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 재편’ 불씨 당기다
  • 양정대│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3.08.14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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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외투쟁 정국에서 셈법 더 복잡해진 문재인과 안철수 그리고 당권파

“민주당이 예상치 않은 장외투쟁에 돌입하면서 야권 전체의 정치 지형이 크게 흔들릴 개연성이 높아졌다.” 지난 8월1일 민주당이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 ‘천막당사’를 치고 장외투쟁에 돌입하자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10월 재보선을 거치면서 무소속 안철수 의원이 정계 개편의 핵이 될 것이란 예상이 많았는데 이젠 민주당도 상수가 될 공산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한 발짝 더 나아가 “민주당 문재인 의원과 무소속 안철수 의원, 이 두 사람이 야권 재편성의 핵이 될 것”이라며 “지금까지는 가능성 수준이었지만 이젠 현실 문제가 됐다”고 밝혔다.

사실 민주당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에 대해선 ‘내몰렸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민주당 스스로가 정국의 흐름을 분석한 뒤 적극적인 대여 투쟁의 일환으로 장외투쟁을 선택한 게 아니란 점에서다. 실제로 민주당 내에선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을 파헤쳐야 할 국정조사가 새누리당의 거듭된 ‘물타기·버티기 전술’에 휘말리면서 아무 성과도 못 낸 채 마무리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컸다. NLL 논란의 경우도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의 고리가 될 수 있는 불법 유출 문제는 뒷전으로 밀렸고,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에 덜컥 합의했다가 회의록을 찾지 못하는 바람에 도리어 궁지에 몰렸다. 민주당의 한 최고위원은 “우리가 무능했던 측면도 있지만, 정말이지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하는데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답답하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김한길 대표(가운데)의 민주당이 장외투쟁에 돌입하면서 야권의 두 유력 대권 주자인 문재인(오른쪽)·안철수 의원의 향후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연합뉴스
예상보다 빨라진 ‘문 vs 안’ 경쟁 2라운드

민주당 내부 상황도 시끄러웠다. 5·4 전당대회를 통해 당권을 잡은 신주류와 친노 그룹이 미묘한 갈등 양상을 보였다. 특히 새누리당이 NLL 논란에 불을 지피자 친노 그룹은 사활을 걸고 뛰어든 반면, 신주류는 국정조사가 무력화될까 우려하면서 다소 소극적으로 나섰다. 이 과정에서 양측은 서로에 대한 해묵은 감정까지 표출하는 등 극도의 불신을 드러냈다.

하지만 당초 계획에 없었던 장외투쟁이 시작되면서 민주당 안팎의 정치적 유동성은 굉장히 커졌다. 당장 장외투쟁이 언제 어떤 식으로 매듭지어지느냐에 따라 ‘김한길 체제’의 명운이 결정될 수 있다. 장외투쟁의 결과에 따라 10월 재보선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만큼 야권의 정치 지형이 크게 출렁일 공산도 크다. 민주당 한 중진 의원이 “이번 장외투쟁은 그 자체보다 앞으로 미칠 영향이 더 중요할 수 있다”고 한 말은 이런 분위기를 대변해준다.

특히 장외투쟁의 전후 과정에서 문재인 의원이 부각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대선 패배 이후 가급적 현안에 대해 말을 아껴온 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 논란을 계기로 전면에 섰고, 이번 장외투쟁은 그의 정치 행보에 영향을 받은 측면도 크기 때문이다. 자의든 타의든 그가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 중 한 사람이란 점을 감안하면, 야권에서는 잠재적 대권 주자 간 경쟁이 조기에 점화될 가능성도 커 보인다. 이를 두고 신율 교수는 “문재인·안철수 두 유력 정치인이 앞으로 어떤 행보를 펼쳐나가느냐에 따라 야권의 정계 개편 시나리오는 여러 갈래로 나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안철수 의원의 경우 10월 재보선, 늦어도 내년 6월 지방선거 전에 신당을 창당함으로써 독자 세력화할 것으로 점쳐졌고, 이 과정이 자연스럽게 정계 개편을 촉발시킬 것으로 예상됐었다. 그런데 이젠 문재인 의원도 정계 개편의 한 축으로 급부상했다는 것이다.

