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다 넘겼다”
  • 이승욱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3.07.31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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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 대화록 핵심 실무자 3인 ‘그때의 기억’

나라 전체를 온통 혼돈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행방이 묘연해지면서 가장 큰 딜레마에 빠진 쪽은 노무현 정권 당시 청와대 핵심 실무진이다. 노 정권 인사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북방한계선) 포기 발언’ 의혹이 최고조에 이르자, 대통령기록관의 정상회담 대화록 원본을 열람하자는 승부수를 띄웠다. 원본 공개로 의혹이 깔끔하게 마무리될 것을 자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대화록이 실종되면서 상황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NLL 포기 발언 의혹을 제기하며 공세를 펼치던 새누리당에 오히려 날 선 공격의 빌미를 준 꼴이 됐다. 의혹의 실마리를 풀 대화록의 존재가 미궁으로 빠지면서, 오히려 노 정권 인사들은 대화록 폐기의 당사자로 지목되는 등 강력한 역공에 직면했다.

2007년 10월 정상회담 직후부터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로의 정권 이양까지 5개월 동안 청와대와 대통령기록관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시사저널>은 당시 청와대에서 정상회담 대화록 작성과 보고, 그리고 대통령기록관 이관에 관여했던 핵심 실무자들을 직접 만나 당시 상황을 정확히 듣고자 했다.

노 전 대통령을 제외한 핵심 관계자는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과 임상경 기록관리비서관, 김경수 연설기획비서관, 조명균 안보정책비서관, 이창우 제1부속실 행정관 등이다.

참여정부 대통령비서실 임상경 기록관리비서관, 김경수 연설기획비서관, 이창우 1부속실 행정관(왼쪽부터)이 7월18일 국회 정론관에서 ‘대화록 실종’ 논란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연합뉴스
“노 대통령, 이지원 통한 별도 지시 없었다”

이들 인사 가운데 문재인 민주당 의원은 대통령실 전체를 관장하는 실장이었던 만큼 기록물에 관련된 실무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게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따라서 실무진으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이창우 전 행정관이다.

■ 이창우 제1부속실 행정관=2007년 정상회담 당시 청와대 내 경제 관련 보고서를 제외한 나머지 보고서를 대통령 보고서로 분류해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업무를 도맡고 있었다. 조명균 전 비서관이 청와대 문서 관리 시스템인  ‘이지원(e知園)’을 통해 만든 정상회담 대화록 최종본 첨부 보고서도 2007년 12월 이 전 행정관의 손을 거쳐 노 전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이지원은 최초 생산자부터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전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열람할 수 있도록 돼 있다. 결국 이 전 행정관이 대화록 보고서의 생산과 보고 과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인 셈이다.

이 전 행정관은 정상회담 대화록 보고서가 부속실로 전달된 시기를 2007년 12월 중순께로 기억했다. 10·4 남북정상회담이 있은 지 2개월여나 지난 시점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조 전 비서관이 당시 디지털 녹음기로 회담 내용을 녹음했지만 상태가 불량했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녹음 복원을 위해 잡음 제거 등의 특수 장치 기기가 있는 국정원으로 녹음기를 전달했고, 이후 종이문서로 녹취록을 되돌려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조 전 비서관은 자신의 메모와 각종 자료를 취합하는 한편 다른 배석자 등의 증언을 토대로 전자문서 형태의 최종본을 만들었다.

이렇게 생산된 최종본은 조 전 비서관이 이지원을 이용해 대통령 보고용으로 기안한 보고서에 첨부됐다. 이후 이 보고서는 이지원을 통해 백종천 당시 외교안보실장을 거쳐 제1부속실에 올라간 후 노 전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이 전 행정관은 당시 보고서와 관련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12월 중순 조 전 비서관이 기안한 정상회담 대화록 최종본을 대통령 폴더로 등록시킨 후 노 전 대통령이 부속실로 되돌려 보낸 게 12월 말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대통령이 열람한 뒤 부속실로 되돌려 보낸 것은 승인했다는 뜻이기 때문에 문서를 ‘지정기록물’ 및 ‘비밀문서(1급)’로 분류한 후 조 전 비서관에게 다시 보냈다”고 말했다.

이 전 행정관에 따르면 통상 이지원을 통해 노 전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문서는 ‘지시바랍니다’ ‘참고바랍니다’ 등의 요청 사항이 부여된다고 한다. 이 전 비서관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보고서를 ‘참조용 보고서’로 기억했다. 그는 “이지원을 통해 보고서를 열람하면 상·하급자의 의견이 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며 “하지만 당시 대화록 보고서에서는 노 전 대통령이 별도의 지시 사항을 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이 전 행정관의 주장대로라면 일각에서 제기하듯, 적어도 이지원을 통한 대화록과 관련된 별도의 지시는 없었던 셈이다.

“지정기록물 대통령기록관에 일괄 이관”

통상 이지원을 통해 완성된 정상회담 대화록 보고서는 청와대 내 RMS(기록물 관리체계 시스템)에서 패키지파일(SIP) 형태로 변환된 후 대통령기록관의 PAMS(대통령기록물 관리 시스템)로 일괄 이관됐다.

