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진보, 보수, 아나키스트 중 하나는 분명히 아니다”
  • 김진령 기자·조혜지 인턴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3.08.14 11:4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개봉 10일 만에 500만 돌파한 영화 <설국열차> 봉준호 감독

봉준호 감독은 작가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선에서 줄타기하는 한국의 대표 감독이다. 그는 정확하다.

<시사저널>은 2010년부터 매년 10월에 그를 인터뷰했다. 그가 <시사저널>이 선정한 영화 부문의 차세대 리더로 꼽혔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그는 <설국열차> 소식을 전했다. 2010년 10월 인터뷰 때는 시나리오를 막 탈고한 상태였고, 2011년 10월 인터뷰 때는 촬영을 앞두고 체코 프라하 스튜디오에 머무르고 있었다. 지난해 10월에 인터뷰할 때 그는 <설국열차>를 편집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설국열차>는 2시간 5분짜리의 15금 또는 18금 영화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8월1일 개봉한 <설국열차>는 2시간 5분짜리 15금 영화였다. 예산 규모도, 촬영 회차도, 영화의 비전도 그가 지난 3년간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그대로다.

8월1일부터 관람객을 태우기 시작한 <설국열차>는 시작부터 폭주하고 있다. 개봉 10일째인 8월9일 기준으로 관객 500만명을 돌파했다. 특이한 점은 영화 개봉 후 쏟아지는 관객의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면서도 흥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 특이한 점은 영화 개봉 뒤 나중에 움직이는 40대 이상 관객들이 이번에는 10~20대만큼이나 초반부터 극장을 찾고 있다는 점이다.

개봉 후 “프라이팬에 발가벗겨 던져진 것 같은 느낌”으로 살고 있다는 봉 감독을 8월9일 오후에 만났다.

 

ⓒ 시사저널 임준선
봉준호 영화 가운데 가장 폭력적이다.

이 영화의 본질 자체가 좁고 긴 공간에서 한쪽 사람은 막고, 반대쪽 사람은 우회로 없이 뚫고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충돌할 수밖에 없다. 전반부에는 몸과 몸이 충돌하고 후반부에 가서 숨겨진 비밀과 거짓과 진실이 드러나면서 말이 충돌한다. 개봉 후에 비트박스(영화 내용에 따라 의자가 흔들리는) 체험관에서 영화를 보는데 계속 진동이 울리는 게 안마를 받는 것 같았다. ‘때리는 장면이 많긴 많았구나’라는 생각이….(웃음)

후반부에 말로 내용을 푸는 장면이 논란을 빚는데.

끝까지 싸움박질하는 영화를 찍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왔던 스토리에 대해서 복기하고 감춰진 거짓을 드러내고 스토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몸과 몸을 부딪치면서 맨 앞 칸까지 왔는데,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는가가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페이스의 변화를 싫어하는 관객도 있고, 좋아하는 관객도 있다.

계급을 다룬 영화임에도 좌우 진영에선 의외로 조용하다.

내가 가톨릭 신자이지만 영화에 그런 색채를 내세우지 않는다. 내가 진보당원이지만 그것을 텍스트에 넣으려고 하진 않는다. 물론 내 취향에 맞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위해 만든 영화가 아니다. 메시지나 스토리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은 꼬리 칸에서 시작해 엔진 칸까지 가면서 ‘나라도 기차를 운영하려면 저렇게 될 수밖에 없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엔진 칸 바닥의 뚜껑을 열기 전까지다. 뚜껑을 열어본 주인공은 요나에게 성냥을 준다. 내 입장은 명확히 거기 있다. 그 부분까지 모호하게 둘러싸고 싶은 생각은 없다. 진보, 보수, 아나키스트 중 명확히 하나는 아닌 것이다.

영화 속의 상징을 놓고 네티즌 사이에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네티즌들이 너무 풍성하게 해석해주고 있다. 그것이 상징이건 비유건 내가 의도한 것의 10배 정도 부푼 해석이다. 그렇게 풍성하게 해석해주니 고맙다. 해외 프로모션 때 써먹을까 생각 중이다.(웃음)

“내가 흥분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든다”고 했는데, <설국열차>에 왜 흥분했나.

