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은 망해 노숙자의 ‘명당’이 되고…
  • 그리스 아테네=엄민우 기자 (mw@sisapress.com)
  • 승인 2013.08.21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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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로 주권 잃은 그리스…“빚쟁이에게 민주주의는 사치”

그리스 아테네에 위치한 실업급여센터(OAED). 이곳에 들어선 <시사저널> 취재진은 말을 붙일 직원을 찾느라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수많은 시민이 상담을 받기 위해 가득 들어차 있었고 직원들은 그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없었다. ‘상대한다’기보다는 ‘막아낸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여기저기서 싸우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잠시 후 한 직원이 나와 별도의 공간으로 취재진을 안내했다. 그러자 시민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와 직원에게 따졌다. 시민들은 ‘인터뷰할 시간이 있으면 실업자 민원부터 해결하라’고 고함쳤다. 백신을 받으러 몰려온 ‘희귀 바이러스 감염자’를 연상케 하는 절박한 표정이었다. 그는 민원 업무를 보는 직원이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얼떨결에 민원 처리를 시작했다. OAED 취재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출입구는 담배를 태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리스 아테네의 시위 현장에서 한 아이가 행렬의 선두로 나섰다.ⓒ 시사저널 엄민우
‘민주주의 성지’ 자존심에 상처 입어

그리스는 ‘직접 민주주의’의 고향이다. 기원전 400년부터 시민들이 민회(民會)에 모여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에 대해 직접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2013년 그 후손들은 선조들의 유산을 이어받지 못하고 있다. 본지 취재진은 7월19일부터 26일까지 그리스 아테네에 머무르며 거리 노숙자부터 정당 대표까지 다양한 사람을 접촉했다. 이들 중 대다수가 “경제 위기를 맞은 그리스는 지금 직접 민주주의는커녕 민주주의 자체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고 증언했다.

시민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리스는 ‘경제 주권’을 잃었다. 심각한 재정 위기 상황을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던 그리스는 ‘트로이카’로 불리는 유럽연합·유럽중앙은행·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벌리게 됐다. 하지만 공짜는 없었다. 트로이카는 구제금융의 대가로 살인적 긴축을 요구했다. 그리스 정부가 운용할 수 있는 재정 적자 감소책이라고는 국민들에게서 돈을 거둬들이는 것뿐이었다. 정부의 살인적인 긴축은 얌전한 그리스 시민들을 화나게 했다. 시민들은 길거리로 나왔다. 평화 시위를 추구하던 그리스 시민들의 손에 화염병과 각목이 쥐어졌다. 경찰은 최루가스로 응수했다. 상점 일부가 불에 타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전쟁터를 방불케 했던 스타디우 거리는 지금은 차분한 모습을 되찾았다. 하지만 결코 ‘건강한 침묵’이 아니었다. 많은 시민은 이미 그리스 정부의 정책이 더는 그리스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채권자인 ‘트로이카’의 거대한 힘이 그리스를 움직이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경제 주권을 잃으면서 민주주의도 포기하게 됐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모습이다.

‘트로이카’의 거대한 힘이 그리스 옥죄

민주주의와 경제 주권을 동시에 잃은 국민의 생활상은 어떨까. 신타그마 광장과 오모니아 광장을 잇는 스타디우 거리는 아테네 최대 상업지구다. 이 길을 따라 상점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그런데 열 곳 중 일곱 곳에는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거리가 죽어 있었다. 대낮인데도 거리는 ‘한산’을 넘어 ‘음산’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곳에 위치한 에스페리아 호텔 1층은 한때 음악이 흐르는 노천카페가 있어 생기가 도는 곳이었다. 항상 사람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호텔이 망해 지금은 노숙자의 ‘명당’이 됐다. 이곳에 있던 30대 남짓 된 노숙자에게 50센트를 건넸다. 그는 플래쉬96이라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잡일을 하다가 지난해 실직한 후 방황 끝에 거리에 나앉게 됐다고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다.

스타디우 거리에서 35년 동안 서점을 운영해온 스타브로스 자하로풀로스(71)는 기자에게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받은 상을 보여줬다. 이탈리아 책을 그리스어로 많이 번역해 받은 상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이제 장사를 계속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그는 “먹고살기 힘들어지면서 국립극장도 직원 월급을 못 주는 상황인데 서점은 어떻겠는가”라고 말했다.

