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에서 유통되던 그 이름 ‘이석기’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3.09.0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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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숨은 실세에서 여의도 입성까지… 국회의원 된 후에도 공개 석상에 모습 안 드러내

2003년 8월의 어느 날, 명동성당 계단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선전전을 펼치고 있었다. ‘청와대 도보순례단’이라고 불렸던 10여 명의 무리. 여기엔 20대 여대생부터 40대 중년 남성들까지 다양한 사람이 포진했다. 이들은 전국 곳곳을 돌며 최종 목적지인 청와대를 향해 60여 일 동안 2000여 km를 걸었다. 이유는 단 하나, 한 사람을 석방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석방을 요구하는 양심수는 2002년 5월25일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사건으로 체포된 이석기였다. 이들의 노력이 통했는지 그는 며칠 후 노무현 대통령의 8·15 광복절 특사 명단에 포함돼 석방됐다.

‘양심수’ 이석기는 2012년 4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진보당(통진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선출된다. 이 의원이 비례대표 후보로 등록하기 전까지 통진당 당원들이나 관계자들에게 그는 아리송한 인물이었다. 당시 통진당의 한 관계자는 “당이 통합하면서 국민참여당계 등 외지인들이 들어오며 덩치가 커졌다. 그러다 보니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을 수 있다. 아마 노동조합 쪽 사람들도 잘 모르지 싶다. 하지만 과거 민주노동당(민노당) 시절부터 활동해온 당내 인사들 중에는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반면 다른 비례대표 출마자는 “무슨 프리메이슨도 아니고. 주변에 물어봐도 누군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나도 잘 모르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누구는 알고 누구는 알지 못하는 후보가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선출되는 일이 벌어진 셈이다. 이석기 당시 후보는 27%의 지지를 받아 일반명부 1위로 통진당 비례대표 2번을 받았다. 당시 1번은 의무적으로 여성에게 할당됐다.

2003년 8월14일 8·15 특사로 가석방된 이석기 의원이 대전교도소에서 누나와 포옹하고 있다. ⓒ 연합뉴스
‘민혁당 해체’ 선언 후에도 끝까지 남아

그때는 대부분 모른다고 말하던 ‘이석기’라는 이름을 이제는 전 국민이 안다. 2012년 4월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되자마자 통진당은 비례대표 경선 부정 의혹에 휩싸였고 결국 분당 사태로 치달았다. 당시 이 의원은 당권파의 핵심 실세로 거론되며 부정 의혹의 배후로 지목됐다. 이 의원이 비례대표 경선 1위를 차지한 결과를 두고 통진당 내 당권파로 불리던 경기동부연합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하다는 추론이 사실처럼 떠돌았고, 그렇게 그는 정국의 중심에 섰다. 그리고 2013년 8월 이 의원은 현역 의원 신분이면서 내란 음모 혐의로 수사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2003년 양심수로 석방되고 2012년 국회의원이 되기까지. 그 10년 동안 이 의원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민노당과 통진당으로 이어지는 진보 정당의 연결 고리를 들춰봐도 전면에 나선 적이 없다. 하지만 그를 여의도로 떠민 사람과 세력이 있다는 점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이 의원이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핵심 키워드는 세 가지다.

■ 첫 번째 키워드 ‘민혁당’

이석기 의원을 꿰뚫는 키워드는 ‘민혁당’이다. 민혁당 사건은 ‘인간 이석기’를 ‘양심수 이석기’로 만들었다. 민혁당은 1989년 결성된 반제청년동맹의 중앙위원장 김영환씨(‘강철서신’ 저자)가 1991년 잠수함을 타고 밀입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난 후 1992년 3월 결성한 지하 전위 조직이다. 민혁당을 주도했던 김씨가 이후 북한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면서 1997년 7월 해체를 선언했지만, 김씨와 함께 창설을 주도했던 하영옥씨 등은 이에 반대하며 민혁당을 유지했다.

한국외대 중국어통번역과 82학번인 이석기 의원은 민혁당의 경기남부위원장을 맡으며 함께했다. 당시 재판부 기록에 따르면 민혁당 사건으로 이 의원의 수배 생활이 시작된 때가 1999년 8월이고, 도피 생활 끝에 체포된 때가 2002년 5월이다. 이 의원은 2003년 3월 반국가단체 구성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6월 형을 선고받았다.

하씨와 이 의원의 관계는 돈독했다. 2003년 4월30일 민혁당의 중심이었던 하씨가 노무현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먼저 석방됐다. 반면 이 의원은 당시 사면 대상에서 제외됐는데 확정판결이 내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암 투병 중인 모친 김복순씨가 위독하자 특별휴가를 받고 일주일간 나올 수 있었다. 앞서 말한 ‘청와대 도보순례단’을 꾸린 것은 하씨였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는 “도보순례단이 전국을 도는 동안 하씨는 이 의원의 집에서 노모를 보살피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씨는 지난해 이 의원의 부정 경선이 도마 위에 올랐을 때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출소한 이후에는 이 의원과 만난 적이 없다”며 “제 부친상 때 문상을 와서 한 번 본 게 전부”라고 밝혔다. 이 의원 역시 지난해 5월 한 인터뷰에서 “당시 수배 중이어서 민혁당에 가담해 활동한 적이 없다. 하영옥씨와는 10년 넘게 연락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12일 과천 중앙선관위에서 비례대표 당선증을 받은 이석기 의원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 두 번째 키워드 ‘동지애’