■ 임상경 기록관리비서관=2007년 12월 말까지 청와대 기록관리비서관으로 일하다, 곧바로 초대 대통령기록관장으로 임명됐다. 임 전 비서관은 MB 정권이 들어선 이듬해 2008년 7월 대기 발령될 때까지 관장으로 있었다. 임 전 비서관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청와대 이지원과 RMS를 통해 축적된 대통령 지정기록물은 2008년 1월 중순부터 2월 중순까지 대통령기록관으로 일괄 이관됐다”며 “이관되는 과정에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보고서만 제외됐을 가능성은 없다”고 주장했다.

임 전 비서관은 또 “청와대에서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된 후 대통령기록관 직원들이 이관 과정을 검수했지만 이상 징후는 전혀 없었다”며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된 후에는 삭제할 수도 없어 적어도 (내가) 관장으로 있는 동안 삭제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기록물 관리 시스템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지원과 RMS를 통해 청와대 비서실 내에 축적된 대통령 지정기록물 등 데이터는 보안상의 이유로 온라인으로 대통령기록관의 PAMS로 전달될 수 없다. 이에 따라 이관을 위해서는 별도의 외장 하드디스크(신전자문서 시스템)가 이용된다고 한다. 임 전 비서관은 외장 하드디스크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전후 데이터의 용량을 비교했을 때 동일했던 만큼 이관 과정에서 자료 유출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 김경수 연설기획비서관=정상회담 대화록 보고서 작성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이지원 내에 열람권자로 지정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비서관은 이지원을 통해 대통령 보고 경로를 살펴볼 수 있었던 셈이다. 김 전 비서관은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정상회담 대화록이 작성된 후)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흐른 만큼 당시 청와대 실무자들의 기억이 단편적이어서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전제한 뒤 “하지만 당시 실무자들의 증언을 복수로 확인한 결과 정상회담 대화록을 참여정부에서 폐기했다는 주장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김 전 비서관은 “이지원을 누구보다 잘 아는 노 전 대통령이 대화록을 폐기하려고 했다면 애당초 정상회담 녹취록을 전자문서 형태로 이지원에 올리지 않도록 했을 것”이라며 “노 전 대통령은 공식 보고서뿐만 아니라 업무와 관련한 단순 메모도 이지원에서 생산하고 유통해 지워지지 않게 할 정도였는데 이를 노 전 대통령이 뒤집을 가능성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무현 정권 말기 청와대 핵심 실무자들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 등 일각에서 노 정권에서의 폐기 가능성을 거듭 주장하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 2008년 1월 청와대 업무 관리 시스템인 이지원에 삭제 기능이 추가로 탑재됐다는 점을 보도하면서 노 정권 폐기론에 힘이 실린 것이다. 하지만 노 정권측 인사들은 이지원의 특성과 일괄 이관 과정을 제대로 모르는 몰이해에서 비롯된 주장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2007년 10월4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남북공동선언문에 서명한 뒤 교환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관 전 자료 선별 과정에서 누락 가능성

임상경 전 비서관은 “2008년 1월 한국정보화진흥원을 통해 이지원 등에 탑재된 것은 삭제 기능이 아닌 초기화 기능”이라면서 “이는 이지원과 RMS 등 청와대 내에 축적된 시스템을 비우고 나오기 위해 탑재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노 정권측 인사들의 주장에 따르면, 참여정부가 사용한 이지원을 다음 정부에 넘겨주기 위해 데이터를 비우는 용도로 초기화 기능을 사용했을 뿐이고 정상회담 대화록 등 특정 보고서를 삭제하는 용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창우 전 행정관은 “이지원을 구축한 후 청와대 내에서 금기시되는 단어는 기록의 ‘삭제’였다”며 “잘못된 정책과 보고 내용을 수정한 것도 후대에 도움이 된다는 노 전 대통령의 신념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노 정권측 인사들의 강한 반박에도 불구하고 논란의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일각에서는 노 정권 말기에 실제 대통령 지정기록물에 대한 자료 선별 작업을 이관 전에 진행한 만큼, 그 과정에서 특정 보고서를 누락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노 정권 인사들뿐만 아니라 대통령기록물 전문가들도 결국 이지원의 복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청와대 지정기록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크게 대통령기록관의 PAMS와 이관 과정에서 기록관으로 전달된 이동식 하드디스크, 이지원 복제본(대통령기록관본·봉하마을 반환본) 등이다. 국가기록원과 정치권에 따르면, PAMS와 이동식 하드디스크는 이미 여야 열람위원을 통해 대화록 검색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청와대가 대통령기록관으로 지정기록물 이전 당시 함께 옮긴 이지원 복제본은 복구되지 않은 상태다. 이 복제본에는 애초 이지원에서 작성된 보고서 등 모든 데이터가 저장돼 있다.

익명을 요구한 기록물 관리 시스템 전문가는 “국가기록원 등은 PAMS를 통해 검색을 하면 이지원 내 데이터도 검색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며 “이지원에서 생산된 보고서 등 데이터는 RMS와 PAMS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대화록 등 첨부 파일이 찢겨져 분산되고 암호화돼 검색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전진한 투명사회를위한정보공개센터 소장도 “애초 국가기록원과 정치권이 제한적인 시한을 두고 대통령 지정기록물을 찾겠다고 한 것 자체가 부적절했다”며 “정상회담 대화록이 첨부됐던 이지원의 데이터를 복구해 검색하면 대화록의 존폐 여부를 가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마지막 판도라 상자를 열어야 대화록 실종 미스터리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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