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살아나는 ‘A급 전범’의 망령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3.08.14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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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주의 향해 치닫는 아베 정권 움직이는 핵심 5인방, 일본의 ‘도발’을 이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정권은 매우 순탄하게 항해 중이었다. 유례가 없을 정도의 높은 지지율, 상승하는 주가지수 그리고 6년 만에 이뤄낸 중·참의원 양원 장악 등은 순항의 증표였다. 하지만 잘나갈 때일수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했던가. 내부에서 좋은 기운을 한꺼번에 날릴 뻔한 발언이 불거졌다. 전혀 상상도 못 할 단어인 ‘나치’가 등장한 것이다. 유럽에서는 정말 모욕적으로 취급받는 말실수였다. 그 주인공은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장관이다. 아소는 일본의 기본법을 수정하려는 데 나치의 수법이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바이마르 헌법이 나치 헌법으로 변해 있었다. 아무도 바뀐 걸 몰랐다. 그 수법을 배우면 어떤가”라는 것이었다.

아소의 망언은 아베 정권이 개헌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베는 참의원 선거 이후 개헌보다는 경제에 집중하겠다고 말했지만, 헌법 개정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갈등을 막아보려는 의도였음을 아소가 몸소 보여줬다.

일본의 보수 세력이 품고 있는 계획은 십중팔구 다음 선거가 실시되는 3년 후에 헌법 개정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는 것이다. 개헌은 일본 입장에서는 전후 체제 탈피를 뜻하지만, 주변국 입장에서는 일본의 ‘도발’이나 다름없다. 20세기 초 침략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엄청난 도발이다. 지금 아베는 경제를 호황으로 유지하고 더 많은 유권자를 자민당 앞에 끌어들여 헌법 개정에 착수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런 꿈을 꿀 수 있는 이유는 아베와 보수적 철학을 함께하고 있는 실세들이 정권을 굳건하게 떠받치고 있어서다. 아베 정권의 명운을 떠받치는 이른바 ‘아베 일족’의 면면을 유심히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로 집권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앞줄 가운데)가 2012년 12월26일 일본 도쿄의 총리 관저에서 첫 내각 회의를 마친 후 관료들과 함께 나오고 있다. ⓒ AP연합
왜곡된 역사 교육을 컨트롤하는 민족주의자
시모무라 하쿠분 문부과학상

7월28일 동아시안컵축구대회 한일전. 한국 응원단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란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그 후 대한축구협회의 지적을 받고 철거한 일이 벌어졌다. 7월30일 시모무라 하쿠분 문부과학상은 기자회견에서 “그 나라의 민도(民度)가 문제 될 수 있다. 스포츠의 장에서 정치적인 메시지를 내건 것은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무례한 시모무라’는 아베의 최측근 중 한 명이다. 2006년 아베의 1차 내각 때 관방 부장관을 맡았고 아베가 자민당 총재에 재도전할까를 놓고 고민하던 2011년부터 각종 대책을 준비하는 데 함께했다. 지난해 12월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민당의 ‘교육재생실행본부’의 본부장을 맡아 교육 공약을 정리했다. 당시 실행본부는 역사교과서 검정 기준에서 아시아 각국에 대한 배려를 담은 ‘근린제국 조항’을 재검토하는 등 중의원 선거 공약의 초안을 만들었다.

2012년 12월 2차 아베 내각의 각료 중에서도 시모무라는 주목받았다. 일본 역사교과서와 관련된 컨트롤타워를 맡는 문부과학성 장관에 시모무라가 임명됐기 때문이었다. 임명된 각료들 중 14명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에 소속되어 있다. 그중 13명은 전통적인 가치관으로의 복귀를 주장하고 일본의 전쟁 활동에 대한 사죄 외교를 비판하는 민족주의 싱크탱크인 ‘일본 회의’를 지지하는 정치인이다. 9명은 일본의 역사 교육에서 군국주의 시대 찬양을 주장하는 의원 모임에 소속돼 있다. 민족주의·군국주의 성격이 뚜렷해지는 이들 모임에 시모무라는 모두 속해 있다. 이런 시모무라가 장관을 맡고 있는 문부과학성은 우리의 교육과학기술부에 해당한다. 그래서 일본 사회 일각에서는 “도대체 왜 시모무라인가”라는 탄식이 나왔다.

제2차 아베 내각의 민족주의적 성향에 우려를 표시하며 미국이 주목했던 이도 시모무라였다. 대표적인 미국 내 일본통인 대니얼 스나이더 스탠퍼드 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부소장은 “(미·일 관계를 고려할 때) 현 시점에서 위험은 아베와 자민당에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는 역사의 재검토를 주장하는 그룹이다. 시모무라를 비롯해 이런 사람들이 아베 정권 내각에 다수 포진해 있다”고 말했다.