2003년 석방된 이석기 의원은 이후 정치권과 연을 맺는다. 그가 대표로 재직했던 정치 컨설팅업체인 CN커뮤니케이션즈(구 CNP전략그룹)를 통해서다. CN커뮤니케이션즈는 통진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민노당의 사업을 독점했는데 그 때문에 “당권파의 자금줄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은 곳이다. 이 의원이 경기동부연합의 정책 브레인이라는 설이 나온 이유도 CN커뮤니케이션즈에서 비롯된다. 통진당 자주파의 또 다른 축인 인천연합 관계자는 “지난해 당선됐을 때 그런 말이 나왔지만 이 의원이 경기동부연합 정파 내에서는 정책 브레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CN커뮤니케이션즈는 2005년 2월 설립됐다. 처음에는 NL 진영이 총학생회 선거에서 승리한 곳의 학생회 사업, 통일단체 관련 사업 등을 맡아 운영됐다. 예를 들어 2005년 CN커뮤니케이션즈는 고려대 졸업 앨범을 제작했는데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NL 진영 후보가 승리했다. 각종 선거에서 민노당 후보들에게 자문을 하거나 선거 기획을 하는 것도 CN커뮤니케이션즈의 몫이었다.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서는 민노당 후보자들을 모아 1박 2일짜리 정치 캠프도 열었다. 정치 캠프에 참가한 적이 있는 한 인사는 “이석기 의원이 당시 직접 행사장에서 강연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주로 강조한 부분이 동지애다. 동지와 조직이 함께하면 현재의 장애물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고 기억했다.

이 의원이 졸업한 한국외대 용인캠퍼스는 선후배 사이가 돈독하기로 유명했다. 학교를 다닐 때도 그렇고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선배가 운동을 함께했던 후배를 책임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국외대 용인캠퍼스가 위치한 용인은 인접한 성남과 함께 1980년대 학생운동권의 집결지로 유명했다. 당시 이 지역에는 영세한 작은 공장들이 밀집해 있었고 서울의 난개발에 쫓겨난 도시 빈민들이 몰려온 곳이었다. 자연히 노동운동과 빈민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며 한국 사회에서 주목받았다. 현장 운동가로 성장할 수 있는 치열한 환경은 ‘동지애’를 키우는 자양분이 되었다.

‘동지애’적 관점에서 이 의원은 수혜자이기도 하다. 지난해 이 의원이 부정선거 의혹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만난 한 당권파 인사는 “민혁당 사건으로 수배와 수감 생활을 겪는 동안 이석기라는 사람이 받은 고통이 얼마나 컸겠나. 아내와 이혼했고 어머니와 누나가 돌아가셨다. 그래도 서운한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오히려 진보 정치를 걱정한 사람이다. 고생한 사람에게 더운밥을 대접하는 것이 남아 있는 사람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이 보여준 헌신 때문에 이 의원을 도우려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2003년 6월 특별휴가로 출소한 후 민혁당 결성의 핵심이었던 하영옥씨(왼쪽)를 만난 이석기 의원. ⓒ 연합뉴스
■ 세 번째 키워드 ‘경기동부연합’

지금 통진당 당권파를 지칭하는 ‘경기동부연합’이라는 명칭이 외부로 알려진 때는 1990년대 중반이다. 1991년 전국연합이 결성됐을 당시 12개 지역 단체에 ‘경기동부연합’은 등장하지 않는다. 1990년대 중반에서야 전국연합이 공식적인 지역 단체로 이름을 올렸고 이후 세력을 넓혀갔다. 정의당의 한 인사는 “전국연합 아래 있던 경기동부연합은 진보 정당에 투신하기로 결정하고 조직을 해산했다. 그 이후 민노당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조직적 측면에서 경기동부연합은 사라졌지만 인적 자원으로는 여전히 활동하며 진보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밝혔다.

“이석기 의원, 외부 활동 거의 없었다”

2011년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진보 대통합 논의 과정에서는 강경 노선을 유지하고, 반면 국민참여당(참여당)과의 합당을 주도했던 세력이 당권파였던 경기동부연합이다. 권영길 전 대표 등은 참여당과의 합당을 반대했지만, 당권파는 강하게 밀어붙였다. 결국 통진당을 만들어냈다. 지난해 5월 비례대표 부정 경선 논란에 섰던 이 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참여당과의 통합을 제가 먼저 제기하고 엄청난 논쟁을 했다”고 말했다. 스스로가 당권파의 핵심 브레인임을 시인하는 발언이었다. 진보 정치를 또 한 번 뒤흔든 비례대표 부정선거 의혹은 아직도 그 진실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경기동부연합과 이 의원에게는 ‘종북’ ‘패권’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자연스레 다른 정치 세력과 여론이 외면했고 고립됐다.

어렵게 여의도에 입성한 이 의원의 의정 활동은 어땠을까. 그를 보기가 쉽지 않았다는 증언이 많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김재연 의원의 경우는 종종 집회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그런데 이 의원은 외부 활동이 거의 없다. 보통 국회의원의 존재감은 토론회 같은 곳에 출석하며 드러낼 수 있는데 그런 활동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입법 활동도 미진했다. 법안 발의를 하려면 국회의원 10명의 서명이 필요하다. 통진당의 현역 의원 수는 6명이므로, 다른 당 의원들의 서명이 필요했다. 다른 관계자는 “이석기라는 이름이 법안에 들어가 있다면 어떤 의원이 서명을 하려고 하겠나. 이 의원과 함께 기록으로 남는 것에 부담감이 상당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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