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만행’과 싸우는 신독립투사들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3.08.14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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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 문화재 환수·징용 피해자 보상 소송·한국인 전범자 명예회복 등 나서

일제강점기를 끝내고 광복을 맞은 지 68년이 됐다. 반세기가 훨씬 넘고 강산이 여섯 번이나 바뀐 세월이다.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아직도 일제 잔재가 스며들어 있고, 친일파 후손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일본은 진정한 반성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고 있다. 역사 고증에도 나와 있는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고, 역사 교과서를 왜곡해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종군 위안부 존재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사과 대신 틈나는 대로 망언을 쏟아낸다. 개헌과 군비 증강 등을 통해 군사대국으로 성큼성큼 나서며 군국주의 시대로의 회귀를 서두르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점점 역사를 잊어가고 있다.

일본인들은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한국의 축구장에서 버젓이 흔들어댔다. 일본에서 축구 경기가 열릴 때면 ‘욱일기’가 물결을 이룬다. 우리는 어떤가. 축구장에서 이순신 장군과 안중근 의사의 사진조차 내걸지 못하고 있다. 혹자들은 우리에게 “영혼이 있는 민족인가?”라고 묻는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총을 드는 대신 일본을 상대로 한 문화재 반환 요구, 개인 청구권 소송, 일제의 만행 폭로 등에 나서고 있다. 박정희 시대였던 1965년 ‘한일협정’에 발목이 잡혀 있는 정부를 대신해 일본과 맞장을 뜨고 있다. 이른바 ‘신(新)독립군’이다.

일제강점기 약탈 문화재에 대해 말하고 있는 혜문 스님. ⓒ 뉴시스
■약탈 문화재 환수 선봉장’ 혜문 스님

1910년 8월, 일본은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후 우리 민족의 정통성과 역사를 짓밟기 위해 갖은 술수를 동원했다. 그중의 하나가 문화재 약탈이다. 일제강점기 약 35년 동안 우리의 수많은 문화재가 일제에 의해 강탈당했다.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제대로 파악조차 되지 않는다. 

시민단체 ‘문화재 제자리 찾기’ 공동대표인 혜문 스님은 2004년부터 해외에 약탈된 문화재들에 대한 환수 운동에 나섰다. 1965년에 체결한 한일협정 문서가 일부 공개되자 당시 반환받은 문화재 1432점의 목록을 일일이 확인했다. 그리고 분개했다. 짚신, 막도장, 우체부 모자 같은 것들이 반환 목록에 포함돼 있었다. 도저히 문화재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는 그때부터 ‘문화재 반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약탈 문화재 찾기에 본격 나섰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활약은 눈부시다. 일본 도쿄 대학에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환수에 나섰고, 4년여의 노력 끝에 2010년 서울대에 기증 형식으로 반환받는 데 성공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불법으로 강탈해간 <조선왕실의궤>와 궁내청 소장 도서 1205책도 2011년에 반환받았다.

혜문 스님은 약탈 문화재 환수에만 그치지 않고 국내 여러 곳에 남아 있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데도 적극 나섰다. 고종의 투구와 갑옷, 명성황후의 표범가죽 카펫을 찾아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무사의 칼 ‘히젠토(肥前刀)’의 행방을 알아내 폐기를 요구했다. 이순신 장군을 모신 현충사의 일본식 조경을 바로잡아달라는 진정을 냈다. 이순신 장군의 쌍룡검, 다보탑의 돌사자 등의 문제점도 지적해 여론의 관심을 이끌었다.

최근에는 LA주립박물관(LACMA)에 보관 중인 문정왕후(중종의 왕비) 어보를 되찾기 위해 시민단체와 정치·사회·문화권이 백악관 청원 운동을 시작했다. 문정왕후 어보는 한국전쟁 중 미군에 의해 도난당한 왕실 어보(도장) 47과 중 하나다. 혜문 스님은 “약탈 문화재 환수나 친일 잔재 청산에는 쉬운 것이 없다. 모두가 달걀로 바위 치기라고 했지만 영혼이 담긴 달걀은 바위도 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또 보여줬다”고 말했다.