‘낚이게 된 것’은 기차다. 기차는 너무나 독특한 공간이다. 일직선이 아니라 구불구불 휘어지고 움직이고 다리 위로 가고 터널에 들어가고, 빛과 어둠이 교차되고, 그런 흥분이 컸다. 기차 다큐를 찍으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 안에 우겨넣어져 있는 인간들의 드라마를 그리고 싶다는 게 진짜 이유다.

관객 반응에 중간점이 없다. 아주 좋거나 나쁘거나.

냉정하게 따져보면 <마더>나 <괴물> <살인의 추억>조차도 개봉했을 때 다 그 영화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호불호가 갈렸다. 그게 세월 속으로 들어가면서 한 방향의 기억, 영화 자체의 기억만 남았다. 다 잊히니까. 이제는 그 영화가 명절에 TV에서 해주는 영화로 남았다. <설국열차>도 그런 영화가 될 것이다. 지금은 열기 자체가 과열돼 있어서 뜨겁게 느껴질 뿐이다. 이런 풍경이 낯설지 않다.

한국 배우가 굳이 안 들어가도 되지 않았는지.

남궁민수(송강호)의 캐릭터 자체가 반란군도, 진압군도 아닌 묘한 위치다. ‘미래소년 코난’ 같은 느낌이다. 양쪽 어느 편도 아닌, 겉돌면서 독특한 위치에서 키를 쥔 인물이다. 그 역할에 맞는 페이스와 변칙 복서 같은 느낌에 송강호가 딱이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전체 얼개를 짤 때 그 역할을 이미 송강호로 못 박았다. 내가 낯을 많이 가리는데 새로운 분들과 일을 하면 기대감도 있지만 ‘모두가 낯설면 어쩌지’ 하는 공포감도 있다. <괴물>에서 부녀로 나왔던 송강호와 고아성은 히딩크 입장에서 보면 박지성-홍명보 같은 존재다. 긴 캐스팅 과정에서 시나리오 탈고 전에 승낙받은 틸다 스윈튼과 송강호는 시작점부터 확보한 우군 같은 존재다.

틸다 스윈튼이 TV 쇼에 나와서 송강호와 무인도 영화를 찍겠다고 하던데.

농담 반, 진담 반이다. ‘틸다님’이 송강호 영화를 많이 봤다. 되게 좋아하고 궁금해했다. 게다가 <설국열차>에서 그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역을 하는 것에 대해 할로윈데이에 흥분한 아이들처럼 즐거워했다. 틸다가 “(은퇴 선언 후) 다시 영화하는 게 너무 즐거운데 송강호와 충돌하는 장면이 없어서 불만”이라고 말하더라. 그래서 내가 “무인도에 넣어줄 테니 거기서 지지고 볶고 해봐라”고 말했다. 말해놓고 보니까 되게 재밌겠더라. 내 꿈 중 하나가 무인도 영화를 찍는 것이다. <로스트>처럼 무인도 드라마가 많았기에 새로운 스토리가 떠오르면 시도해보고 싶다.

영화에 관한 논란 중 하나가 삶은 계란을 나눠주는데 정작 닭이 안 보인다는 점이다.

원작에선 기차가 1000칸이 넘는다. 나는 100칸을 상정했다. 영화에는 26칸만 나온다. 미국 블록버스터처럼 1억~2억 달러를 썼다면 기린이나 하마, 양 같은 동물원도 있고, 소와 돼지, 닭, 양털을 깎아서 실을 뽑아 옷을 만드는 장면도 다 들어갔을 것이다. 교실도 연령별로 다른 칸이 있음을 암시하는 장면은 썼다.

가장 큰 전투 장면에서 갑자기 물고기가 등장한다.

스토리에는 없던 장면인데, 콘티로 그리다가 물고기가 생각나서 집어넣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전투 장면이고, 우리 생애 최대의 전투 장면으로 두고두고 술안주거리가 될 전투가 원시적이고 원초적이었으면 했다. SF영화라는 것을 잊을 만큼. 부족과 부족이 싸울 때 전사들이 전장에 나가기 전 가슴에 피를 바르는 느낌. 말로 설명하기엔 낯설지만, 보면서 느끼면 충분하다.

근육질 배우 크리스 에반스가 몸 자랑을 안 하더라.

