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엔진’이 유령 도시로 변하다
  • 김원식│뉴욕 통신원 ()
  • 승인 2013.07.3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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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산업 메카 디트로이트 시 파산 신청…전체 인구 3분의 1이 극빈층

“경찰이 출동하는 데 한 시간이나 걸리며, 거리의 가로등도 40%가 꺼져 있다.”

7월18일(현지 시각) 미국 미시건 주의 릭 스나이더 주지사가 디트로이트의 파산 보호 신청을 승인하며 한 말이다. 어쩌다가 디트로이트가 이렇게 되었을까. 스나이더 주지사는 “위대한 도시 디트로이트는 지난 60년간 내리막길을 걸어왔다”고 고백했다. 그는 “38%에 달하는 예산이 연금 등의 비용으로 지출되고 있어서 재정 적자가 악화하고 있는 상황을 더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파산 신청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현재 185억 달러(약 20조8000억원)로 추산되는 디트로이트의 부채를 파산 이외의 방법으로는 해결할 길이 없다는 뜻이다.

1980년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린 디트로이트 조루이스 아레나. 이때만 해도 디트로이트는 미국 경제를 떠받치는 ‘위대한 도시’였다. ⓒ AP 연합
표 위해 공약 남발한 정치인들이 파산 원흉

아직 파산한 것은 아니다. 신청만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디트로이트의 파산 신청에 대해 “너무 끌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한때 미국 자동차 산업의 메카로 전 세계 자동차의 85% 이상을 생산하며 전성기를 누렸던 디트로이트는 미국 자동차 산업의 쇠퇴와 함께 급속히 추락했다. 1950년대 180만명에 달했던 인구는 중산층 대다수가 빠져나가면서 70만명으로 줄었고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극빈층으로 분류되면서 미국에서 범죄율이 가장 높은 도시로 변했다. 인구 수 감소는 재정 적자의 악순환을 불러왔다. 세수가 급감했고 치안 등 공공 서비스 부문의 지출을 줄여야 했다. 디트로이트는 삶의 질이 최악으로 떨어지는 도시가 되었다.

반대로, 늘어난 것도 있다. 퇴직 공무원 등을 대상으로 하는 공무원연금 지급이다. 전체 부채 185억 달러 중 절반인 90억 달러는 시 노동자 1만여 명과 퇴직자 2만명의 연금과 건강보험 등에서 발생한 적자로 잡혀 있다. 현실적으로 자산 매각 등의 방법보다 공무원 연금 지급액을 줄여 적자를 보전하는 직접적인 방법이 유력한 상황이다. 바로 이 때문에 공무원노조와 이들의 연금펀드측은 시가 파산을 신청하자마자 미시건 주 법원에 파산 신청을 막아달라고 긴급 요청을 하면서 디트로이트의 파산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들의 요청은 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처음 미시건 주 법원에서는 “공공근로자의 연금 혜택을 위협할 수 있어 위헌 소지가 있다”며 철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공무원들은 환호했다. 그러자 시는 항소했다. 7월24일 연방파산법원은 디트로이트의 파산 신청에 대해 ‘합법적’이라고 판결했다. 스티븐 로즈 판사는 “미시건 주 법원이 디트로이트의 파산 신청 철회를 명령한 것을 기각한다. 디트로이트가 파산 보호를 받을지 여부는 우리 법원에서 판단하겠다”며 디트로이트의 손을 들어주었다.

디트로이트의 재정 적자에는 정치인들도 한몫했다. 정치권 인사들은 재정 적자 문제를 알면서도 지지를 얻기 위해 공무원노조 등에 연금 등 지속적인 혜택을 약속했다. 특히 시장 등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재정을 꼼꼼히 따져보지도 않은 채 공약을 남발했고 결국 그 부담은 고스란히 납세자들의 몫으로 쌓였다.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지출을 삭감해야 했다. 하지만 연금 등은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어 삭감이 허용되지 않는다. 결국 공공 서비스에 들어갈 재원이 먼저 삭감돼버렸다. 교통 신호등조차 운영할 수 없을 정도로 디트로이트를 추락으로 몰아간 가장 큰 원흉이 바로 정치인들이다.

“우리와 닮은 도시, 미국에 100개나 있다”

문제는 파산 신청의 효용성이다. 파산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디트로이트가 재정 적자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다. 파산 신청의 목적은 연금 등 공공 복지비를 법적으로 삭감할 수 있는 토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연방법원이 파산 결정을 내릴 경우 연금을 삭감당할 수밖에 없는 시민들의 반발이 거세질 게 틀림없다. 뉴욕타임스는 “디트로이트 주민들은 미국 도시 사상 유례가 없는 사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쳤다”며 “파산 신청만이 대안인가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파산을 반대하는 쪽은 디트로이트 비상관리인인 대형 로펌 변호사 출신 케븐 오어를 주목하고 있다. 파산을 이유로 디트로이트의 자산을 월가에 팔아치울 수도 있다는 불신이 제기된다. 디트로이트의 이해관계는 이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

과연 이것이 디트로이트만의 문제일까. 지금 여러 도시가 디트로이트의 파산 신청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왜냐하면 비슷한 상황에 직면한 여러 도시나 카운티에 디트로이트에 대한 판결은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들 역시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만약 디트로이트의 파산이 받아들여지고 결과적으로 연금이 삭감된다면 이미 재정 위기로 파산 직전에 몰린 다른 도시와 카운티는 힌트를 얻게 된다. USA투데이는 “디트로이트는 연금 적자에 시달리는 유일한 도시가 아니다”라며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 등 다른 도시들도 똑같은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고 전했다. 지금은 비상관리인에게 모든 권한을 넘겼지만 파산 신청의 당사자나 다름없는 데이브 빙 디트로이트 시장은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가진 문제와 똑같은 문제를 가진 도시가 미국에 100개나 더 있다. 이러한 도시를 어떻게 구할지에 대한 해법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디트로이트는 연방법원 판결 이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부채를 떠안고 있는 은행 등 금융권과 협상해 부채 규모를 줄여야 하는데 그 일이 만만치 않다. 은행들이 대규모 손실을 본다는 것도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다. 연방 정부가 ‘구제 금융’ 형태로 디트로이트 사태를 지원해줄 수도 없다. 2008년 금융 위기 때 월스트리트에 70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지원한 오바마 행정부는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적자에 지원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전례를 남길 경우 다른 지방자치단체들의 파산 도미노를 우려해야 한다.

게다가 정치적 위험도 크다. 이미 월가를 위해 돈을 썼다는 사실에 열 받는 이가 한둘이 아닌 상황에서 국가적 사태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이 살고 있지도 않은 지방자치단체를 위해 세금이 사용될 경우 폭발할 납세자들의 반발이 무섭다. 도와줄 이 하나 없이 사면초가에 몰린 디트로이트. 파산 신청의 결말이 슬픈 이야기로 끝날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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