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송설렁탕에서 무슨 작당을 한 거지?
  • 조해수 기자 (chs900@sisapress.com)
  • 승인 2013.08.27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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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판 전 서울청장 ‘2012년 12월15일 의혹의 점심 모임’

경찰의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중간 수사 발표가 있기 하루 전인 지난해 12월15일. 청와대 인근에 있는 음식점 ‘백송설렁탕’에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당시는 현직)이 모습을 나타냈다. 당시는 댓글을 단 국정원 여직원 김 아무개씨의 노트북에 대한 디지털 증거 분석이 한창이던 때로, 김 전 청장은 주말에도 출근해 직접 상황을 챙기고 있었다. 그야말로 1분 1초가 급박하게 돌아갈 때였다. 이런 그가 청와대 근처까지 온 것은 정보부장·과장·직원 12명과 오찬 간담회를 갖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적어도 김 전 서울청장이 보고한 업무추진비 내역에 따르면 그렇다.

그러나 이날 김 전 서울청장과 점심을 함께한 인물들은 서울청 정보과 소속 경찰들이 아니었다. 그와 한 방에 둘러앉은 의문의 인물은 모두 6인으로, 김 전 서울청장과 매우 긴밀한 얘기를 나눈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술도 한 잔씩 곁들이면서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무려 4시간가량 머물렀다. 해가 기울어질 때쯤 끝난 이날 모임 이후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수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다음 날인 12월16일 밤 11시에 사실과 다른 수사 결과가 서둘러 발표됐다. 김 전 서울청장은 도대체 이날 누구와 점심 식사를 했고,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일까.

이른바 김용판 전 서울청장의 ‘백송설렁탕 회동’이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의 새로운 불씨로 떠오르고 있다. 회동을 가진 날이 다름 아닌 12월15일이기 때문이다. 검찰 수사에 따르면, 경찰이 국정원 관권 개입 의혹을 해소해주는 것으로 방향을 정한 시점이 바로 이날이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민주당에서는 “이 회동을 통해 경찰의 중간 수사 발표 공작 시도가 최종적으로 ‘결재’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회동 이후 경찰의 기류가 180도 변했다는 것이다. 12월15일 회동 전후에 보인 경찰의 모습을 살펴보면 이와 같은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8월16일 국정원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 ⓒ 시사저널 이종현
김용판 “오찬 모임 동석자 기억 안 난다”

12월15일 새벽, 서울청 사이버범죄수사대 디지털 증거분석실 분석관들은 주요 증거인 ID와 닉네임 30여 개를 발견하고 “사실상 수사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며 뛸 듯이 기뻐한다.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 수서경찰서 수사팀에 ID·닉네임 등을 즉시 인계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당시 서울청장에게 보고가 올라간 시점부터 수사는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15일 오전 7~10시께 서울청 디지털증거분석팀장은 수사부장과 수사과장에게 분석 결과를 보고했다. 수서경찰서 수사팀이 모두 100개의 키워드 검색을 요청했다는 보고도 함께였다. 수사부장과 수사과장은 이를 즉각 김 전 서울청장에게 전달했다. 이때 김 전 서울청장은 보고된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컴퓨터가 아닌 수기로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보고를 받은 김 전 서울청장은 일단 수서서의 키워드 확대 요청을 묵살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지금까지의 분석 결과를 수서서에 통보하는 것도 막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분석 결과 자체를 조작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당시 이 정도 선에서 수사를 갈무리해놓은 김 전 청장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백송설렁탕으로 향했다. 이후 김 전 청장은 이 의문의 동석자들에 대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정치인은 아니다”라며 청문회에서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김 전 청장의 수상한 오찬 모임이 끝난 후인 15일 저녁부터는 경찰의 본격적인 조작·은폐 작업이 시작된다. 저녁 8시께, 서울청 수사과장은 분석팀에게 ‘박근혜 지지, 문재인 비방 글’이 국정원 여직원 김씨의 노트북에서 나왔는지로 분석 범위를 한정하도록 지시했다. 이 범위를 초과한 내용에 대해서는 별도의 압수수색 영장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대응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이미 발견한 ID·닉네임에 대해서는 여러 개가 발견된 것을 밝히지 않고, 국정원 여직원 김씨의 것인지 모른다는 내용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즉 ‘김씨가 삭제한 내용을 복구한 결과, 특정 후보에 대해 비방·지지하는 댓글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대전제를 미리 세워놓고 이에 맞춰 디지털 증거 분석 결과 보고서 및 브리핑 자료를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서경찰서에 대한 압박도 이어졌다. 서울청은 이날 저녁부터 검색 키워드를 4개(문재인·박근혜·새누리당·민주당)로 축소하기 위해 수서서에 검색 축소 공문 발송을 수차례 요구했다. 결국 수서서는 12월16일 오후 5시에 서울청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민주당은 “김기용 전 경찰청장이 경찰 분석관에게 돈 봉투를 주며 수사 종료를 종용했다”고 주장했다. ⓒ 시사저널 임준선
“김기용 전 청장, 수사팀에 회식비 전달”

