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 다리 유령이 진실을 찾아 배회한다
  • 최정민│파리 통신원 ()
  • 승인 2013.08.27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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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주기 앞두고 다시 불거진 다이애나 비 죽음 음모론

‘로열 베이비’의 탄생으로 한껏 들떴던 영국. 하지만 지금은 전 왕세자비의 죽음을 둘러싼 정보가 새롭게 나왔다는 소식으로 냉기류가 흐르고 있다. 8월31일은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가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지 16년째 되는 날이다. 센 강 서쪽 강변로를 지나는 알마 다리 밑 터널에는 지금도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다이애나 비가 탄 벤츠 승용차는 터널 안 13번째 교각을 들이받았는데 그 불길한 숫자만큼 온갖 추측이 꼬리를 물었다. 교통사고로 위장된 암살이라는 설부터 왕실 개입설, 최근에는 새로운 의혹이 제기되면서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음모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이번에 새로 등장한 음모론의 발원지는 전직 SAS 요원의 장인과 장모가 2011년 9월 사위의 행동을 부대 간부에게 폭로한 내용을 담은 한 건의 진정서다. 자신의 딸을 위협하는 과정에서 살인 기술을 자랑하며 “다이애나 비의 사망을 은폐한 것은 ‘OOO’”라고 협박했다는 주장이 논란을 일으켰다. 이번 음모론에 대해서는 ‘신뢰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대신 이번 일로 다이애나 비를 향한 대중의 짙은 향수가 다시 한 번 증명됐다.

다이애나 비 사망 사고 직후인 1997년 9월5일, 프랑스 파리 센 강변의 알마 다리 밑 터널에 그녀를 기리는 꽃다발들이 놓여 있다. ⓒ EPA 연합
“영국 왕실, 다이애나 비에 비인간적 태도”

다이애나 비 사망에 관해 조사된 사실을 종합하면 원인은 과속 운전과 음주 운전으로 인한 차량 전복이었다. 1997년 8월31일 0시19분, 파리 중심 방돔 광장에 위치한 리츠 호텔을 출발해 콩코드 광장을 거쳐 강변로를 달리던 벤츠 승용차는 알마 터널에서 뒤집어졌다. 네 명의 탑승자 중 운전사 앙리 폴과 다이애나 비와 함께했던 도디 알파예드가 그 자리에서 숨졌다. 다이애나 비는 사고 당시 의식이 있었지만, 파리 동쪽 피티에 살페트리에 병원으로 이송된 후 새벽 4시에 숨을 거두었다. 유일한 생존자는 조수석에 자리한 경호원뿐이었다.

사건 발생 직후에는 사고 원인과 책임에 대한 모든 화살이 ‘파파라치’들을 향했다. 사건 당일 새벽, 다이애나 비 일행은 호텔 앞에 운집해 있던 100여 명의 파파라치를 피해 호텔 뒷문으로 빠져나가야 했고, 차량이 과속을 한 원인도 파파라치들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는 비판이 들끓었다. 파파라치들은, 당시 호텔을 나서던 운전자가 눈에 보일 정도로 취해 있었다고 증언했다. 파파라치들의 변호인들은 호텔에서 출발한 차량이 사고 지점까지 가는 동안 콩코드 광장에서 적색 신호로 멈췄을 때를 제외하고는 파파라치가 차량에 접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콩코드 광장에서 파란불로 바뀌면서 벤츠 승용차가 달려 나갔고 파파라치의 오토바이들은 이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파파라치들은 2년 만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사건이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사고 당시 사망한 도디 알파예드의 아버지 무함마드 알파예드가 ‘음모론’을 제기했다. 게다가 다이애나 비와 영국 왕실 사이의 틀어진 관계가 전해지면서 각종 추측성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프랑스 라디오 뉴스 RTL은 최근 다이애나 비와 관련한 음모론을 다섯 가지로 압축했다. ‘왕실 개입설’ ‘알파예드 가문의 원한 관계설’ ‘응급차 후송 중 암살설’ ‘무기 거래상들에 의한 암살설’ ‘종교적 희생양’ 등이다.

다이애나 비와 영국 왕실의 관계는 불편했다. 찰스 왕세자와 이혼한 이후의 행적이 왕실의 일원으로 지켜야 했던 범위를 넘어섰고 정치적 발언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다이애나 비와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한 사람은 사고가 나기 4일 전인 8월27일 대담을 나눈 르몽드의 아닉 코장 기자다. 그는 당시 다이애나 비가 깊은 관심을 가졌던 앙골라의 대인 지뢰 제거 캠페인을 기사화한 후 영국 왕실로부터 “전화기에 불이 나도록 항의를 받았다”고 기억하며 “왕실이 다이애나 비와 대중을 대하는 태도가 비인간적이었다”고 비판했다.