문재인 의원은 이른바 ‘사초(史草) 실종’ 사건으로 적잖은 타격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민주당 당권파로 분류되는 3선의 한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과 대척점에 섰고, 권력 의지가 다소 부족하다는 기존 평가를 극복하게 됐다는 점에서 문 의원은 얻은 게 훨씬 많은 것 같다”고 평가했다. 새누리당의 한 재선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이 “사초 증발은 국기 문란 사건”이라고 규정한 다음 날 문 의원이 “NLL 논란의 본질은 안보를 대선 공작과 정치 공작의 수단으로 악용한 것”이라고 맞받아친 일을 거론하며 “그 정도로 ‘전투력’이 있는지 미처 몰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안철수 의원은 ‘실속’을 챙기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야 대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안 의원의 존재감을 의심하는 얘기가 나오지만, 호남 출신의 한 민주당 의원은 “기존 정치권에 대한 염증이 커질수록 국민들은 안철수를 찾게 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안철수 의원실의 한 관계자도 “생산적이지 않은 정치 싸움에 대해선 당연히 거리를 둘 것”이라며 “여야가 극단적으로 대립할수록 ‘새 정치’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지 않겠느냐”고 자신했다.

김한길의 승부수가 양쪽 희비 가를 수도

진짜 경쟁은 지금부터다. 문재인·안철수 둘 모두 앞으로의 정치 지형 변화를 이끌어낼 밑그림을 새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민주당 내 ‘비노(非盧)’ 진영과 안철수 의원 측이 한 몸이 되면서 친노 혹은 ‘친문(親文)’ 그룹과 갈라설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가장 유력했다. 하지만 민주당의 장외투쟁이 ‘친안철수’ 성향으로 평가되기도 했던 김한길 대표의 정치적 승부수라는 점에서 이 시나리오의 전제는 이미 흔들렸다. 김 대표가 장외투쟁에 나선 건 사실상 문 의원으로 대표되는 친노·친문 그룹과 적어도 당분간은 한 배를 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원식 민주당 최고위원은 “이번 장외투쟁이 국정원 국정조사 정상화를 명분으로 내걸긴 했지만, NLL 논란에도 적극 대응하겠다는 뜻이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NLL 논란의 당사자를 친노 그룹에서 민주당으로 확장했다는 얘기인데, 결과적으로는 김한길 대표가 친노 그룹과 나란히 서게 된 것이다. 이철희 소장은 이를 ‘전략적 동거’라고 표현했다.

문제는 김한길 대표가 문재인 의원의 곁에 섰지만, 안철수 의원은 여기에 나란히 서기 어렵다는 점이다. 당초 ‘김한길·안철수 vs 문재인’이란 야권 재편 시나리오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게다가 김 대표는 이번 장외투쟁에서 별무소득일 경우 정치적 미래를 장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렇다 보니 10월 재보선 결과는 섣불리 예단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장외투쟁이 장기화되면 국민적 피로도는 높아지겠지만, 민주당으로선 ‘집토끼’를 적극 껴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안철수 의원의 세력 확장에는 부담일 수밖에 없다. 전략통으로 꼽히는 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신당의 출범 시기가 늦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물론 반대의 예상도 나온다. 새누리당의 한 친박계 의원은 “민주당의 장외투쟁 이후 여론조사에선 무당파층만 증가하고 있다”면서 “기존 정치에 대한 실망이 커지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한데 이런 상황에서 안철수 신당이 가시화한다면 민주당은 힘들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신율 교수는 “민주당의 장외투쟁으로 문재인·안철수 간 경쟁 시기가 빨라진 건 분명해 보이지만 누가 더 유리할지는 단정하기 어렵다”면서 “민주당 내 당권파와 친노 진영이 쉽게 화합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김한길 대표 주변의 셈법이 복잡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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