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과 ‘뉴욕’의 경제대통령 전쟁
  • 김원식│뉴욕 통신원 ()
  • 승인 2013.08.21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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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FRB 의장에 오바마는 서머스, 월가는 옐런 미는 이유

8월10일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수장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전쟁이 8월의 워싱턴 정가를 잠 못 들게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포스트 버냉키’를 두고 워싱턴 정가는 왜 그렇게 소란스러울까.

7월31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민주당 하원의원들을 백악관으로 불렀다. 언론에 알리지 않은 비공개 회동이었다. 회동이 끝난 직후 백악관 출입기자들이 바빠졌다. 회동에 참석했던 의원들이 “오바마 대통령이 차기 FRB 의장으로 로렌스 서머스를 강력히 밀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브래드 셔먼 의원(캘리포니아 주)은 “오바마 대통령이 서머스 전 장관을 옹호하는 데 상당 시간을 할애했다”고 전했다. 존 라슨 의원(코네티컷 주)도 “대통령이 단호하게 서머스 전 장관을 두둔했다”고 말했다.

비공개 회동 직전인 7월26일,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 19명은 FRB 현 부의장인 자넷 옐런을 차기 의장으로 추천하는 서한을 백악관에 보냈다. 그런 상황에서 오바마의 서머스 지지 발언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백악관의 제이 카니 대변인은 파문이 확대되자 “오바마 대통령의 이날 언급은 과거 열심히 활동한 자신의 경제팀 멤버를 옹호한 것일 뿐 차기 의장 인사와 관련해 추측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진화에 나섰다.

(오른쪽)현 FRB 부의장인 자넷 옐런은 월가와 언론의 지원 속에 최초의 여성 FRB 의장을 꿈꾸고 있다. ⓒAP연합 (왼쪽)오바마 1기 행정부에서 금융 위기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던 로렌스 서머스 하버드 대학 교수는 백악관이 바라는 ‘포스트 버냉키’다. ⓒEPA연합
미국 언론, 서머스 맹비난하며 옐런에 우호적

벤 버냉키 FRB 의장은 내년 1월31일 물러날 것이 확실시된다. ‘세계 경제대통령’이라고 불리는 FRB 의장의 후임 자리를 두고 무수한 하마평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최근 오바마의 입에서 빌 클린턴 전임 행정부 시절 재무장관이었던 로렌스 서머스의 이름이 나온 것이다. 서머스는 오바마 행정부에서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미국의 금융 위기 해결을 위해 2009년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하며 구제 금융을 실시한 인물이다.

그의 이름이 등장하면서 언론의 맹공격이 쏟아졌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과거 서머스의 하버드 대학 총장 시절 발언을 끄집어냈다. “여성이 선천적으로 남성보다 과학과 수학을 못 한다”고 말한 것을 상기시키며 그를 ‘여성 비하론자’로 평가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서머스가 차기 FRB 의장으로 지명될 경우 상원의원 청문회에서 인준을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가 시행한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에 대해 많은 의원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뉴욕타임스는 그의 과거 행적을 언급했다. 서머스가 하버드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시에 월가에서 고액 연봉을 받는 컨설턴트로 활동했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이런 월가와의 관계 때문에 FRB 의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평가했다.

서머스의 경쟁자인 자넷 옐런 현 FRB 부의장에 대한 반응은 정반대다. 언론은 옐런에 대해 칭찬하기 바쁘다. “옐런은 과거 FRB에서 일한 인물 중 가장 예측력이 뛰어난 사람”(월스트리트저널), “차기 의장으로 옐런이 지명된다면 상원 청문회가 순조롭게 진행될 것”(파이낸셜타임스) 등이다. 월가 역시 옐런 지지 분위기가 강하다. 오직 백악관만이 서머스를 두둔하고 있는 모양새다.

언론들의 ‘반(反)서머스, 친(親)옐런’ 보도 경향을 어떻게 봐야 할까. 현재까지 후임 인사를 둘러싼 논란에서 월가와 FRB 주변에서는 옐런 부의장이 유리하다는 견해가 대세였다. 하지만 의사 결정 구조상 오바마가 “서머스로 결정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그걸로 그만인 점이 변수라면 변수다. 워싱턴에서는 ‘반서머스’ 분위기의 언론 행태가 이런 월가의 조바심을 반영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오바마의 비밀 회동 이후 서머스가 본격 등장하면서 ‘반서머스’ 보도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좀 더 노골적으로 바뀐 것도 이런 정황을 반영한다.

과거 FRB 의장을 결정할 때는 월가와 FRB 그리고 백악관 경제팀 사이에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논의를 통해 인물들이 걸러졌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대통령은 월가가 납득할 만한 인물을 지명해왔다.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지명하기란 쉽지 않았다. FRB와 월가가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의장이 될 경우 통화 정책 결정에 혼란이 생기게 되고 정부의 경제 운영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런 역사를 볼 때 오바마의 ‘서머스 지지’ 발언은 지금껏 월가와 FRB가 경험한 적이 없는 새로운 양상이다.

오바마가 서머스를 등장시킨 이유는 간단하다. 백악관 경제팀에서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 행정부 1기에 서머스는 심각한 금융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 살리기를 주도했던 전력이 있다. 반면 월가와 FRB가 볼 때 금융 위기 극복을 위한 어려운 작업을 주도한 것은 버냉키 의장이지 서머스가 아니다. 최근 옐런을 차기 FRB 의장으로 공식 지지한다고 밝힌 시사주간지 <타임>은 “옐런 부의장이 그동안 금융 시스템 안정을 위해 노력해왔다”며 “벤 버냉키 현 의장의 ‘양적 완화(QE)’ 경기 부양책을 시행하는 데 직접 참여한 옐런 부의장을 선택하는 것이 정책의 연속성 측면에서도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월가의 시선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오바마는 주변 간섭 안 받고 싶어 한다”

차기 의장을 두고 이견을 보이고 있지만 오바마 행정부와 월가, FRB 사이에서 합의된 한 가지가 있다. 차기 FRB 의장은 경제 안정을 유지하면서 현재 실시하고 있는 금융 완화 정책을 종료시키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작업을 누가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백악관과 월가는 서로 다른 해답을 갖고 있는 셈이다. 오바마와 백악관 경제팀은 자신들과 가까워 믿을 수 있는 서머스를, 월가와 FRB는 최근까지 미국 금융 정책 결정에 깊이 관여해온 옐런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FRB 의장에게 가장 중요한 조건은 금융 시장의 신임이다. 유력한 후보들 사이에 시장을 혼란에 빠뜨릴 정도로 격한 갈등이 벌어지는 일은 오바마 행정부도 반기지 않는다. 유력한 두 후보에게도 약점이 있다. 서머스는 통화 정책 결정에 직접 참여해보지 못한 경험 부족이, 옐런은 오바마나 백악관 경제팀과의 스킨십이 문제다.

출구 전략을 찾고 있는 미국은 차기 FRB 의장이 미국 통화 정책의 대전환을 이끌어주길 원한다. 오바마는 그 주인공을 이번 가을께 결정하기로 했다. 백악관 주변에서는 “오바마가 주위의 간섭을 받지 않고 최종 결정을 내리고 싶어 한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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