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믿을 건 ‘아버지’ 측근들뿐
  • 이승욱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3.08.1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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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이 당혹감에 빠졌다. 난데없는 ‘왕실장’의 등장에 날벼락을 맞은 분위기다. 김기춘 신임 청와대 비서실장의 출현으로 당·정·청의 예비 실세들은 운신의 폭이 좁아들게 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유신 체제의 부활’이라는 비난 여론에도 아랑곳 않고, 김 실장을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였다. 박근혜 시대, ‘박정희 측근’의 부활은 그동안 숨죽이던 그림자 실세들이 기지개를 켜는 신호탄이다. ‘박근혜식 군기 잡기’는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까. 정국은 다시 안개 속에 빠져들고 있다.

 

ⓒ 연합뉴스
2009년경이었다.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친박계인 한 의원이 기자와 의원실에서 정국 현안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중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순간 바짝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뭔가 지시를 받는 듯 낮은 목소리로 시종일관 “네” “네” 하며 허공에 대고 고개를 숙이더니 황급히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의원실을 뛰쳐나갔다. 전화 속 주인공은 바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었다. 순간 누군가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전화했다 한들 저렇게까지 할까”라며 웃음 섞인 한마디를 던졌다. 당시 권력의 집중 견제를 받는 여권 비주류 수장에 불과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위세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실제 한 친박계 핵심 인사는 “이상하게도 박(근혜) 대표만 보면 오금이 저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 예상됐던 바이지만, 실제 현실은 더 엄혹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1인 권력 체제’는 더욱 공고화되는 느낌이다. 8월5일의 전격적인 청와대 인사 개편은 그 신호탄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카드는 박근혜식 군기 잡기였다. 당이든 정부든 청와대든 권력 주변 모두가 성에 차지 않는다는 강력한 불만의 메시지인 셈이다. 효과는 100배다. 당·정·청이 공히 숨죽이고 있다. 박 대통령을 빼면 두려울 것이 없어 보이던 집권 여당과 내각, 청와대 인사들 모두 어느 때보다 군기가 바짝 들고, 긴장감이 커진 모양새다. 그들의 모습은 지난 5개월과 비교하면 무척 낯설다.

“성에 안 찬다” 강력한 불만의 메시지

<시사저널>이 지난 8월6일자(제1242호) 커버스토리로 다룬 ‘박근혜 정권 최고 실세 조사’에서 이런 분위기는 일찌감치 감지된 바 있다. 정치부 기자 및 정치평론가 등 전문가 100명을 대상으로 한 현 정권 실세 조사의 결과는 6개월째를 맞는 박근혜정부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최고 실세 1위(71표)로 꼽힌 인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었다. 이 수석은 ‘박근혜의 입’으로 불릴 만큼 충실히 대변인 역할을 하는 인물일 뿐, 그 자신이 박 대통령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 성격은 아니라는 게 중론이다. 2위(67표)로 꼽힌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 역시 친박계 핵심 인사로 통하지만, 박 대통령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여 있기는 마찬가지다.

허태열 전 비서실장은 3위(25표)였다. 1위와 2위에 비하면 표 차이가 현저하게 나긴 하지만, 그나마 비서실장으로서 체면치레는 한 셈이다. 그렇다 해도 인사위원장까지 겸하는 비서실장이 지목률에서 홍보수석에 비해 3분의 1 수준에 그쳤다는 것은 주어진 권한에 비해 대통령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보인다. 청와대에 비하면 여당과 정부의 성적표는 더 초라하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공동 7위(9표), 정홍원 국무총리는 공동 12위(3표)에 그치고 있다. 당·정·청 수장의 위상은 역대 정권 가운데 최악이라 할 만하다. 물론 이 조사는 8·5 청와대 인사 발표가 나기 전에 실시된 것이다. 많은 정치 전문가가 “아마 <시사저널> 조사가 8월5일 이후에 실시됐더라면 임명된 지 일주일도 안 된 김기춘 신임 비서실장이 1위가 됐을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8·5 청와대 개편이 던진 충격은 예상외로 컸다. 특히 ‘유신 체제 수호자’ ‘초원복집 사건에 연루된 공안검사’의 부활이라는 김 실장에 대한 야권의 반발은 물론, 여당 내부에서도 ‘황당하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한 친박계 중진 의원은 “비서실장 인선 결과를 듣자마자 머리가 하얗게 빌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2007년 11월29일 고 육영수 여사 탄생 82주년 숭모제에 참석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옆자리에 앉은 김용환 전 의원과 귀엣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7인회 핵심 ‘김기춘·김용환’ 동반 부각