에반스는 이 영화에서 절대 옷을 벗으면 안 됐다. 관객이 ‘바퀴벌레만 먹고 어떻게 저런 몸이 됐어’라고 생각할 것이다. 미국에서 후반 작업을 할 때 관계자들이 에반스가 ‘이런 표정 연기까지 가능한 배우였냐’며 놀라더라. 그의 부담스러울 만치 발달된 몸은 <판타스틱 포>나 <캡틴 아메리카>에서 충분히 봤다. 이 영화에서 그는 꼬리 칸 지도자로서 죄의식이 많다. 근육이 발달한 사람치고 죄의식이 많은 사람이 없다.(웃음)

북미 개봉은 언제 하나.

배급권을 쥔 더와인스타인컴퍼니와 조율 중이다. 그 회사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으로 오스카상을 타는 등 북미 시장에 대한 노하우가 있는 회사다. 작은 인디영화를 발굴해 관객을 만나게 하는 ‘좋은 회사’다. (이를 위해) 재편집을 요구하기로 유명하다. 그쪽에서 좀 더 압축적인 편집을 요구해 협의하는 중이다. 북미 지역 관객 입장에선 한국 개봉판이 확장판이 될 것이다. 프랑스(가을)·일본(겨울) 개봉판은 국내판과 같다. 편집을 다시 하더라도 다른 엔딩이나 다른 스토리는 없다.

영화 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제공
한국 영화 인력과 자본이 주도해 할리우드를 끌어들인 첫 번째 글로벌 프로젝트였다.

영화 산업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려고 했던 게 아니다. <설국열차> 만화에 꽂혀서 시작한 게 독특한 결과물로 나왔다. 글로벌 영화를 해야 한다고 해서 기획한 게 아니다. 연출자 입장에서 스토리나 이미지에 꽂혀서 작업해야지, 산업적 기획이나 어느 시장을 노리고 하면 안 될 것 같다. 크리에이터 입장에서 항상 자기가 흥분되는 충동을 느끼는 스토리를 따라가야 한다. <설국열차>를 골랐을 때, ‘이건 프랑스야, 유럽이야, 영어로 대사를 해야겠어’ 이렇게 흘러간 게 아니다. 어느 국적이나 어느 사람이 봐도 느낄 수 있는 인간애, 거기에 내 관점이나 내 취향, 느낌대로 했다.

지난해 10월 인터뷰 때 <옥자>(가제) 시나리오를 만지고 있다고 했는데, 차기작은?

여태껏 작품이 끝나기 전에 항상 다음 작품 준비가 시작된 상태였는데 지금은 없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옥자>만 머릿속에서 발전시키고 있는 중이다. 일본 쪽 프로젝트는 거절했고, 미국 쪽에서도 SF영화 제의가 몇 편 들어왔는데 거절했다. 체질상 남이 써준 시나리오로 잘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미국에서 에이전트를 통해 들어오는 시나리오가 많은데 완성도가 높다. 영화로 나오면 궁금할 만한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이걸 내가 왜 해야 하나’라는 동기부여가 안 됐다. 그게 참 문제다.

부친(봉상균 한국디자인트렌드협회장)이 국내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다.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은 것인가.

그건 모르겠다. 어렸을 때 아버지 서재에는 이상한 책이 많았다. 한국에 없던 미술과 일러스트, 사진 책. 그중 누드 사진 책도 있었고.(웃음) 지금도 부모님 댁에 가서 책을 뽑아들면 30년 전의 기억이 막 선명하게 떠오른다. 시각적인 기억은 오래간다.

지금이 봉준호의 절정인가?

영화를 많이 찍었으면 좋겠는데…. 영화감독 일이 참 묘한 작업이다. 정년이 정해져 있지 않은 직업이다. 앞으로도 산업이 나를 원할지는 견뎌봐야 아는 것이니까. 정지영 감독이 환갑 넘어서 <부러진 화살>로 화려하게 부활했을 때 우리 후배 감독들은 정말 기뻤다. 히치콕도 환갑 넘어서 <사이코>를 찍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게 쉬운 일만은 아니니까.

 

많은 관객이 영화에서, 남궁민수(송강호)가 기차 창밖으로 뭔가를 봤다고 말하려다 입을 닫는 장면에서 그가 본 게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봉 감독은 “그 장면에서 그게 뭔지를 보여주는 인서트 장면을 쓸 수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 라스트 신이 의미가 없어질 것 같아서 쓰지 않았다”고 팁을 줬다. 나머지는 관객의 몫. 그는 “각자의 관심과 욕구대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