12월16일 발표된 허위 중간 수사 발표는 김 전 서울청장이 주도한 것이다. 김 전 서울청장은 검찰 조사에서 보도자료 배포 및 언론 브리핑에 대한 결정은 자신이 내린 것이며, 경찰청장과 수서경찰서장에게도 16일 저녁에야 비로소 통보했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보도자료 및 디지털 증거 분석 결과 보고서 모두 김 전 서울청장에게 보고돼 승인받은 후 수서서에 송부됐다. 그러나 김 전 서울청장은 중간 수사 보고서에 대한 본격적인 조작이 이뤄지고 있던 12월15일 밤에는 정작 서울청에 있지 않았다. 김 전 서울청장은 백송설렁탕 회동 후 저녁 7시부터 9시30분까지 구로서 직원들과 회식을 가졌다. 이때 손톱을 다쳤고, 다음 날 병원을 찾은 것까지 확인됐다.

이 시점부터는 김기용 전 경찰청장(당시는 현직)의 행보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김 전 경찰청장은 김용판 전 서울청장의 백송설렁탕 회동 직후인 15일 오후 5시20분께, 서울청 디지털 증거분석실을 갑자기 방문했다. 이때 김기용 전 경찰청장이 서울청 수사부장을 통해 분석 결과를 보고받은 장면도 포착됐다. 정청래 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현장 녹화 영상에 따르면 김 전 경찰청장은 분석관들에게 “끝나고 밥이나 한번 먹어. 수고들 해”라면서 50만원이 든 봉투를 전달했다. 정 의원은 “김기용 전 경찰청장이 이례적으로 김용판 전 서울청장의 수행도 없이 (서울청) 증거분석실을 방문했다. 김 전 서울청장이 ‘미스터리’ 점심을 하고 난 그 시점에 김 전 경찰청장이 돈 봉투를 전달한 것이 의심스럽다”며 “김 전 경찰청장이 수사 종료를 종용했다”고 주장했다. 김 전 서울청장이 백송설렁탕 오찬 모임 회동 결과를 김 전 경찰청장에게 보고했고, 이에 따라 김 전 경찰청장이 직접 분석관들을 찾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시사저널>은 김 전 경찰청장의 입장을 듣고자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민주당에서는 이번 사건을 ‘제2의 초원복국집 사건’(1992년 12월11일)으로 규정하고 있다. 당시 정부 기관장들이 초원복집 식당에 모여 14대 대선에 개입하려 모의한 이 사건은 참석자 중 한 명이 녹취 테이프를 공개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이번 백송설렁탕 회동도 이러한 돌발 변수가 생기지 않고서는 의혹 규명이 어려워 보인다. 자칫 의혹만 무성하게 제기된 채 미스터리로 묻히는 것은 아닌지 ‘12월15일 백송설렁탕’으로 시선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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