최봉태 변호사 ⓒ 연합뉴스
■‘21세기 독립군 변호사’ 최봉태

최봉태 변호사도 10년 넘게 일본 정부와 맞서 싸우고 있다. 최 변호사는 1992년에 사법연수원(21기)을 수료했다.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약 3년 동안 일본 도쿄 대학에서 유학했다. 이것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됐다. 최 변호사는 일본인 변호사들과 만나면서 ‘일제강점기 피해 실상’을 접하게 됐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과거 청산’이 안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끌려간 징용자들이 짐승 같은 대우를 받았지만 임금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개인 청구권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한 가지 큰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한국과 일본 정부가 체결한 한일협정이다. 일본 정부는 이 협정을 들어 “일본의 책임은 끝났다. 더 이상의 배상은 없다”고 발뺌했다.

일본 외무성은 2008년에 약 6만쪽 분량의 한일협정 문서를 공개했지만 25% 정도는 비공개로 하거나, 먹칠한 상태였다. 중요 내용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이에 최봉태 변호사는 2008년 10월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강제 징용 피해자, 위안부 피해자 등과 함께 일본 외무성을 상대로 ‘협정 문서 완전 공개’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지난해 10월11일 일본 도쿄 지방법원이 ‘공개’ 판결을 내렸다. 100%는 아니지만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개하라는 판결이다.

이에 앞선 같은 해 5월 우리나라 대법원은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놓았다. 그동안 일본 법원에서 모두 패소하고, 한국 법원에서도 1·2심을 졌지만 대법원은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헌법 정신에 위배되는 일본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고,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2000년부터 소송된 것을 감안하면 12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최 변호사는 현재 대한변호사협회 ‘일제 피해자 인권 특별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의 애국심을 알 수 있는 것이 있는데 다름 아닌 그가 소속된 법무법인 ‘삼일’의 명칭이다. 바로 3·1절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강도원 한국동진회 회장 ⓒ 연합뉴스
■전범 국가 응징 나선 강도원 회장

강도원 한국동진회장의 아버지는 1942년 6월15일 일본에 의해 포로감시원으로 끌려갔다. 같은 해 9월 태국의 포로수용소에 배치됐고, 그곳에서 군견보다 못한 취급을 당했다. 일본은 전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포로 감시원들을 조선인과 타이완인 등으로 충당했다. 조선인만 3323명이 강제로 동원됐다. 이들은 태국·인도네시아·싱가포르 등 주로 동남아시아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감시원으로 활동했다.

패전 후 연합군의 군사 재판에서 포로감시원 148명이 포로 학대 혐의가 적용돼 B·C급 전범으로 분류됐다. 이들 중 23명이 사형을 선고받은 후 처형됐는데 강도원 회장의 아버지도 여기에 포함됐다. 나머지 125명은 형무소에서 수형 생활을 했다. 최후의 조선인 B·C급 전범자가 형무소에서 출소한 것은 1957년 4월이다. 이 중 두 명은 형무소에서 나온 후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

우리 근대사에서 B·C급 전범들과 그 후손들은 경계인이나 이방인으로 살아야만 했다.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된 피해자이면서도 ‘일본군의 앞잡이’와 그 후손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만 했다. 실제로 고국으로 돌아온 포로감시원들 중 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다 2006년 우리 정부가 한국인 B·C급 전범자에 대해 전범이 아니라 ‘강제 동원 피해자’라고 인정하면서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됐다. 이들의 명예 회복과 보상에 대한 법적 근거가 생긴 것이다.