스타디우 거리를 따라 쭉 걸어가면 오모니아 광장이 나온다. 오모니아를 우리말로 풀면 ‘의견의 일치’다. 1862년 그리스 국민과 군대가 왕을 몰아내고 민간 임시정부를 세웠다. 처음엔 혁명 성공 세력 간 다툼으로 난항을 겪었으나 오모니아 광장에 모여 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하는 데 성공했다. 시민들은 이를 기념해 광장 이름을 ‘오모니아’라고 붙였다.

아이의 익살스런 표정이 시위대의 심각한 모습과 대조된다. ⓒ 시사저널 엄민우
일요일 휴무 폐지 조치에 시민들 반발

오모니아 광장은 큰 호텔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런데 대다수의 호텔이 마치 겨울철 고목처럼 죽어 있었다. 세금이 크게 오르고 손님을 받기 위해 방값까지 내려야 하는 상황이 닥치면서 결국 문을 닫게 된 것이다. 그리스는 관광으로 먹고사는 국가다. 쾌적한 날씨에 유적지가 많아 관광지로서는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는 적극적 관광 육성 정책을 펴기 어려운 상황이다. 관광 산업을 활성화시키려면 통화 정책을 통해 외국인 관광객들의 여행 비용을 낮춰야 하는데 유로존에 묶인 그리스는 독자적인 통화 정책을 펼 수도 없다.

최근 오모니아 광장 근처엔 전당포가 많이 늘어났다.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오모니아 광장에서 전당포를 운영하는 크리스토스(65)는 30년 이상 공공기관에서 일을 하다 최근 전당포를 차렸다. 그는 현 정치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그는 “유로존 가입으로 나라 상황이 어려워진 건 이해하지만 정치인들도 문제다.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시위가 일어난다면 정치인들을 모두 몰아내고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난 이미 늙었지만 후세들이 이 나라에서 어떻게 살지 생각하면 걱정”이라고 전했다.

과격 시위는 사라졌지만 그리스 시민들은 여전히 거리로 나왔다. 지난 7월22일 오후 6시 반. 오모니아 광장에 확성기 소리가 울려퍼졌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더니 어디선가 수백 명 무리의 대학생과 상점 종업원들이 팻말을 들고 우르르 몰려왔다. 팻말에는 ‘일요일 영업 허용을 반대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이날 오모니아 광장에는 2000명 이상의 시민이 모였다. 정부가 상점들의 일요일 영업 허용과 관련한 법안을 올린 것을 규탄하기 위해서다.

재래시장 영업이 끝난 후 한 시민이 땅에 떨어진 과일을 주어 담고 있다. 경제 위기 후 흔한 풍경이 됐다. ⓒ 시사저널 엄민우

음악 소리가 울려퍼지던 노천카페는 노숙자 크리스토스 씨의 차지가 된다. ⓒ 시사저널 엄민우
사마라스 총리에 대한 기대 사라져

일요일은 상점들의 휴무일로 지정돼 있다. 일요일은 상점들도 문을 닫고 가족과 휴식을 취하는 것이 그리스의 문화다. 그러나 정부는 유럽연합으로부터 구제금융 조건 중 하나로 일요일 휴무를 폐지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이날 행사에서 유럽연합을 규탄하는 구호가 자주 나온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그리스 국민들에겐 이제 느긋한 휴일을 즐기는 것도 사치가 됐다. 그리스 소상공인협회장인 스타피스 사티니기스는 “정부가 실시하려는 이 법안은 소규모 자영업자들에게 타격이 크다. 대형마트는 좋을지 모르지만 대다수 소상공인은 일요일에 문을 열면 버는 것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다”고 투덜댔다. 이날 시위에 참가한 한 대학생은 “나는 자영업자가 아니지만, 결국 이런 정부의 조치들이 나의 삶까지 변화시킬 것이다. 그래서 참가했다”고 말했다.

의원내각제 국가인 그리스에서 최고의 권력은 총리에게 있다. 대통령이 있긴 하지만 실질적인 정치는 총리가 한다. 장관 임명권도 총리에게 있고 대통령도 사실상 총리의 추천에 의해 정해진다. 그동안 그리스의 총리는 3대 정치 가문(미쪼따끼, 빠빤드레우, 까라말리스)에서 도맡다시피 했다. 그런데 지난해 이 세 가문 사람이 아닌 사마라스가 총리를 맡았다. 파격적인 변화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는 이전까지 ‘반(反)유럽·민족주의적’ 성향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총리가 된 이후 ‘트로이카’의 요구를 성실히 이행하며 결국 국민의 공분을 샀다.

