견 상무 직함으로 미국에 머물렀다. 2005년 이 부회장은 CJ엔터테인먼트, CJ CGV, CJ미디어 및 CJ아메리카 담당 부회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재계 일각에선 “이 회장과 함께 CJ를 이끌고 있는 외삼촌 손경식 회장(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회사 경영에 발을 담그고 있는 어머니에 이어 누나까지 가세함으로써 이 회장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이 회장은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면서 식품 사업만 하던 제일제당에 엔터테인먼트와 유통, 물류 등 사업 분야를 확장하면서 CJ를 재계 14위로 키웠다.

그런 이 회장이 인생 최대 위기를 맞았다. 김승연 한화 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도 구속된 현 시점에서 사면 복권은 엄두도 못 낼 상황이다. 더군다나 ‘경제민주화’를 천명하고 있는 박근혜정부의 집권 초기인 데다 채동욱 검찰총장의 재계 수사 첫 작품이어서 이 회장이 맞은 시련의 계절은 꽤 오래 지속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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