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진 민심은 ‘핏발’, 총탄은 ‘빗발’
  • 이집트 카이로=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3.07.16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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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기자, 유혈 사태 치닫는 이집트 카이로 시위 현장 한복판에 가다

햇살이 머리 위로 화살처럼 쏟아졌다. 북아프리카의 초여름 태양이 작열하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커다란 전자레인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갑작스런 자외선 세례에 익숙하지 않은 피부는 이내 발갛게 달아올랐다. 건조한 대기를 타고 더위는 불을 뿜었다. 7월5일 금요일 낮 12시, 2011년 이집트 민주화 혁명의 기념비적 장소인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 이미 상당한 인파가 모여 반정부 집회를 이어가는 가운데, 정오의 햇살 이상으로 뜨거운 광경이 막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광장 한복판에 양 네 마리가 있었다. 각각의 털에는 빨간 페인트로 글자가 쓰여 있었다. 모두 ‘무르시’로 발음되는 아랍 문자였다. 곧 칼을 든 한 시민이 양 한 마리의 심장에 날을 박아 넣었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양의 숨이 끊어졌다. 피가 솟구치더니 아래로 흘러내렸다. 양의 배설물도 한가득 바닥에 쏟아졌다. 주변을 에워싼 사람들이 환호했다. 양을 죽인 자는 그 목을 베어 트럭 앞에 내걸었다.

양은 곧 무함마드 무르시 이집트 전 대통령을 가리킨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국정 난맥을 초래한 무르시 전 대통령의 무능함이 목동의 손짓에 굴종하는 양의 어리석음과 같다고 본 것이다. 양은 무르시를 대신해 무참히 살해됐다. 피를 본 시민들의 에너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우렁찬 함성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무르시 정권을 향한 반대파 시민들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느끼게 하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왼쪽)7월7일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 모인 반무르시 시위대. 이들은 무르시를 축출한 군부를 신뢰하고 있다.ⓒ 시사저널 이규대(오른쪽)7월7일 카이로 대학 앞 광장에 운집한 친무르시 시위대. 무르시 대통령의 사진을 손에 든 이가 많다.ⓒ 시사저널 이규대
무르시 전 대통령 겨냥한 광장의 함성

2년 전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를 퇴진시켰던 광장의 함성은 취임한 지 불과 1년 된 신임 대통령을 향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결과 7월3일 반대파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은 군부가 무르시 대통령을 축출해 감금했다. 시민의 분노가 군부의 힘을 빌려 또 한 번 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낸 것이다. 이에 고무된 군중이 내뿜는 열기가 타흐리르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분노한 ‘시민’은 무르시 반대파만이 아니었다. 무르시가 축출된 후, 거꾸로 그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분노 또한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무르시 지지자는 반대파와는 달리 무르시 축출을 군부의 쿠데타로 규정했다. 이들은 무르시의 석방과 대통령직 복귀를 요구했다. 무르시 반대파들이 타흐리르 광장으로 향하는 동안 무르시 지지자들은 인근 나세르시티 지역에 대거 집결했다. 쫓겨난 대통령 무르시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는지에 따라 시민들이 완전히 둘로 나뉜 것이다.

오후부터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휴일(이집트는 금요일과 토요일이 공휴일)을 맞아 무르시 지지자들이 사뭇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카이로 대학 앞 광장에서 친무르시 성향 시민들이 항의 집회를 진행하다 경찰에 대거 연행됐다. 또 다른 무르시 지지자들은 카이로로 진입하는 고속도로에서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사태의 흐름이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한 취재진이 현장을 빠져나온 뒤 이날 밤, 거리에서는 대규모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그야말로 ‘피의 금요일’이었다. 양 세력이 충돌하면서 최소 30여 명이 죽고 그보다 10배 넘는 시민이 다쳤다.

과거 타흐리르 광장에 함께 섰던 시민들은 지금 두 편으로 갈려 대립하고 있다. 이들은 과거 독재자 무바라크 축출에 한목소리를 내며 민주화 혁명을 성취해낸 주역이다. 그러나 혁명 후 2년, 이집트 국민은 완전히 둘로 분열했다. 그 결과가 바로 최근 이어지는 폭력 사태다. 지금 거리에는 유혈이 낭자하다. 이집트 사회의 혼란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시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룩했던 이집트 사회는 왜 이런 비극을 맞이하게 됐을까. 원인은 독재 정권이 붕괴한 후 찾아온 이집트 정치의 난맥상에 있다.

무슬림형제단 집권이 사회 분열 단초

지난해 6월의 대선 승리를 통해 이집트 사상 첫 민선 대통령으로 취임한 무르시의 정치적 배후는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무슬림형제단이다. 무슬림형제단은 정당이라기보다는 테러가 중심이 된 종교운동단체에 가까운 활동을 보여왔다. 이들의 과격한 행보는 시민들의 우려를 자아냈다. 양측 간의 균열 조짐이 이미 싹트고 있었던 셈이다. 무슬림형제단은 전체 이집트 시민 중 약 30%에 해당할 정도로 무시 못 할 세력을 갖고 있다. 이들은 무르시의 축출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자신들에 대한 군부의 도전이라고 본 것이다.