시위대는 가두 행진을 시작했다. 오모니아 광장을 출발한 시위대는 도로를 가득 메운 채 행진하며 구호를 외쳤다. 우리나라 명동거리에 해당하는 에르무 거리를 지나 국회의사당까지 발걸음을 이어갔다. 이날 나온 경찰 병력은 소수에 불과했다. 우리나라에서 시위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경찰 버스도 보이지 않았다. 단 몇 명의 제복 입은 비무장 경찰의 호위 속에 시위가 이뤄질 정도로 그리스 시위는 평화롭게 진행됐다. 부모를 따라 나온 다섯 살도 안 돼 보이는 아이도 많았다. 아이들은 마냥 즐거운 얼굴로 시위 현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리스에는 시위 문화가 발달해 있다. 심지어 중·고등학교에서도 학교 정책에 반대하는 소규모 시위가 일어나기도 한다.

오후 6시 반에 시작된 시위는 10시가 다 돼서야 끝이 났다. 시위대는 언제 모였느냐는 듯 빠르게 해산했다. 이날 시위에 참가했던 한 중년의 남성은 “시위가 그리스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란 질문에 “그리스는 못 바꾸겠지만 일요일 휴무라도 지킬 수 있지 않겠느냐”고 웃으며 대답했다.

아테네에 위치한 한 상점이 경제 위기 여파로 문을 닫은 채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 시사저널 엄민우
구제금융 협약 당시 ‘주권 잃었다’ 느껴

지난해 시위에 참가했던 대학생 하리스 바르나소스(25)는 이제 시위에 참가하지 않는다. 시위로는 그리스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가 ‘트로이카’와 구제금융 협약을 채결할 때 마치 나라의 주권을 잃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정부가 피레우스 항구를 중국 코스코 사에 팔기로 한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그는 “피레우스 항구는 경제적 가치가 있는 곳인데 ‘트로이카’ 압력에 눌려 급하게 돈을 갚느라 결국 중국 회사에 내줬다. 정부가 이러다가 사람까지 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하리스는 현재 그리스 상황이 정당이나 정치인이 바뀐다고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공산당은 구조조정이 부당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공산당과 관련한 신문사 ‘리조스파스티’의 근로자 해고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결국 누가 집권해도 마찬가지”라고 전했다.

기자가 만난 그리스 시민들은 경제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자존감이 크게 무너져 있는 모습이었다. 수많은 정당이 있고 모든 권력 구조 개편이 의회에서 이뤄지는 민주주의 시스템을 갖고 있지만,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다. 경제 위기 속에서 그리스 시민들은 지갑뿐 아니라 정치적 결정권마저 내줘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다음 호에는 ‘⑥ 그리스-비운의 국영 방송, 에르트를 가다’가 이어집니다.


 

ⓒ 시사저널 엄민우
최근 경찰이 시위를 했다고 하던데 공공 노조 소속인가.

경찰노조는 따로 있다. 경찰도 경제 위기로 월급이 삭감돼 먹고살기 어려워졌다. 그러다 보니 경찰이 시위하고, 경찰이 진압하러 나오는 황당한 상황도 일어났다. 예전만 해도 이런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이게 현실이 됐다. 단, 경찰은 시위는 할 수 있지만 파업은 할 수 없다.

이제 과격 시위는 하지 않기로 했나.

우린 원래 평화 시위를 지지한다. 한때 일부 과격주의자들이 시위를 폭력적으로 변질시켜 오히려 상황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우리끼리 농담으로 ‘정부에서 심어놓은 사람들일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정부의 긴축정책은 공공 부문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 아닌가.

공공 부문은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공공 부문은 해고도 많지 않았고 임금 삭감 폭도 작았다. 지난 3년 반 동안 가장 타격을 입은 곳은 민간 부문이다. 과다한 세금을 지불해야 했다. 게다가 소비가 줄어 상점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150만명의 실업자가 민간에서 나왔다. 실업률이 28%에 달하고 청년 실업률도 50%에 이른다.

사마라스 총리는 기존 정치 가문 사람이 아닌 새로운 인물인데 기대감 같은 것은 없나.

기대감은커녕 더 심하게 국민을 괴롭히고 있다. 지금 정부가 취하는 정책들은 거의 모두 우리에게 대출해준 ‘트로이카’ 입맛에 맞게 이뤄지고 있다. 몇 년 전 유럽연합에 들어가면서 정치인들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했는데 모두 거짓말이었다. 유로존 가입으로 이익을 본 나라는 우리에게 돈 빌려주며 돈 버는 독일이다.

그리스는 민주주의의 성지다.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는 새로운 움직임이나 시도가 있는가.

없다. 그리스 민주주의는 이제 폐지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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