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IMF·유럽연합> “주권이 ‘트로이카’에 농락당하고 있다”
  • 그리스 아테네=엄민우 기자 (mw@sisapress.com)
  • 승인 2013.08.21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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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람보스 차르다니디스 그리스 국제경제관계연구소장

그리스 국제경제관계연구소(IIER)는 한동안 과격 시위가 벌어졌던 아테네 오모니아 인근에 있다. 이 연구소의 창문은 이중창 구조로 돼 있다. 2년 전 시위가 일어났을 당시 안전을 위해 취해진 방편이라고 한다. IIER의 하라람보스 차르다니디스 소장은 35℃를 넘나드는 찜통더위에도 이중창을 달아놓은 것 자체가 그리스의 상황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차분하고 냉철하게 그리스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시사저널> 취재진에게 설명했다. 마치 그리스와 전혀 관계없는 제3국의 학자가 그리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리 정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등 세계를 다니며 그리스의 상황을 알리고 있는 그는 “현재 그리스 정치는 국민이 아닌 나라 밖 외부 요인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고 밝혔다.

 

ⓒ 시사저널 엄민우
예전보다는 시위가 많이 얌전해졌다고 들었다.

지금은 많이 조용해진 편이다. 문제가 해결됐기 때문이 아니라 악화됐기 때문이다. 실제 민심은 더욱 나빠지고 있다. 치솟는 실업률 등을 보면 폭동이 일어날 만한 상황인데 오히려 시위가 얌전해진 것은, 국민이 어느 정도 포기했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가 워낙 심각해지다 보니 이제 개인들 스스로의 어려움에 봉착하게 됐다. 또 시민들은 지금 시행되고 있는 정부 정책이 정부의 의지와 관계없이 ‘트로이카’(유럽중앙은행·국제통화기금·유럽연합)의 압력에 의한 것임을 깨달았다. 정부에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지중해 지역 특유의 가족 중심 상부상조 문화도 한몫했다. 한 사람이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고통을 받으면 다른 가족이 도와주는 문화가 있는데 이런 것들이 그리스의 현 상황이 호전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여기서 만난 많은 그리스인이 “지금 그리스의 정치는 ‘트로이카’가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 정치는 지금 ‘트로이카’의 영향 아래 있다. 이는 그리스 정치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스는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유럽연합과 유로존에 속하게 됐다. 경제 통합 정책은 유럽연합 차원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유럽연합에 속해 있다는 것은 권리뿐 아니라 의무도 요구한다. 2010년 독일은 그리스에 단기간에 재정 적자를 감소하라는 식의 엄격한 경제 정책을 내놓았다. 그 당시에도 이것이 실현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유럽 다른 국가들과 국제통화기금(IMF)도 이런 독일의 고집스런 정책에 동의하지 않았다. 재정 유동성을 고려하지 않은 급격한 긴축 재정과 지출 감소 이후 침체가 계속됐다. 유럽연합은 자기들이 펴는 정책이 어디로 갈지 모르면서 그 길을 고집했다.

그리스가 유로존에 가입한 것 자체가 문제라는 시각도 있다.

지난해 한국에 갔을 때 많은 경제학자가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나는 그리스가 유로존에 가입한 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단, 독일이 유로존을 통해 혜택을 봤고 그리스가 손해를 봤다는 지적에는 동의한다. 유로존은 경제적으로 비대칭 상태에 있는데 이것이 많은 문제를 불러왔다. 독일은 그리스에 저금리 대출을 많이 해줬다. 하지만 저금리로 들어온 돈은 그리스에서 올바르게 쓰이지 않았다. 그냥 소비에만 사용됐다. 수입이 늘어나고 수출이 줄어들면서 경상수지 적자도 유발했다. 그렇게 되니 대출을 또 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의 현 상황이 복지 과다 때문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현재 그리스 위기의 주요 원인은 잘못된 재정 정책이다. 공공 부문에 대한 복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방만한 복지가 현 문제를 야기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의 복지 정책은 항상 부족했다. 현재는 경제 위기로 인해 거의 바닥 수준이다. 사회 공공 서비스 분야도 질이 떨어졌다. 복지가 거의 운영되지 않고 있다 싶을 정도다. 의료 부문을 예로 들면 현재 그리스가 얼마나 비참한 상황인지 알 수 있다. 일부 병원에서는 입원을 하게 되면 환자가 사용할 침대 커버를 스스로 가져오라고 하는 실정이다. 심지어 의사들이 약, 의료용 장갑 등이 부족하다며 환자에게 직접 가져오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다른 복지 부문도 많이 축소되고 있다. 세 자녀를 둘 경우 나오던 면세 혜택도 없어졌다. 방만한 공공 부문 복지 운영에 대한 고통을 국민이 떠안게 됐다.

국민은 그저 피해자라는 말인가.

국민의 잘못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일반 사람들도 공무원 인사 청탁 같은 것을 많이 했다. 현 그리스 사태에 대한 책임에서 100% 자유로울 수 없다.

긴축정책만으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엔 한계가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으로선 긴축은 피할 수 없다고 본다. 긴축이 경기 침체를 불러오는 것은 당연하다. 긴축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 남부 국가들에 대한 유럽연합의 정책은 바뀌어야 한다. 긴축은 필요하지만, 좀 더 유연한 틀 속에서 그리스 재정 적자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무원 봉급 삭감 등의 정책이 필요하겠지만 지금 방식은 너무 급박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리스의 재정 적자가 줄어야 경제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겠나.

그리스 정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스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여태껏 그리스에는 그리스 경제의 특이성과 상태를 이해하고 이끌어갈 효율적 정부가 없어서 제대로 된 정책을 펴지 못했다. 2010년 경제 위기 이후에도 그리스 공공 부문 부패의 심각성을 깨닫고 개선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이 거의 없었다. 만약 사람들을 해고하고 봉급을 삭감하면 재정 적자를 약간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장을 위한 투자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개발이나 성장 없이 재정 적자만 줄이려 하면 계속 침체될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재정 적자 수치만 낮출 뿐 경제 위기에서 벗어날 것이란 희망을 갖기 힘들다. 그리스는 아름다운 곳을 많이 갖고 있다. 델피 지역 같은 경우는 이른 봄에 스키를 타고 산에서 내려오면 밑에서 수영을 할 수 있는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인프라가 안 돼 있어서 이걸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피레우스 항구 지역에도 크루즈 여객선이 많이 들어오는데 배를 타고 온 손님들은 구매력이 강하다. 그렇다면 소비를 하게끔 무언가 인프라를 만들어야 하는데 정부는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 천혜의 관광 자원을 정부가 활용하지 못하면서, 거꾸로 관광이 가장 탈세가 많은 부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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