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영웅들의 ‘덩크슛’, 월드컵을 쏜다
  • 서민교│매경닷컴 기자 ()
  • 승인 2013.08.21 16:2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민구·김종규·이종현 ‘펄펄’ 스페인 농구월드컵 출전권 따내

한국 남자농구가 세계로 가는 문을 열었다. 1998년 그리스 세계대회 이후 16년 만의 쾌거다. 티켓 가격은 아시아 3위였지만, 그 가치는 침체된 남자농구의 붐을 일으킬 10년의 미래였다.

남자농구 대표팀은 8월1일부터 11일까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2013 국제농구연맹(FIBA)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3위를 차지해 이란(1위), 필리핀(2위)과 함께 상위 3개국에게 주어진 2014년 스페인 농구월드컵(전 세계선수권) 진출권을 따냈다.

애초 유재학 감독이 이끄는 남자농구 대표팀에 대해선 기대보다 불안감이 컸다. 정보력 부재와 스파링 파트너 부족에 시달렸다. 대회를 앞두고 참가한 타이완 윌리엄 존스 컵 농구대회가 유일한 실전 훈련이었는데 귀화 선수를 영입한 타이완에 완패하는 등 정보력 한계만 느끼고 돌아왔다. 유재학호는 열악한 여건을 안고 필리핀으로 떠났다.

한국 농구의 현주소를 뼈저리게 느낀 유 감독은 존스 컵 이후 파격적인 최종 엔트리 12명을 확정했다. 귀화 혼혈 선수로는 높이의 강점을 살린 이승준(204cm, 동부)을 택했고, 상무와 프로에서 뛰는 선수를 빼고 대학생 5명을 끌어들였다. 최종 선발이 확정적이었던 김종규(207cm)·김민구(191cm, 이상 경희대), 이종현(206cm, 고려대)에 이어 문성곤(194cm, 고려대), 최준용(201cm, 연세대)을 전격 합류시켰다. 대학 1, 2년생이 3명이나 포함된 모험이었다.

성과는 아시아선수권을 2주 앞둔 진천선수촌 합숙 훈련에서 나왔다. 유 감독은 골 밑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전형적인 한국 농구 스타일을 진하게 입혔다. 12명 전원이 뛰는 플래툰 시스템을 접목했고, 경기 내내 펼치는 강한 압박 수비로 승부수를 띄웠다. 일대일 골 밑 공격이 아닌 한 박자 빠른 얼리 오펜스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외곽 찬스를 노리는 모션 오펜스로 공격의 활로를 뚫었다. 특히 골 밑에서 효과를 거둔 트랩 디펜스는 타이완이 중국전에서 전술을 그대로 도용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대표팀은 유 감독 색깔로 완벽하게 바뀌었다. 상대팀은 한국 농구에 쩔쩔맸다. 예선 죽음의 조에 속해 있던 한국은 대회 첫 상대였던 중국을 11년 만에 꺾는 파란을 일으켰지만 개최국의 텃세를 넘지 못하고 아쉽게 결승행이 좌절됐다. 벼랑 끝 3, 4위전에서 만난 타이완은 존스 컵에서 완패를 당했던 팀. 하지만 한국은 타이완을 완벽하게 제압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16년 만에 역사를 새로 썼다.

(왼쪽)김종규 ⓒ AP 연합, (오른쪽)이종현 ⓒ XINHUA 연합
‘제2의 허재’ 김민구, 벼락 스타 탄생

유재학호는 신구 조화가 뛰어났다. 이승준을 비롯해 김주성(205cm, 동부)·양동근(181cm, 모비스)이 대표팀 맏형 노릇을, 조성민(189cm, KT)·윤호영(197cm, 상무)·김태술(180cm, KGC)·김선형(187cm, SK)이 중간 다리 역할을 맡았다. 대학생 5인방은 형님들이 깔아놓은 판 위에서 마음껏 기량을 펼치며 값진 경험을 쌓았다.