스나이더 부소장은 시모무라를 이렇게 설명한다. “전범 처리를 위해 개최됐던 도쿄 재판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전후에 제정된 일본 평화헌법을 ‘미국이 일본에 강요한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일본은 전쟁 범죄를 저지른 침략국이었다’는 전후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무라야마 담화(1995년 아시아 국가에 침략과 식민 지배를 사과)도 용납하지 않으며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영령의 일부를 A급 전범으로 분류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다른 아베家
카토 카츠노부 관방 부장관

제2차 아베 내각이 발표되는 순간, 기자단에서는 소수의 몇몇을 두고 “참신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카토 카츠노부 관방 부장관도 그중 하나였다. 자민당 밖에서는 “카토가 도대체 누구야”라는 반응이 나왔을 정도였다. 반면 자민당 내에서는 “아베에게 어울리는 인사”라는 평가가 나왔다.

아베와 카토, 두 사람의 관계는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카토는 카토 고이치 전 자민당 정책조사회장(정조회장)의 사위다. 고이치는 아베의 부친인 신타로의 최측근으로 과거 ‘아베 신타로파의 사천왕’이라고 불렸던 인물이다. 아베와 카토 관방 부장관의 관계는 대를 이은 결과물이다. 두 사람은 집안끼리도 매우 친해서 아베의 어머니와 카토의 어머니는 ‘자매’라고 불릴 정도로 가까웠고, 매년 가족 모두가 모이는 연례회를 열 정도였다. 아베가(家)와 카토가(家)가 서로를 가족처럼 여긴 셈이다.

카토는 도쿄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재무성에서 일한 정책통이다. 에토 밑에서 아베의 연설 초안 메시지를 담당하며 정치인으로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아베가 지난해 9월 자민당 총재에 오르기 전 중의원 제1의원회관 12층에 있는 아베의 의원실에 가장 빈번하게 불려간 인물 중 하나였다. 아베가 회장을 맡고 있는 ‘창생 일본’의 회원이기도 하다. ‘창생 일본’은 2007년 만들어진 모임으로 ‘보수의 결집’과 ‘전후 체제로의 탈출’을 목표로 내건 대표적 우익 집단이다.

지난 4월21~23일 열린 야스쿠니 신사의 예대제에 일단의 무리가 참배하기 위해 방문했다. 아베 정권의 동반자로 불리는 사람들 중 소수의 이름이 참배 명단에 들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카토였다. 예대제 첫날인 21일, 카토는 참배 후 취재진을 만나 “나는 일개 한 개인으로 참배했다”고 말했지만 일각에서는 “아베 내각의 대표 격으로 다녀간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아베의 위기관리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띠링.’

지난해 12월 중순, 아베는 자신에게 전달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내년 여름 참의원 선거에서 공명당의 협력을 얻어야 합니다. 일본유신회나 모두의당과는 예산안과 정책별로 연합해서 협력을 구합시다.’ 공명당의 협력을 이끌어내자는 문자를 아베에게 보낸 인물은 당시 자민당 간사장 대행이던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었다.

스가 장관은 정치 명문가 출신인 아베와는 정반대의 출신 배경을 갖고 있다. 아키타 현의 농가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취직을 하기 위해 무작정 도쿄로 왔다. 주경야독이란 네 글자에 어울리는 인물로, 일하면서 호세이 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오코노기 히코사부로 중의원 의원의 비서로 10여 년간 일했다. 1987년부터 요코하마 시의회 의원을 지내다 1996년 중의원 선거에서 47세의 나이로 요코하마 가나가와 현 제2구에서 당선됐다. 맨 밑바닥부터 밟고 올라온 경우로 ‘고생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지난해 8월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를 놓고 아베가 고심하고 있던 때 스가는 “자민당 지지층은 아베 대망론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쪽에서 먼저 다가와주지 않는다. 먼저 달려가 국면을 타개해야 한다”는 ‘주전론’을 주장하며 아베를 설득했다. 아베의 친구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동지에 가까운 존재라고 일본 내부에서는 평가한다.

아베 정권에서 이색적인 정치인으로 평가받는 스가이지만, 아베와는 같은 철학을 갖고 있다. 스가는 지난해 3월 <정치의 각오>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의 맺음말에서 그는 마키아벨리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과감한 정치를 강조하고 있는 마키아벨리의 말을 가슴에 묻고 걸어가겠다’고 마무리했다. 마키아벨리는 훌륭한 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스가는 합리적인 포지션을 취하고 있지만 개헌 찬성파다.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민당의 국방군 보유 공약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했다. “자신의 나라와 국민을 스스로 지킨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방군이라고 말하는 편이 알기도 쉽다. 그러한 뜻에서 향후 헌법 개정을 위해 국방군이라고 했다.” 아베가 원하는 헌법 개정을 위해 조용히 밑그림을 그리는 인물이다.

