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선 ‘엄친아’ 안 난다
  • 하재근│문화평론가 ()
  • 승인 2013.08.21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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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친구 아들’ 뜻 변질 부자 갈망하는 시대상 반영

최근 몇 년 사이 ‘엄친아’라는 신조어의 활용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이젠 거의 일상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가 됐다. 엄친아를 제목으로 내건 신문 기사도 많고, TV 예능에서 엄친아는 중요한 토크 소재로 활용된다. 특히 신인 연예인을 소개할 때 ‘엄친아’라는 타이틀로 장점을 부각시키는 경우가 흔하다.

엄친아는 ‘엄마 친구 아들’이란 뜻이다. 어머니가 아들을 야단치면서 ‘누구네 집 아들은 공부도 잘하고 성품도 좋은데, 너는 왜 이 모양이냐!’라고 질책한 데서 생겨났다. 그래서 엄친아는 성적·성격 등이 모두 완벽한 환상의 존재를 가리키게 됐다.

그러다 성격의 중요성이 점점 사라지면서 대신에 외모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성적과 성격이 아닌, 성적과 외모가 완벽한 사람을 엄친아라고 하게 된 것이다. 어차피 덕성의 가치가 점점 사라져가는 세상이다. 외모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가치가 인간적 덕성보다 더 중요해지는 현실이 엄친아에 반영됐다.

그 후 엄친아는 종합적 재능으로 가지를 뻗어 피아노를 잘 치거나 그림을 잘 그려도 엄친아라고 불리게 됐다. 그렇다고 막연히 잘하는 건 의미가 없고 그런 재능을 통해 일류 대학에 들어가야만 했다. 무슨 재능을 통해서건 일류대에 진학하거나, 혹은 해외 유학을 다녀왔으면서 외모가 받쳐주는 사람에게 엄친아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KBS 에서 구준표 역을 맡은 이민호(왼쪽)는 재벌그룹 후계자로 나왔다. ⓒ 연합뉴스
엄친아 기준 ‘부모의 재산과 지위’

이때까지는 엄친아가 당사자의 특성과 관계된 말이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환상적 존재인데 그 환상을 구성하는 요소에서 인간적 덕성이 무의미해진 대신에 외모라는 요소가 끼어들었지만, 어쨌든 그건 당사자의 특성이었고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게 2000년대 후반까지의 분위기였는데, 2010년 즈음부터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다. 다음의 기사 제목들을 보자.

‘공현주 남친’ 이상엽, 재벌 외손자 화제 “동국제강 故 김종진 회장 외손자…엄친아”

박형식 재벌설 해명, “사장 아니라” 결국 엄친아 인증

수호 엄친아, “아버지가 교수…식비로 80만원 쏜 적 있어”

한대수 원조 엄친아 “아버지 핵물리학자, 10살 때 뉴욕 유학”

유진박 집안 “아버지 뉴욕 대학병원 의사” 엄친아 입증

위에 나온 것은 신문 기사 제목들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건 이제 엄친아의 기준에 집안이 끼어들었다는 점이다. 이상엽은 재벌 외손자라서, 박형식은 아버지가 사장은 아니지만 이사급은 되기 때문에, 수호는 아버지가 한 끼 식비로 80만원을 쓸 정도로 돈이 많은 교수이기 때문에, 한대수는 아버지가 핵물리학자라서, 유진박은 아버지가 뉴욕 대학병원 의사이기 때문에 엄친아란다.

얼마 전 박지성 열애설이 터졌을 때도 그 대상인 김민지 아나운서가 ‘엄친딸(엄마 친구 딸)’이라는 보도가 나왔는데, 아버지가 부장판사 출신의 변호사이고, 어머니가 대학교수라는 점이 그 이유였다.