엘리자베스 여왕 및 왕실과의 불편한 관계는 다이애나 비의 장례식에서도 드러난다. 조사를 낭독하던 다이애나 비의 오빠 찰스 스펜서 백작은 “남은 두 명의 왕자를 자신들의 혈통으로 지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영국의 왕실 전문가 로버트 레이시는 이를 두고 “영국의 귀족들은 영국 왕실의 윈저 혈통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녀와 관계가 나빴던 쪽은 왕실만이 아니었다. 아닉 코장 기자는 다이애나 비가 정계뿐만 아니라 무기 거래상을 비롯한 재계의 이익집단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이 대목에서 거론되는 것이 ‘무기 거래상의 암살설’이다. ‘대인 지뢰 제거 캠페인’에서 다이애나 비가 너무 많이 앞서나갔다는 주장이다.

만약 그녀의 죽음이 암살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 표적이 다이애나 비가 아니라 도디 알파예드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France 3 채널’ 기자인 프랑수아 지에리는 그날의 사고를 “도디의 아버지이자 이집트 출신 거부인 무함마드 알파예드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테러였다”고 주장한다. 무함마드 알파예드는 다이애나 비가 마지막으로 묵었던 파리 리츠 호텔 소유주다. 영국 런던에 위치한 해러즈 백화점의 주인이자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 풀럼 FC의 구단주였지만 영국 국적을 갖지 못한 인물이다. 30년간 영국에서 사업을 했지만 언론을 활용하는 선동적 기질 때문에 왕실과 내내 불편한 관계였다. 당시 사건을 두고 음모론을 노골적으로 제기한 것도 무함마드였다. 심지어 “영국은 민주국가이기 때문에 왕실이 위에 있을 수 없다”는 발언까지 했을 정도다.

그런데 이 음모론에 따르면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은 무함마드가 된다. 영국 국적을 갖기 위해 다이애나 비와 친밀하게 지내던 무함마드는 급기야 그녀를 지중해 휴양지로 초대하는 데 성공했다. 2000만 달러짜리 요트를 구입해 다이애나 비를 영접하고 당시 지중해에서 약혼자와 휴가를 즐기던 아들 도디까지 불러들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왕세자비가 심심하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명 모델이었던 도디의 약혼자는 뜬금없이 바람을 맞은 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기자회견을 여는 소동을 벌였고 결국 그들의 관계는 돈으로 마무리된다. 이후 도디의 구애는 다이애나 비를 향하고 파리까지 함께 오게 된 것이다.

사고 차량 운전자 시신 극비리에 화장

사고 직후 다이애나 비는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반대편 차선에서 사고가 난 것을 보고 달려와 다이애나 비를 응급처치했던 프레데릭 메이예즈는 의사였다. 그는 “다이애나 비에게 출혈은 없었다. 하지만 호흡을 힘들어했다”고 증언했다. 그 직후 응급차로 병원에 후송된다. 이 지점에서 ‘응급차 후송 중 암살설’이 고개를 든다. 그러나 확인된 바는 없다. 후송 도중 오스트랄리츠 역 근처에서 환자의 상태가 심각해지자 잠시 정차한 것이 특이 사항의 전부였다.

프랑스와 영국 두 나라의 수사 발표에도 불구하고 음모론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먼저 들고 일어선 쪽은 운전대를 잡았던 앙리 폴의 유족과 변호사들이었다. 그들은 사고 직후 채취된 혈액 샘플이 뒤바뀌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차량이 단순 전복된 것이 아니라 흰색 피아트로 추정되는 차량과 접촉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프랑수아 지에리 기자는 “사고 발생 10분 후 촬영된 차량과 견인 당시의 차량 사진이 확연히 다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프랑스 경시청에 보관된 이 사진들은 2005년 모두 폐기 처분됐고 사고 직후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사고 현장은 말끔히 청소됐다”고 주장했다. 사고 차를 운전한 앙리 폴은 장례식 직후 극비리에 화장됐다.

매릴린 먼로나 존 F. 케네디의 죽음처럼 다이애나 비의 죽음도 굵직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프랑수아 지에리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진실의 빛을 아직 보지 못한 알마 다리의 유령이 아직도 배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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