수도 카이로, 시나이 반도, 수에즈 운하 주변 등에서 유혈 충돌이 계속된다. 갈수록 위세를 더해가는 폭력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기자는 엇갈리는 양측의 입장을 좀 더 밀착 취재해보기로 했다. 7월7일 월요일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가 또 한 번 예고된 상황이었다. 오후 4시부터 8시에 이르기까지 무르시 지지파가 모인 카이로 대학 앞 광장과 무르시 반대파가 모인 타흐리르 광장을 차례로 방문했다.

카이로 대학 앞 광장 입구에는 군부의 전차가 주둔해 있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1대였지만 곧 3대로 늘어났다. 급격히 모여드는 친무르시 시위대를 압박하기 위한 군부의 조치였다. 시위대는 광장 입구를 봉쇄하며 군부에 맞서고 있었다. 경계는 삼엄했다. 기자와 동행한 이집트인 청년이 “나도 무슬림청년단원이다. 한국인 기자가 취재를 하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다”고 밝힌 뒤에야 접근이 가능했다. 시위대는 가방과 몸을 철저히 수색한 후 진입을 허가했다.

이미 상당한 인파가 모여 집회를 열고 있었다. 단상 주변에서 열정적으로 구호를 외치는 시민도 있었고, 그 뒤에 물러나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는 시민도 있었다. 무르시 전 대통령의 사진을 손에 든 이가 많았다. 무르시의 석방과 대통령직 복귀를 요구하는 현수막도 한쪽에 걸렸다. 미리 보도블록을 부숴둔 것도 눈에 띄었다. 군부나 경찰이 진압을 시도할 때 곧바로 던질 수 있도록 준비해둔 것이다.

무르시 지지자들은 최근 사태의 책임을 군부에 돌렸다. 군부가 헌법 질서를 묵살하고 정당성을 지닌 대통령을 끌어내렸다는 것이다. 시위에 참가한 마함마드 포락(38)은 “이 사건은 쿠데타라고 정의해야 한다. 모든 과정을 군부가 계획했다”고 비판했다. 지난 1년간 무르시 전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해서는 좋지 않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책임을 다른 곳에 돌렸다. 이에 대해 할튼 마흐무드 아흐마드는 “우선 (무르시를 계속 비판해온) 언론부터 문제가 많았다. 정부 기구에 있는 사람들도 비협조적이었다. 무르시가 아닌 그 어떤 대통령이라도 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무르시는 집권 당시 장차 국가 경제를 살리기 위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무르시 지지자들은 그들이 표방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해서도 소리 높여 강조했다. 2년 전 무바라크 퇴진 시위에 참가했다는 하드테니 무스마일(58)은 “당시 혁명은 물론 잘된 것이다. 그러나 혁명 이후에 세속 단체들이 이슬람을 무시하고 그들만의 전통을 만들려 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밝혔다. 한 시민은 “무르시 지지자들이 아무 이유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다. 지금 이집트 전체에서 일어나는 사태는 곧 이슬람에 대한 전쟁과도 같다. 우리의 이슬람주의는 반드시 이집트 헌법에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압델 파타 엘 시시 국방장관의 사진을 들고 있는 반무르시 지지자들(왼쪽). 친무르시 시위대는 무르시 축출을 쿠데타라고 규정한다(오른쪽). ⓒ 시사저널 이규대
반무르시파 “2011년 시민 혁명의 연장선”

오후 5시 무렵, 타흐리르 광장으로 가기 위해 카이로 대학 광장을 빠져나왔다. 이 과정에서 카이로 대학 앞으로 속속 모여드는 수많은 친무르시 시민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일부 시민은 대오를 정연히 갖춰 도로를 행진하기도 했다. 카이로 대학 앞 광장으로부터 차로 약 10여 분 거리에 있는 타흐리르 광장 주변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민들의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양측 시위대의 규모가 크게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타흐리르 광장에 들어갈 때도 가방과 몸을 수색했다. 하지만 카이로 대학 광장에 진입할 때보다는 수월했다. 타흐리르 광장의 광경은 카이로 대학 앞과 거의 유사한 느낌을 주었다. 숨이 훅 막힐 정도로 열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집회, 인터뷰하는 기자 주변을 동그랗게 에워싸며 열변을 토하는 시민의 모습 등이 그랬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주장과 메시지는 친무르시 시민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예를 들어 반무르시 시민 중에는 무르시 축출을 주도한 군부 지도자 압델 파타 엘 시시 국방장관의 사진을 든 이가 많았다.