‘왕실장’으로 통하는 김기춘 비서실장이 공식적으로 박 대통령의 지근거리로 다가오면서 덩달아 김용환 새누리당 상임고문도 주목받고 있다. 김 고문은 김 실장과 함께 박 대통령이 자문을 구한다는 ‘원로 7인회’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7인회는 김 실장(만 73세)과 김 고문(81)을 비롯해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74)와 안병훈 출판사 기파랑 대표(74), 김용갑 전 의원(76), 현경대 민주평통 수석부의장(74), 강창희 국회의장(67)을 일컫는다.

일각에서는 이들 7명을 대통령의 대단한 배후 실세인 것처럼 보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정치 컨설팅업체인 매일P&I의 전계완 대표는 “7인회는 애초 ‘밥 먹는 모임’이라는 자신들의 해명처럼 박 대통령에게 정책 자문을 해주는 위상을 가진 여러 자문 그룹 중 하나로 보는 게 적절하다”면서 “자신의 측근 인물을 천거해 인사에 관철시키거나 자신의 생각을 국가 정책에 반영하는 실세 그룹으로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도 김기춘 실장과 김용환 고문이 핵심으로 꼽히는 이유는 그만큼 박 대통령이 이 두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두 사람의 과거 이력뿐만 아니라, 최근 등용된 내각·청와대 주요 인사와의 인맥 관계도 반영된 결과다.

김 실장은 정수장학회 1기 장학생으로 장학회 출신들의 모임인 ‘상청회’의 회장을 지냈다. 그를  ‘뼛속까지 박정희 일가의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7인회의 좌장 격인 김 고문도 유신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과 재무부장관 등 경제 분야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박 대통령의 퍼스트레이디 시절과 정치 입문 이후 박 대통령의 ‘바람막이’ 역할을 자청해왔다. 박 대통령이 중도 표를 흡수해 대선에서 승리하게 만든 요인이 된 경제민주화도 김 고문이 2010년 말부터 박 대통령에게 그 필요성을 적극 조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의 비중감은 박근혜정부 출범 후 요직에 등용된 인사들의 면면에서도 알 수 있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김 실장의 경남중과 사법고시 후배다. 정 총리는 현역 검사 시절 김 실장을 상관으로 보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직인수위에서 고용복지분과 인수위원으로 일한 안상훈 서울대 교수는 김 실장의 사위다. 김 고문도 지난 대선 과정에서 한광옥 전 민주당 상임고문 등이 박근혜 캠프로 넘어오는 데 가교 역할 등을 하면서 박 대통령의 인선과 관련해 뒷말이 무성했다.

숨은 실세들 등장에 “너무 이른 것 아니냐”

결국 김기춘 비서실장이 청와대의 전면에 나서면서 청와대는 전면적인 쇄신 국면을 맞을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이에 따라 청와대 비서실장과 수석 교체 후속으로 진행될 비서관 인선이 관심을 끌고 있다. 이미 청와대 언저리에서는 “교체 대상이 되는 비서관과 그 후임자의 명단이 이미 만들어졌고, 신임 비서실장과 수석들의 선택만 남은 상황”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왕실장’이 진두지휘할 청와대 쇄신의 강도는 조만간 이뤄질 비서관급 교체에서 드러날 것이다.

더욱이 그 여파는 내각과 새누리당으로 이어질 소지가 크다. 박 대통령은 김 실장을 통해 청와대, 나아가서는 내각과 여당까지 이른바 여권 전반에 대한 ‘군기 잡기’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이는 최근 국정 지지율 반등에 힘입어 집권 6개월 이후 정국 운영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기 위한 포석으로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7인회 핵심 멤버의 부상이 장기적으로는 정권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김기춘 실장 등 숨은 실세들의 등장에 대해 “너무 이른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박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들에게로 자연스럽게 여론의 눈길이 이동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치적인 이력을 고려할 때 예상 밖 인선으로 거론되는 박준우 정무수석에 대해서는 7인회 멤버인 최병렬 전 대표나 또 다른 원로 자문역 중 한 명인 최필립 전 정수장학회 이사장의 추천설이 본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정가에 퍼지고 있다.