ⓒ EPA연합·AP연합
대를 이은 동지
에토 세이이치 총리보좌관

에토 세이이치 총리보좌관은 이런 스가보다도 더 오랫동안 아베와 동지 관계를 유지해왔다.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하고 그 환희가 채 가라앉지 않은 지난해 12월18일 오후 5시. 에토는 기자들의 눈을 피해 자민당사 지하주차장에서 4층 총재실의 뒤쪽으로 통하는 직행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베를 찾아가 문서를 전달했다. 문서에는 아베의 지시로 에토가 접촉한 나카니시 데루마사 교토 대학 명예교수와 야기 히데쓰구 다카사카 경제대 교수 등이 정리한 아베 정권의 목표가 담겨 있었다.

장기적 목표로는 자위대가 아닌 국방군의 설립을 핵심으로 하는 헌법 개정이 명기됐다. 중기적 목표에는 탄도미사일 요격 등 집단적 자위권을 제한적으로 행사하기 위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를 내걸고 구체적인 수법도 제시했다. 단기 목표는 영토 분쟁과 관련된다. 센카쿠 열도 공무원 상주, 고노 담화의 사실상 철회, 납치 문제 해결이 여기에 포함됐다.

단기 목표부터 장기 목표까지, 문서에는 일본의 전후 체제를 벗어나기 위한 아베의 철학을 철저하게 반영한 내용이 채워졌다. 하지만 이런 아베의 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다름 아닌 에토다. 에토는 오이타 대학 재학 시절부터 우파 학생 운동가로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다.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오이타 시의원으로 정치에 발을 디뎠고 오이타 현 의원을 지낸 후 1990년 중의원 의원으로 중앙 무대에 등장했다. 에토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정치인이 바로 아베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다. 그는 아베 신타로의 전면 지원으로 당선된 정치 신인 중 한 명이었다.

아베 신타로가 갑작스런 병으로 쓰러지고 아베 신조가 뒤를 잇게 되자 에토는 ‘신타로의 꿈을 신조가 실천하게 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아베에게 가장 신뢰할 만한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다. 보수 싱크탱크인 ‘일본정책연구센터’의 이토 테츠오 대표를 젊은 날의 아베에게 소개한 것도 에토였다. 이토와 에토는 학생운동 시절 동지였다. 그런 면에서 에토는 보수 정치인으로 아베가 거듭나는 데 일조한 멘토였다.

역사 문제가 있는 곳에 에토는 빠지지 않는다. ‘일본의 앞날과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의원 모임’의 핵심 멤버가 에토다. 모임에서는 수시로 “편향된 교과서 기술 내용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발언한다. 올해 4월부터는 이 모임의 회장 대행을 맡고 있다.

2012년 11월4일, 미국 뉴저지 지역 신문인 스타-레저에는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다. 당시 이런 여성들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공창 제도에서 일하고 있었다”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광고가 게재되었다. 당시 광고 공동 게재자로 이름을 올린 아베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명기한 사람이 에토였다.

개헌 전도사
나카니시 데루마사 교토 대학 명예교수

아베가 ‘강한 일본’을 말하며 군국주의적 색채를 풍기도록 도운 조력자는 내각 밖에도 있다. 에토가 접촉한 나카니시 데루마사 교토 대학 명예교수가 대표적이다. 일본에서는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보수 논객으로 더 유명하다.

그와 아베의 첫 인연은 2003년 중의원 선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베의 선거운동 엽서에 추천인으로 이름이 올라갔다가 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으면서 가까워졌다. 아베가 처음 총리에 오른 2006년 아베의 참모 5인방 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는데, 이때 주로 논의한 것이 ‘과연 아베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야 하는가’였다. 1차 아베 내각이 붕괴된 직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아베의 브레인이 아니다”라며 부정하는 듯한 말을 했지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이번 2차 내각에서도 아베의 지침서 역할을 하고 있다.

나카니시는 평화헌법의 개정에 노구를 던지고 있다. 아베에게 전달한 문서에 명시된 헌법 개정 목표가 그의 작품이다. 나카니시가 언론에서 내뱉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보면 아베 정권과 공명하고 있다는 점은 더욱 뚜렷해진다. “국제법상 분명히 일본의 헌법은 무효다. 군사 점령 아래 그 나라의 법을 수정하고 강요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일본국 헌법이 미군정의 강요에 의한 것임은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21세기 들어서 세계적으로 국민투표의 정당성이 강해지고 있다. 국민투표에서는 과반수 찬성인데 국회의원은 3분의 2 찬성으로 규정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과반수 찬성으로 개헌을 발의할 수 있도록 헌법 96조부터 개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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