앞서 설명했듯이 원래 엄친아·엄친딸은 엄마가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는 친구의 아이들을 거론하며 자식을 다그친 데서 유래했다. 이 구조에선 집안 배경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 부모의 재산과 지위가 거론되면 엄마는 자식을 다그치기 이전에 자기반성부터 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 나는 자식을 엄친아로 만들어줄 정도로 부자가 아닐까?’ 다그침을 당하는 아이 입장에서도 ‘왜 우리 부모는 상위 1%가 못 됐을까’라며 불만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원래의 엄친아는 순수하게 100% 당사자의 덕성만을 대상으로 한 말이었다. 그래야만 엄마가 아이를 다그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이 완벽한 이상형으로 쓰이게 되자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에서 어떤 사람을 이상형이라고 생각하는가가 여기에 투영됐다. 즉, 엄친아는 현재 우리 사회가 어떤 관점으로 사람을 보는가, 그런 당대의 시대정신을 드러내는 거울이 돼버렸다. 1차적으로 외모지상주의가 투영되고, 궁극적으로 부잣집 자식을 최고로 치는 황금지상주의가 끼어든 것이다.

유진박은 아버지가 미국 뉴욕의 의사로 알려지며 엄친아로 불렸다. ⓒ 연합뉴스
신자유주의 시대의 욕망

이런 과정을 거쳐 이제는 엄마 친구 아들이라는 애초의 의미가 상당 부분 사라져버렸다. 요즘 사용되는 엄친아란 말은 대부분 엄마 친구 아들이 아닌 ‘아들 친구 부모’의 의미를 담고 있다. 누구네 집 부모는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는데, 누구네 집 부모는 얼마나 돈이 많은데, 이런 속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단어의 의미를 정반대로 바꿔버린 사람들은 이런 신조 유행어를 많이 사용하는 젊은 세대다. 그들의 욕망이 부지불식간에 말의 의미를 정반대로 만들었다. 자식 타박에서 부모 타박으로 말이다. 이것을 보면 요즘 젊은이들이 얼마나 간절히 부자 부모를 욕망하는지를 알 수 있다.

건국 이래 재벌 2, 3세에 대한 욕망이 최고조에 달했다. 과거 멜로드라마에선 재벌 2세와 가난한 청년 사이에서 후자를 택하는 순애보도 많았지만, 요즘 멜로드라마에선 여주인공이 재벌 2세를 택할 가능성이 대단히 커졌다. <꽃보다 남자>의 이민호, <시크릿 가든>의 현빈, <보스를 지켜라>의 지성 등 최근에 뜬 멜로드라마의 남자 주연들은 대부분 재벌 2세이거나 최소한 <최고의 사랑>의 차승원처럼 상당한 부와 지위를 갖춘 인물들이다.

어느 신인 연예인의 집이 부자라고 하면 엄친아라며 갑자기 스타성이 더 커진다. 가난한 집에서 구질구질하게 자란 사람보다 돈 걱정 한 번 안 하고 고기만 먹고 컸을 것 같은 아이돌 멤버에게 젊은 팬들의 환호가 쏟아진다.

그 어느 때보다도 부에 대한 동경이 커진 사회에서, 어차피 스스로 그 부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를 물려줄 부모에 대한 열망이 생겨나고, 그것이 엄친아라는 단어의 뜻을 전복시켜버렸다. 요즘엔 아빠가 좋은 이유로 ‘돈을 잘 벌어서’를 꼽는 아이가 많다. 아이들 때부터 부모의 부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일부 기업들이 신입사원을 뽑을 때 가정환경을 조사한다고 해서 논란이 일었다. 부모의 지위와 부가 당사자의 스펙이 되는 시대다. 이런 스펙은 당사자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선천적 축복이다. 이 시대는 그런 축복을 열망하고, 축복받으며 태어난 이들을 선망한다. 그런 축복이 아니고선 사다리를 오를 수 없다는 걸 뻔히 알기 때문이다. 절망으로 인해 생겨난 열망. 엄친아 변천사에선 그런 시대의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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