박 대통령의 숨은 최측근 참모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최외출 영남대 부총장의 컴백설이 다시 부각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최 부총장은 박 대통령 당선 직후 대선에서 공로가 큰 일부 친박 인사들에게 ‘논공행상은 없다’는 경고성 메시지를 직접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이 직접 하기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는 집사 역할을 그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정치권에서는 최 부총장이 언제라도 대통령의 참모로 컴백할 가능성이 끊이지 않고 제기된다. 이러한 박 대통령 최측근 인사들의 재등장은 친박 핵심 그룹의 분화와 갈등을 촉발할 소지가 있다.

특히 김 실장의 등장으로 그동안 눈치를 보며 최대한 몸을 낮추고 있던 친박계 실세들이 ‘개국공신’을 자청하며 기득권 챙기기에 나설 가능성도 작지 않다. 조만간 단행될 청와대 비서관 인선을 앞두고 발 빠르게 움직이는 친박 인사들의 모습이 이미 여의도 정가에서 포착되고 있는 실정이다. 전계완 매일 P&I 대표는 “7인회 핵심 멤버인 김기춘 실장이 정치 전면에 나서면서 멤버 본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7인회가 이미 외부적으로 자문 그룹이 아닌 정권 참여 그룹으로 이미지가 바뀐 것을 주목해야 한다”면서 “김 실장을 기용한 인사 실험이 실패하거나 부작용을 낳으면 박근혜 정권으로서도 자신들이 책임을 피할 수 있는 최후 방어선이 무너지는 만큼 약보다는 독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허태열 전 청와대 비서실장 ⓒ 연합뉴스
허태열 전 청와대 비서실장 낙마에 대해 정치권에선 예상 밖의 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이미 청와대 핵심부에서 허 전 실장의 교체는 상당 기간 숙성을 거쳤던 사안으로 보인다. <시사저널>은 지난 7월24일자(제1240호 ‘청와대 진용 새로 짠다’)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첫 여름휴가(7월29일~8월2일) 이후 청와대 수석비서관 2~3명을 교체할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실제 박 대통령은 휴가 후 첫 공식 일정인 국무회의(8월6일)를 하루 앞두고 곽상도 민정수석과 최순홍 미래전략수석, 최성재 고용복지수석 등을 일제히 교체했다. 그런데 당시 보도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청와대 수석 교체 분위기를 기자에게 귀띔해준 여권의 한 핵심 관계자는 “아직 검토 중인 단계”라는 전제 아래, “청와대 핵심부에서는 허태열 실장의 교체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고 최종 결정만 남은 상태”라고 말했다. 청와대 비서실장 교체·인선이 이미 오랜 시간 심도 있게 검토된 전략적인 선택이었던 셈이다.

허태열 전 실장의 교체 배경을 두고서는 여러 설이 나왔다. 우선 60대 후반인 허 전 실장의 건강 문제다. 하지만 정권 초기 단 5개월 만에 초대 비서실장을 건강상 이유만으로 교체한다는 것은 명분이 부족하다. 이에 따라 허 전 실장에 대한 문책성 경질설이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다. 청와대 내부 사정에 밝은 새누리당 핵심 관계자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그래서 더욱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VIP(박 대통령)는 (허 전 실장의) 인사 전횡을 문제 삼았다고 한다. VIP는 ‘청와대는 장관 인사만 하고 나머지 인사는 장관이 알아서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허 전 실장이 중간에서 부처와 공공기관 인선까지 관여했다는 것이다. VIP로서는 자신의 소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비서실장에게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정권 출범 후 청와대 내부의 인사 갈등과 알력 다툼 등이 불거진 데 이어 청와대 신동철 국민소통비서관이 대기업 인사 등에 개입했다는 의혹(10쪽 인사이드 뉴스 기사 참조) 등이 줄줄이 제기되면서 박 대통령이 중대 결심을 하게 된 것으로 관측된다. 검사 출신으로서 공직 기강을 세우면서도 전직 국회의원으로서 정무적 감각도 갖춘 김기춘 비서실장이 필요하다는 판단도 이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허태열 체제의 자중지란이 노회한 원로가 구원투수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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