반무르시 성향의 시민들은 무르시 축출이 일반적인 의미의 쿠데타와 다르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군부는 시민의 요구를 대신 이행한 것일 뿐, 무르시를 쫓아낸 것은 어디까지나 시민의 분노였다는 것이다. 아비 기릴은 “이 사건은 쿠데타가 아니다. 국민 요구에 군부가 부응했을 뿐이다. 오늘 여기 모인 사람들은 군부의 행동이 쿠데타가 아님을 증명하고 그들을 지지하려 나왔다”고 말했다. 아흐마드 하세닌 아흐마드(60)는 무르시 정권에 대해 “국민을 위한 나라가 아닌 무슬림을 위한 나라를 만들기 시작했다. 무슬림형제단은 자기네 사람들을 중앙 요직에 앉히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국민의 삶과 직결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최근의 사태가 2011년 시민 혁명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시민의 값진 승리가 무슬림형제단에 의해 빛을 바랬기에, 이를 바로잡고 진정한 혁명을 완수하려는 노력이 6월30일부터 본격화됐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할 주체로 군부를 지목했다. 이들 사이에서 군부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다. 군부 역시 무르시 반대 시민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반복적으로 표명했다. 타흐리르 광장 상공에 군부가 띄운 헬기와 전투기가 보일 때마다 시민들은 열광했다.

친무르시 시민과 반무르시 시민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린다. 지금 이집트의 혼란이 평화적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크지 않아 보이는 이유다. 7월7일 밤, 양 진영 사이에서는 또 어김없이 유혈 충돌이 발생했다. 거리는 또다시 피에 젖었다. 카이로 시내에서는 친무르시 성향 시위대와 군부가 극렬 대립 중인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치안은 더없이 불안하다. 친무르시 성향 시위대 중 일부는 취재진이 탄 택시를 위협하며 “너희들은 어느 쪽이냐”며 대답을 요구하기도 했다.

상황 진정시킬 정치적 리더 안 보여

민주화 이후의 이집트는 지금 ‘거대한 모순’에 봉착했다. 군부를 핵심 세력 기반으로 하는 무바라크 독재를 무너뜨린 것은 시민의 힘이었다. 그런데 민주적이며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선출한 대통령을 군부 쿠데타라는 불법적 수단으로 끌어내린 것 또한 시민의 힘이었다. 반민주적 쿠데타가 도리어 다수 시민들의 뜻을 민주적으로 대변하는 듯 여겨지는 모순적인 상황이 이집트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대통령 축출의 부당함을 주장한다.

합법과 불법, 정의와 불의, 민주와 반민주의 가치가 뒤섞였다. 분열된 시민은 각자 주장의 정당성을 폭력으로 관철하려 든다. 상황을 진정시키고 대화를 중재할 만한 정치적 리더는 출현하지 않고 있다. 좀처럼 사태가 수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혁명 이후 2년, 이집트 사회는 총체적 혼란에 빠졌다.


무슬림형제단 vs 군부, 해묵은 갈등

지난해 6월30일, 대선에서 승리한 무르시 대통령은 이집트 사상 첫 민선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무르시의 정치적 배후는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무슬림형제단이었다. 무슬림형제단은 1928년 결성된 이집트 야권의 최대 세력이다. 군부 독재 체제 아래서 정당이라기보다는 테러가 중심이 된 운동단체에 가까운 활동을 벌였다. 혁명 이후 급속도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무슬림형제단의 행보가 많은 시민에게 우려를 산 이유다.

그럼에도 무르시는 무바라크 체제 출신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 덕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빠른 속도로 신망을 잃었다. 무르시가 재임하는 1년 동안 물가는 상승하고 실업률은 가파르게 오르는 등 경제 상황은 오히려 나빠졌다. 특히 석유 공급이 극도로 불안정해져 하루에 여러 차례 정전이 발생했을 정도다. 정부 각료나 지방자치단체장 자리에 전문성이 결여된 무슬림형제단 인사를 앉힌 것도 문제가 됐다.

무엇보다 시민들이 무르시에게 등을 돌린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납득할 만한 장기적인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 있었다. 무르시는 IMF(국제통화기금)가 요구하는 재정 적자 감축을 이행하기 위해 서민에게 지급되는 보조금을 줄이겠다고 발표했으나, 여론의 거센 역풍에 시달리자 불과 하루 만에 자신이 내놓았던 정책을 철회했다. 일관성 없는 국정 운영 태도를 보인 셈이다. 무슬림형제단을 지지하지 않는 시민들은 무르시의 철학 없는 국정 운영에 점차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무슬림형제단이 추구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반감도 고개를 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하지만 전체 이집트 시민 중 30%에 해당하는 무슬림형제단 지지자는 달랐다. ‘강력한 이슬람 국가 건설’이라는 목표 아래 결속돼 있는 그들은 무르시를 강력히 지원했다. 이집트 시민들은 ‘친무르시’와 ‘반무르시’로 나뉘어 첨예한 갈등을 빚었다. 결국 이집트 시민의 분열은 포용력이 부족한 이슬람주의 세력이 혁명 이후의 정치적 리더 자리를 차지한 것에 근본 원인이 있었던 셈이다. 최근 1년간 무슬림형제단의 정치는 시민이 품고 있던 변혁에의 열망을 제대로 수렴하지 못한 채 사회 분열의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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