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상자’ 로비의 위력
  • 김원식│뉴욕 통신원 ()
  • 승인 2013.08.14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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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ITC 결정 뒤집기’ 이면에 도사린 애플의 전략

지난해 5월9일 미국 정치 전문지 <폴리티코>는 “애플이 1분기 동안 워싱턴 정가에 로비 자금으로 겨우 50만 달러(5억6000만원)만 사용했다”고 보도했다. 같은 기간 구글은 애플보다 10배 많은 500만 달러를 사용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휴렛팩커드(HP)는 각각 180만 달러, IBM은 150만 달러, 오라클은 110만 달러, 시스코는 93만 달러, 아마존은 90만 달러, 인텔은 88만 달러를 로비 명목으로 각각 지출했다. 가장 막내 격인 페이스북도 81만 달러나 로비 자금으로 뿌린 것과 비교해보면 애플은 꼴찌나 다름없었다. 당시 애플의 수장인 스티브 잡스의 옹고집은 로비에도 적용되었다. 미국 정계 로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정치인들도 애플의 눈부신 성장 신화 때문에 이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제기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바뀌었다. 잡스가 사망했다. 미국 정가의 압력을 막아줄 독불장군이 애플에서 사라지자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국 법무부는 애플이 출시한 E-북의 실정법 위반 여부를 조사하기 시작했고, 일부 의원은 “애플이 해외에 본부를 두는 방식으로 탈세를 하고 있다”며 비판의 수위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른바 ‘애플 길들이기’가 시작된 것이다.

한때 월마트나 마이크로소프트도 급성장 시기에는 마치 애플처럼 정치권의 로비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와 정치권의 칼끝이 그들을 겨냥하자 태도를 바꿔야 했다. 그들이 최고의 로비스트를 동원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플도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 잡스 사망 이후 미국 정부와 의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급히 로비 대책반을 꾸리고 로비 전략을 수정했다.

2013년 3월18일, 백악관을 방문한 사람들이 애플의 아이폰을 들고 오바마 대통령을 촬영하고 있다. ⓒAP연합
워싱턴에 갑자기 나타난 애플 CEO

<폴리티코>의 보도가 나가고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지난해 5월15일. 애플 CEO나 로비스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워싱턴 D.C. 의회 의사당에 팀 쿡 애플 CEO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공화당 소속의 존 베이너 하원의장, 민주당 소속의 해리 리드 상원 원내대표와 미치 맥코넬 의원을 만났다. 이 만남은 애플과 의회 지도자들 간 소통을 강화하기 위한 조용한 만남으로 보도됐지만 애플의 로비 전략이 이전 잡스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을 보여주는 단초였다. 당시 모임에 참석한 한 관계자는 “팀 쿡 CEO는 스티브 잡스와 달리 정책적 이슈에 관심을 많이 보였으며, CEO가 정책 수립의 우선순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애플의 로비 강화 전략은 2013년 들어서 더욱 적극적으로 변해야 했다. 7월 미국 법원은 애플이 출판사들과 짜고 거래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E-북의 가격을 높게 책정해 담합한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8월 초 미국 법무부는 경쟁사인 아마존과 반스앤노블의 E-북을 아이패드에서 판매해야 한다는 개선안을 애플에 제시했다. 가장 큰 타격은 5월에 있었던 팀 쿡의 의회 청문회 출석이었다. 의회는 애플이 법망을 교묘히 피해 지난 수년간 수십억 달러 규모의 세금을 탈루했다는 정황을 추궁하기 위해 그를 불렀다. 팀 쿡은 청문회에서 “낼 돈은 단돈 1달러까지 모두 냈다”고 말했지만 정치권의 압박에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6월4일 국제무역위원회(ITC)의 결정은 애플의 기업 활동에 큰 위기로 인식되었다. ITC는 애플의 아이폰과 아이패드 등 일부 구형 모델에 대해 삼성전자의 3G 이동통신 특허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이유로 미국 내 수입 금지 명령을 내렸다. 비록 주력 제품은 아니지만 잇따르는 삼성전자와의 소송에서 현실적인 패배로 기록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씨를 뿌린 정치권에 대한 로비가 유효했다. 정치적 입장이 전혀 다른 민주당과 공화당 상원의원 4명은 미국 무역대표부(USTR) 마이클 프로먼 대표에게 서한을 보내 “공익을 위해 신중하게 생각해줄 것을 촉구한다”며 거부권 행사를 압박했다. USTR은 ITC의 수입 금지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애플의 손을 들어주었다. 거부권 행사는 지난 25년간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USTR의 거부권 행사가 불러올 역작용에 대한 우려는 ‘보호무역주의 논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지난 수십 년 동안 ITC는 업체 간 분쟁 조정에 나서 해결사 노릇을 했다. 그런데 미국 정부의 이번 거부권으로 그 기능이 무력화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USTR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삼성이 억울하다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 될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월스트리트저널은 “특허 보유권자가 자신의 지적재산권을 지키려고 수입 금지나 법원의 개입을 요구하기가 어렵게 됐다”고 설명했다.

애플, 오바마에게 33만 달러 기부금 몰아줘

미국 정부는 ITC가 인정한 삼성의 특허는 표준특허라는 점을 거부권 행사의 이유로 들었다. 표준특허 소유자가 이를 사용하는 타 업체에 무리한 요구를 해서는 안 되며 특허권을 과도하게 행사할 경우 소비자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단지 법률적인 판단인지, 국내 소비자를 위한 정책적인 판단인지 순수하게 믿기에는 애플의 정치권 로비가 무섭게 변한 것이 사실이다. 이번 애플의 승리에 관해 온라인 IT 매체 ‘기가옴(GigaOM)’은 “애플이 로비를 적극적으로 강화하면서 정치권에 자기 편(favor)을 확보할 수 있었다”며 “미국 정부가 많은 논란과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특허 분쟁에서 거부권을 행사한 이번 결정은 외국의 스마트폰 및 태블릿 제조업체와 경쟁하는 미국 회사에 대한 호의로 비쳤다”고 분석했다.

25년 만에 사용한 거부권을 두고 “전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기업 간 분쟁에 개입한 보호무역주의 사례”라는 지적과 “특허권에 대한 합리적인 관점을 반영한 것으로 보호무역주의라고 볼 수 없다”는 지적이 상반되게 나오고 있다. 이처럼 엇갈리는 주장 속에서도 애플이 미국 정치권에 대한 로비를 강화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번 결과가 그 효과를 방증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미국 연방선거관리위원회(FEC) 자료에 따르면 지난 해 미국 대선에서 애플 직원들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33만 달러의 기부금을 몰아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실만 놓고 볼 때 글로벌 기업 간 생존 싸움이 점입가경으로 치달을수록 미국 정치권만 웃게 되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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