한국에 있는 B·C급 전범과 유족들은 2007년 2월25일 ‘동진회 한국 지부’를 결성했다. 일본에 정착한 B·C급 전범들도 1955년 ‘동진회’를 구성하고 사죄와 보상을 요구했다. 강도원 회장은 비명에 간 아버지와 B·C급 전범자들의 명예 회복과 보상을 위해 노구를 이끌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여전히 답이 없다. 강 회장은 “우리의 명예를 완전히 회복하려면 일본의 사죄와 보상 방안을 담아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용수 할머니 ⓒ 연합뉴스
■일제 악행 폭로, 이용수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출신인 이용수 할머니는 평생 기구한 삶을 살았다. 그는 꽃다운 17세 때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갔다. 그리고 2년간 타이완 등지에서 지옥 같은 강제 위안부 생활을 했다. 여성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일본군에게 짓밟혔다.

광복이 되어 귀국했지만 이미 몸과 마음은 망가져 있었다. 그래도 살기 위해 포장마차도 운영하고 술집 등을 전전했지만 삶의 질은 나아지지 않았다. 여기에다 강제 위안부 생활에서 겪은 고초로 인해 정신적·육체적 질병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용수 할머니는 좌절하지 않았다. 자신이 당했던 일본군의 만행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떨쳐 일어났다.

매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에는 빠짐없이 참석한다. 일본의 야만성을 규탄하는 국내외 집회에도 나간다.

일본군 만행을 폭로하기 위해 대한해협과 태평양을 건너 일본과 미국을 오간다. 미국 하원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해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위안부 결의안 처리 등을 요구했다. 위안부 실상을 알리는 영화에도 직접 출연했다. 지난해 치러진 4·11 총선에서는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출마하기도 했다.

그는 누가 봐도 ‘철의 여인’이다. 그에게 일제 만행은 과거가 아닌 ‘현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태어난다면 ‘군인’이 되고 싶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애국자를 꿈꾼다. 이용수 할머니는 “일본이 진정으로 사과하고 보상하면 일본을 용서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살아생전에 일본이 사과할지는 알 수 없다. 


청와대 정문의 문제점을 고발한 기사. ⓒ 시사저널 최준필
대한민국 최고 권력을 상징하는 청와대에 일제의 잔재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시사저널>은 제1167호(2012년 2월29일자)를 통해 ‘청와대 정문 일본식으로 지어졌다’고 단독 보도한 바 있다.

현재 본관과 영빈관 정문은 철제문 사이에 네 개의 돌기둥을 일렬로 세우고, 그 위를 ‘석등’으로 장식했다. 이것은 우리나라 전통 양식이 아니다. 놀랍게도 야스쿠니 등 일본의 신사(神社)에서 흔히 사용하는 양식이다.

일제강점기 조선 신궁 정문에 배치된 석등도 닮은꼴이다. 또 일제강점기 민족 수탈의 본산인 조선총독부 정문도 청와대와 마찬가지로 철제 대문 사이로 네 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석등을 장식했다. 청와대 춘추관과 영빈관 그리고 본관 등을 시공한 것은 현대건설이며, 당시 사장과 회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청와대 정문이 일본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시사저널>이 ‘일본식 정문’을 보도한 후 겉으로는 “문화재청 등 관계 기관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해 면밀한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 그다음에 정문 변경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지만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보면 사실로 믿기가 힘들다. 그 후 청와대는 정문의 석등 양식이 ‘문주 양식’이라는 상식 밖의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기자는 지난해 12월27일 청와대 대변인실에 ‘일본식 정문’에 대한 입장을 듣기 위해 공식 질의서를 보냈다. 그동안 구체적으로 정문 변경을 위한 어떤 조치를 했는지도 따져 물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답변서를 보내지 않았고, 일방적으로 반론권을 포기했다. 기자가 재차 ‘답변서를 보내지 않은 이유’를 물었으나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그 사이 언론과 시민단체 등에서 ‘일본식 석등’이라고 지적한 창덕궁 입구의 석등, 경복궁역 5번 출구의 석등, 환구단 석등은 모두 철거됐다.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유독 청와대만 ‘일본식’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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