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걸렸어, 너 한번 죽어봐
  • 하재근│문화평론가 ()
  • 승인 2013.09.04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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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 용어 쓰면 마녀사냥…패륜적 언어에 분노 표출

최근에 신인 걸그룹 크레용팝을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일베(일간 베스트 모음)’ 논란이다. 크레용팝 소속사 대표가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로 일베를 거론한 데 이어, 멤버들이 일베에서 많이 사용하는 표현을 SNS에서 썼다는 이유로 이들이 ‘일베 추종자’라는 비난이 인터넷에서 터져 나왔다. 신인 걸그룹인 크레용팝이 지상파 방송사들의 정규 뉴스에 모두 등장했던 것도 이 논란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 일베 관련 논란은 인터넷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됐다. 과거에 패닉의 김진표가 일베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많이 사용되는 ‘운지’를 썼다가 논란이 됐었고, 올 상반기엔 시크릿의 전효성이 ‘민주화시킨다’는 표현을 썼다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다. 당시 시크릿은 행사가 취소될 정도로 타격을 받았는데 앞으로도 전효성의 이미지는 그리 쉽게 회복될 것 같지 않다.

크레용팝 논란이 인터넷을 휩쓰는 사이에, 하석진이 고 성재기 남성연대 대표를 추모하는 SNS 글을 올렸다가 논란이 일자 바로 사과하는 일이 벌어졌다. 가장 최근엔 버스커버스커의 김형태가 일베에서 많이 쓴다는 ‘종범’이라는 표현을 썼다가 검색어 1위에 오르는 ‘수난’을 겪고 사과했다.

ⓒ 시사저널 전영기
네티즌은 왜 일베에 민감할까

일베는 보수 성향 네티즌이 많이 모이는 사이트다. 인터넷 여론은 일반적으로 보수에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에 일베도 네티즌에게 좋은 말을 듣기는 힘들다. 하지만 지금처럼 네티즌이 일베에 민감해진 것은 일베가 단지 보수 사이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일베에선 민주화를 부정하는 기류가 흐른다. 한국은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에 일베의 민주주의 부정은 국가 체제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보수든 진보든 모두 민주주의 기반 위에 있다. 누구라도 민주주의를 부정한다면 공공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일베에선 민주화를 조롱하는 것이 즐거운 놀이 정도로 통용되는데, 이것은 사회과학적 학습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청소년들의 사고방식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시크릿의 전효성이 무심결에 ‘민주화시킨다’는 표현을 부정적으로 쓴 것이 그런 영향이라고 하겠다. 당시 전효성은 민주화를 획일화라는 의미로 썼는데, 이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어법이다. 일베가 그저 재미있는 유희 정도로 인식되면 그런 경악할 일들이 더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일베에서 많이 쓰는 언어, 즉 ‘일베어’의 확산에 네티즌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게 된 것이다.

일베에선 또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를 조롱하고 학살을 옹호하는, 심지어 더 학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또 특정 지역에 대한 저주가 나타나고, 여성이나 다문화 계열 국민들에 대한 폄훼와 증오도 나타난다. 얼마 전엔 ‘리틀 싸이’라고 불리는 어린 황민우군을 향한 저주가 나타나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보수니 진보니 하는 고상한 정치 이념을 따질 수준조차 되지 못한다. 반인륜적 표현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일베는 네티즌에게 척결 대상이 됐다.

일베 논란이 터진 후 연예인들의 반응은 언제나 같다. “이게 일베어인지도 몰랐고, 그렇게 문제가 되는 표현인지도 몰랐습니다. 앞으로 안 쓰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연예인은 모르면 안 되는 위치에 있다. SNS에서 수많은 말을 쏟아내고 그것이 대중에게 널리 퍼지기 때문에, 이제 연예인은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된다.

위에서부터 논란이 됐던 크레용팝, 버스커버스커 김형태, 하석진의 SNS 글. ⓒ 인터넷 캡쳐사진
크레용팝에게 쏟아진 비난

옛날처럼 TV에서 정제된 모습만 보여주는 시절이 아니다. 요즘은 연예인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말을 많이 한다. 따라서 민감한 표현을 걸러낼 수 있는 판단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소속사 사장부터 연예인 당사자까지 모두 말이다. 학습이 전제되지 않은 다변은 언제든지 자신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일베의 문제를 지적하고, 일베어의 확산을 막는 것까지는 좋다. 연예인이 모르고 썼다면서 앞으로 주의하겠다고 하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일베 관련 연예인으로 한번 찍히면 아예 활동을 막아버릴 기세다. 크레용팝의 경우는 대중의 불매 운동에 공포를 느낀 회사에 의해 광고까지 중단됐다.

크레용팝이 일베를 추종한다는 근거는 사실 없다. 대표는 마케팅 차원에서 일베를 관리했을 뿐이라고 했고(유명 커뮤니티이니까), 멤버들은 일베를 잘 모른다고 했다. 멤버들이 썼다는 일베어(노무노무, 쩔뚝이)도 꼭 일베어의 맥락에서 썼다고 단정하기 힘들다. 멤버들이 일베에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는데, 신인 가수가 자기를 좋다고 해주는 사이트에 들어가보는 게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즉, 근거를 통해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건 크레용팝 측이 시사 이슈에 대해 ‘무개념·무식’했다는 정도에 그친다. 이건 그냥 앞으로 잘하면 되는 문제였을 뿐이다. 그런데 네티즌은 크레용팝이 ‘일베용팝’이라며 맹렬히 공격했다. 크레용팝 측이 어떤 해명을 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과거 한국에선 빨갱이 사냥이 벌어졌다. 약간의 근거만 가지고도 그 사람을 용공 빨갱이라며 투옥하고 고문했다. 사회과학 서적을 소지했다든가 하는 아주 작은 꼬투리만 있으면 빨갱이라고 단정했다. 당시 정권이 그 사람을 빨갱이라서 단죄했던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을 단죄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는 빨갱이가 돼야만 했다.

크레용팝 사태도 그렇다. 크레용팝이 일베라서 욕한다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욕을 하고 싶어서 그들은 일베가 돼야 했다. 네티즌은 지금 기본적으로 분노한 상태다. 사회적 불안 때문에도 그렇고, 연이은 보수 정권에 대한 분노도 크며, 일베에서 터져 나오는 패륜적 표현 때문에도 분노했다. 그 분노를 터뜨릴 대상이 필요했는데 마침 크레용팝이 나와준 것이다.

분노를 누군가에게 투사한다는 점에선 일베와 같다. 일베는 사회적 불안과 좌절로 인해 생긴 분노를 사회적 약자에게 터뜨리는 곳이다.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크레용팝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명분은 서로 다르지만 집단적 분풀이라는 점에선 유사하다.

과거 정권은 연예인을 비롯한 문화인들이 조금만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 의도를 가지고 반체제적 활동을 한 것으로 몰아 괴롭혔다. 예를 들어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그저 양파 농사를 망친 농민들의 아픔을 다뤘을 뿐인데, 그것이 좌파 세력과 연계된 조직적 반정부 활동인 것처럼 몰아 제작진을 다그쳤다.

지금 일베에 반대한다는 네티즌은, 몇몇 단어를 꼬투리로 정치의식 자체가 없어 보이는 연예인들을 붙들고 ‘넌 일베 동조자지? 전 대통령을 조롱했지? 이실직고해!’라고 다그친다. 우리 사회의 증오 지수가 점점 높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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