11년 전 중국을 넘어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냈던 김승현(삼성)·이규섭(은퇴)은 이번 대표팀을 보면서 “최근 들어 가장 완성된 대표팀”이라고 평가했다. 유 감독은 “어려운 여건과 상황을 이겨내고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들이 대견스럽다”고 했다. 김주성도 “한국 농구에 그동안 비가 많이 오고 있었는데 젊은 대학 선수들이 열심히 해줘 이제 그친 기분”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이번 대회는 김선형으로 시작해 김민구로 끝났다. 모처럼 농구 선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는 등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스타플레이어 부재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킬 수 있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번 대회 최대 성과는 바로 젊은 선수들의 가능성 확인이었다.

시작은 지난 시즌 정규 리그 최우수선수(MVP) 출신의 가드 김선형이었다. 김선형은 대회 첫 경기였던 중국전에서 미국프로농구(NBA) 출신인 이젠롄의 블록을 넘어 화끈한 덩크슛을 내리꽂는 장면 하나로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만리장성을 무너뜨린 결정적 한 방이었다.

‘벼락 덩크’에 이어 ‘벼락 스타’에 오른 선수는 유재학호에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대학생 가드 김민구였다. 대회 초반 출장 기회를 얻지 못했던 김민구는 경기를 치르면서 유재학 감독의 신임을 받았다. 김민구는 이번 대회에서 가장 중요했던 개최국 필리핀과의 준결승전과 월드컵 티켓 마지막 한 장이 걸린 타이완과의 3, 4위전에서 48득점을 따내는 맹활약을 펼쳤다. 두 경기에서 퍼부은 3점슛만 10개다. 필리핀 전에서 김민구는 승부처마다 3점슛 5개를 터뜨리며 27득점을 몰아넣어 경기 막판 극적인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경기에선 비록 졌지만 농구 팬에게 김민구의 진가를 확인시킨 경기였다.

김민구 ⓒ AP 연합
“응답하라 1997” 농구 붐 위한 초석

이번 대회가 끝난 후 김민구의 인기와 평가는 하늘을 찔렀다. 김민구는 ‘제2의 허재’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칭찬에 인색한 유재학 감독도 “어린 선수가 처음 대표팀에 뽑혀서 어떻게 그런 플레이를 할 수 있는지 감탄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민구 신드롬’에 가려진 다른 젊은 선수들의 활약도 높이 평가할 만했다. 김종규는 수비에서 김민구를 빛나게 했고, 이제 대학 1학년생에 불과한 이종현은 서장훈(은퇴) 이후 한국 농구를 이끌 대들보로서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줬다. 문성곤·최준용도 첫 국가대표 발탁에 이어 큰 경험을 쌓는 값진 기회를 얻었다. 특히 최준용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유 감독이 포인트가드 활용 가능성을 언급할 정도로 타고난 농구 센스를 인정받았다.

아시아선수권을 마친 뒤 프로농구 현역 감독들이 한목소리를 낸 것은 “한국 농구의 붐 조성”이다. 앞으로 10년 이상을 책임질 젊은 선수의 재발견으로 이루어진 성공적인 세대교체 결과였다. 이번 대표팀 선전은 한국 농구의 미래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기대감을 갖게 한다. 대표팀에 뽑힌 대학생 5명을 포함한 20대 젊은 선수들은 2014년 스페인 농구월드컵과 인천아시안게임을 이끌어야 할 멤버들이다. 또 부상으로 일찌감치 대표팀 엔트리에서 제외된 오세근(200cm, KGC)·최진수(202cm, 오리온스), 병역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최장신 센터 하승진(221cm, 공익근무) 등이 뛸 수 있는 내년 국제 대회는 한국 남자농구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야 할 마지막 기회다.

대한농구협회와 한국농구연맹(KBL)의 각성도 필요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번 대표팀을 통해 조금이라도 국민적인 관심을 이끌어냈다는 점이다. 8월15일 개막한 2013 프로-아마 최강전은 농구 흥행에 대한 기대감을 높일 수 있는 본보기다. 농구월드컵 티켓을 딴 이후 나흘 만에 열린 이번 대회 개막전 첫날 입장 관중은 4908명이었다. 지난해 이 대회의 평균 관중 1780명에 비하면 무려 세 배가 늘어났다. 미래를 이끌 유망주가 중심이 된 국제 대회 성적의 효과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