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트라우마’에 갇힌 줄기세포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3.07.23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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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연구, 사실상 중단…미국· 일본 등 한국 앞질러

서울 오류동에 있는 수암생명공학연구원의 액체질소 통에는 인간 배아줄기세포(NT-1) 한 개가 있다. 황우석 박사가 2004년 세계 최초로 확보했다는 그 세포다. 이 세포는 한국 줄기세포 연구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 줄기세포를 얻는 방법에 대해 캐나다 등 세계 여러 나라가 특허를 인정했음에도 한국 정부는 그러지 않았다. 이 줄기세포가 국가가 관리하는 줄기세포주은행에 보관되지 못하고 몇 년째 연구원에 잠들어 있는 이유다.

그런 사이, 올 5월 미국에서 인간 배아줄기세포 복제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미국 오레곤 보건과학대학 연구팀은 성인 여성에게 기증받은 난자에서 핵을 제거하고 다른 사람의 피부세포에서 뽑은 핵을 넣은 뒤 전기 충격을 가해 세포분열을 일으키는 방법을 이용했다. 황우석 박사가 시도했던 방식이다. 현상환 수암생명공학연구원 원장은 “한국은 세계 최초로 맞춤형 인간 배아줄기세포를 확보하고도 자국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사이에 다른 나라가 ‘세계 최초’라고 주장하는 일이 발생한 셈”이라며 국내 줄기세포 정책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박세필 제주대 줄기세포연구센터 교수도 “줄기세포 확립은 논문 조작과는 별도로 시간을 가지고 확인해야 할 사항이었음에도 우리는 2005년 모든 것을 졸속으로 묻어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왼쪽) 차의과대학 연구팀이 줄기세포를 관찰하고 있다. (오른쪽) 수암생명공학연구원에 있는 인간 배아줄기세포(NT-1) ⓒ 시사저널 자료사진
추월당한 한국의 줄기세포 연구

일본 요코하마 시립대 연구진은 7월, 줄기세포로 사람의 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줄기세포로 간세포를 만든 적은 있지만 장기 자체를 만든 것은 처음이다. 그 인공 간은 5mm의 작은 크기이지만 간 기능을 갖춘 것으로 확인됐다. 간세포 외에도 복잡한 혈관까지 들어 있는 이른바 간 씨앗이다. 간 씨앗은 5~6주차 태아가 가진 초기 상태의 간을 말한다. 사람의 줄기세포를 실험용 쥐에 이식해서 이러한 결과를 얻었다. 이 기술을 사람에게 적용하려면 앞으로 1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간이 손상된 환자가 이식 대신 인공 간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8년 전만 해도 한국은 세계 줄기세포 연구를 견인하던 국가였다. 그러나 황우석 박사 사태 이후 연구 환경이 위축됐다. 줄기세포를 이용한 당뇨 치료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안철우 강남세브란스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줄기세포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은 많아졌지만 실제 연구는 거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 사이 다른 국가들은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단계에서 이용하는 단계로 기술을 발전시키면서 한국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한국의 배아줄기세포 연구 논문 수는 96편으로 세계 7위 수준이다. 미국 874편, 중국 222편, 영국 188편, 일본 187편과 비교된다. 2010년 기준 한국의 줄기세포 기술력은 줄기세포 선진국인 미국에 비해 3.6년 뒤진 것으로 조사됐다.

자동차 엔진이 심하게 망가지면 엔진을 교체할 수밖에 없다. 이 엔진을 만드는 재료, 즉 금속이 줄기세포에 해당한다. 줄기세포는 뇌·간·뼈·눈 등 인체 조직으로 분화하는 초기 상태의 세포를 말한다. 이런 능력을 이용하면 현재 치료하기 어려운 질병을 완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뇌졸중 후유증으로 반신마비가 된 환자에게 줄기세포는 손상된 신경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마술’을 부릴 수 있다. 이러한 잠재력 때문에 관련 산업도 점차 커지는 추세다.

미래창조과학부 자료에 따르면 세계 줄기세포 시장은 2008년 4억 달러 규모에서 연평균 52.2% 성장해서 2014년에는 51억 달러 정도로 전망된다. 세계 각국이 줄기세포 연구에 수조 원씩 투자하며 미래 성장 동력으로 삼는 이유다. 국내 줄기세포 연구에 들어가는 예산은 연 1000억원 남짓이다. 연구기관과 기업에 분배하면 사실상 각 연구에 지원되는 금액은 그렇게 풍족한 편이 아니다. 웬만한 연구에 필요한 시약을 사는 비용만 한 달에 1억원이 든다.

학자들은 돈보다 연구 환경을 아쉬워한다. 정부는 성체줄기세포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그 성과를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줄기세포 연구자는 “세계적으로 배아줄기세포 연구에서 한국이 뒤처지기 시작했는데, 정부는 성체줄기세포 성과만 앞세워 마치 한국이 줄기세포 강국인 양 선전한다”고 지적했다.

“썩은 달걀에서 병아리 부화시키라는 식”

과거에는 사람의 탯줄·골수·지방에서 체세포를 뽑아내 원심분리기에 돌려 줄기세포를 분리했다. 이를 성체줄기세포라고 하는데 줄기세포 수가 너무 적고, 분화하는 데 한계가 있어 학자들은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수정란을 이용한 배아줄기세포를 찾기 시작했다. 주로 불임 치료에 쓰고 남은 수정란을 이용하는데, 생명윤리와 면역 거부 문제가 제기되면서 체세포 복제 배아줄기세포를 만드는 방법이 나왔다. 핵을 제거한 난자에 환자의 체세포에서 뽑은 핵을 넣는다. 여기에 전기 충격을 주면 세포가 분열하고 세포 덩어리(배반포)가 된다. 여기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할 수 있다. 황우석 박사를 포함해 많은 세계 학자가 이용하는 방식이다. 

아예 난자를 사용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 체세포에 몇 가지 유전자와 화학물질을 주입해 줄기세포(유도 만능 줄기세포, iPSc)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미 다 자란 세포를 줄기세포로 되돌린다고 해서 역분화 줄기세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이 분야에 대한 연구로 지난해 노벨상을 받기도 했다.

황우석 박사 사태 이후 난자를 이용한 국내 체세포 복제 배아줄기세포에 대한 연구는 중단됐다. 현재 줄기세포를 연구할 수 있는 기관은 9곳이지만 연구 승인은 단 한 건밖에 없었다. 차의과대학이 2009년 정부의 승인을 받아 진행한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유일하다. 그러나 이 연구는 신통치 않았다. 난자 수백 개를 사용하고도 단 한 개의 줄기세포도 확보하지 못했다. 2개 이상의 줄기세포를 확보하겠다던 애초 목표는 무산됐다.

문제는 난자의 질이었다. 싱싱한 난자가 아니라 냉동 난자를 사용했는데, 냉동 난자로는 줄기세포를 만들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냉동 난자란 불임 치료에 쓰기 위해 얼려둔 난자를 말한다. 불임 여성에게서 여러 개의 난자를 빼낸 후 냉동 보관하면서 필요할 때 불임 치료에 사용한다. 이 냉동 난자를 녹이면 정자와 결합해 수정란이 된다. 그러나 냉동 상태에서 세포의 질이 손상되기 때문에 줄기세포를 만들 수는 없다.

차의과대학은 두 차례에 걸쳐 정부에 신선 난자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허가하지 않은 근거는 생명윤리기본법에 있다. 생명윤리기본법은 줄기세포 연구에 사용할 수 있는 난자 종류를 규정하고 있다. 동결 보존된 난자, 미성숙 난자(배란하기 전의 초기 난자), 비정상적인 난자, 폐기될 난자 등이다. 또 여성으로부터 난자를 받거나 금전적으로 보상하는 행위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한 줄기세포 전문가는 “한마디로 썩은 달걀에서 병아리를 부화하라는 식”이라며 국내 배아줄기세포 연구 환경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해외로 떠나는 한국 연구자들

차의과대학의 줄기세포 연구가 실패한 후 국내의 체세포 복제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모두 중단된 상태다. 학자들은 한국을 떠나고 있다. 차의과대학은 체세포 복제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위해 미국에 연구소를 만들었다. 미국 등지에서는 난자를 기증하거나 모집하는 행위가 가능하고, 금전적 보상도 허용된다. 엄격한 규약이 있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연구 목적으로 신선 난자를 구할 수는 있다. 한국이 3년을 쏟아붓고도 실패한 연구를 미국 연구진이 몇 개월 만에 성공으로 이끌었던 배경이다. 이번에 체세포 복제 배아줄기세포를 얻는 데 성공한 미국 오레곤 보건과학대의 연구를 한국에서 진행한다면 징역형 또는 수천만 원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동물 복제 연구에 머물러 있다. 박세필 제주대 줄기세포연구센터 교수는 2000년대 초만 해도 인간 줄기세포 전문가였다. 그러나 지금은 멸종 위기에 있는 제주 흑소를 복제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박 교수는 “생명윤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각 연구기관에 생명윤리위원회를 두고 연구 전에 승인을 받도록 했다”며 “그런데 그 승인을 받은 후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의 승인을 또 받아야 한다. 미국이나 영국 수준만큼이라도 규제를 완화면 한국은 세계 줄기세포 연구 분야를 선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규제가 강한 만큼 줄기세포 연구가 줄어들면서 줄기세포 전문가가 한국에서 연구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이상훈 한양대의대 생화학·분자생물학교실 교수는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정부의 재정적 지원은 잘되는 편이라고 보지만, 전문 인력을 관리하는 측면에서는 문제가 있다”며 “외국에서 공부하고 연구한 한국인 학자가 국내에 들어와서 연구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고, 일자리가 있다고 해도 비정규직이어서 미래에 대한 신분 보장이 어렵다”고 설명했다.

현재 세계 줄기세포 연구는 초기 단계다. 세포나 동물실험에서 줄기세포의 가능성을 확인한 수준이다. 한국은 이 분야에서 두각을 보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생명윤리라는 함정과 과거의 논문 조작 트라우마에 빠져 있는 모양새다. 한 과학자는 “세계 바이오 기술 분야에서 한국이 우위에 있는 것은 줄기세포 연구가 거의 유일하다”며 “생명윤리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줄기세포, 특히 배아줄기세포 분야에 대한 연구를 이어갈 방법을 찾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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