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권력 5년 막후] #9. 검찰 수사 나서며 회장 퇴진 압박
  • 소종섭│편집위원 ()
  • 승인 2013.09.1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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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차관’ 박영준, 핵심 인사들 면접 보듯이 일일이 접촉

김대중 정권에서 노무현 정권으로 권력이 넘어간 2003년 초. 강남 청담동에 있는 한 유흥주점이 세무조사를 받았다. 업주는 구속되고 30억원이 넘는 세금을 추징당했다. 강도가 셌다. 이 유흥주점은 김대중 정권 시절 한 동교동계 유력 인사가 뒤를 봐줬던 곳이다. 업주가 그의 힘을 믿고 세무서 알기를 우습게 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세무 당국에서 별렀던 것일까. 정권이 바뀌고 채 6개월이 지나지 않아 업주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것이 권력이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많은 일이 막후에서 일어난다. 씨줄 날줄처럼 얽힌 이해관계와 역학 관계가 수많은 조합을 만들어낸다. 요즘처럼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지면 가을이 왔다는 신호다. 나뭇잎이 떨어지면 겨울이 온다는 알림이다.

국세청이 9월3일 재계 서열 6위 포스코에 대해 느닷없이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성격을 보면 특별 세무조사다. 임원급 사무실에서 자료를 가져갔고 동시다발로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서울 대치동 포스코센터와 포항 포스코 본사, 광양제철소 등 3곳에 조사 인력을 투입해 회계 자료를 쓸어갔다. 왜, 이 시점에 포스코를 대상으로 세무조사가 시작된 것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2008년으로 돌아가보자.

‘왕차관’으로 불린 박영준 지경부 2차관(맨 오른쪽)이 2010년 11월9일 제주시에서 열린 스마트 그리드 종합홍보관 개관식에 참석했다. ⓒ 연합뉴스

촛불 잦아들자마자 포스코 전 방위 압박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2008년 초. 이구택 포스코 회장의 퇴임설이 정가에 돌기 시작했다. 포스코 공채 1기인 그는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3년 3월 취임했다. 2007년 2월까지 1차 임기를 마치고 연임한 상태였다. 그러나 인사 난맥상, 공천 잡음, 촛불 시위를 거치면서 여권은 겨를이 없었다. 자신을 주체하기도 벅찼다. 촛불 시위 이후 여권이 진용을 정비한 2008년 가을, 유·무형의 압박이 포스코에 가해졌다. 이구택 회장의 퇴진을 노린 움직임들이었다.

우선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2005년 대구지방국세청으로부터 세무조사를 받았을 때 포스코가 감세 로비를 펼쳤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이구택 회장 자택 압수수색설’까지 돌았다. 2008년 11월에는 당시 한수양 포스코건설 사장이 에너지 전문 기업인 케너텍으로부터 각종 청탁과 함께 4만 달러를 받았다는 혐의로 대검 중수부에 의해 구속됐다. 케너텍 고위 경영진과 이 회장은 고교 동문이었다. 관련이 있다는 얘기가 퍼졌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무죄 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은 나중 얘기였다. 이 회장의 아들이 병역을 회피한 의혹이 있다는 해묵은 이야기도 다시 불거졌다.

포스코청암재단이 시민단체 인사들을 지원한 것도 도마에 올랐다. 2006년 이후 30여 명의 시민단체 활동가들에게 거액을 들여 해외 연수를 보내준 사실은 ‘촛불’에 가슴을 쓸어내린 청와대를 자극했다. 청와대는 포스코 관계자들을 불러 질책했다. 박원순 변호사 등 일부 사외이사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권력층이 불편해한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이 회장은 이런 움직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숙고할 수밖에 없었다.

이 회장이 이명박 정권의 실세로 떠오른 박영준 전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을 만난 것이 이때다. 2008년 10월 하순~11월 초쯤이다. 당시 박 전 비서관은 정두언 의원이 제기한 ‘권력 사유화’ 당사자로 지목돼 청와대를 나와 자연인으로 지낼 때였다. 어느 쪽에서 먼저 손을 뻗쳤는지는 알 수 없다. 두 사람을 연결한 고리는 대우그룹에서 고위직을 지낸 한 인사였다. 박 전 비서관은 과거 대우그룹 기획조정실 전략팀장을 지내 그와 인연이 있다. 만난 것은 확인됐으나 두 사람이 왜 만났는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포스코 원로 모임인 중우회 추계 모임에 박태준 명예회장(왼쪽)과 이구택 전 회장이 자리를 함께했다. ⓒ 시사저널 임준선
박태준은 윤석만, 이구택은 정준양 밀어

이 회장이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는 권력의 뜻을 최종 확인하고 퇴임 결심을 굳힌 것은 2008년 11월 하순쯤으로 전해졌다. 그가 그해 12월 초,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을 찾아가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여권 핵심부에도 비슷한 시기에 퇴임 의사를 알린 것으로 알려졌다. 동시에 이 회장과 관련한 온갖 구설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박태준·이구택 두 사람은 ‘후임’에 대해서는 기본 생각이 같았다. 외부 인사가 포스코 회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10년 만에 정권이 교체된 만큼 과거 김영삼 정권 때 김만제 전 경제부총리가 회장으로 왔던 것처럼 외부인이 포스코 회장으로 올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있을 때였다. 두 사람은 ‘낙하산’을 막아야 한다는 데는 뜻을 같이했지만 생각하는 인물은 달랐다. 박 명예회장은 윤석만 당시 포스코 사장을 염두에 뒀다. 1월21일 포스코 창설 요원들이 포스코 회장으로 윤 사장을 지지하는 맥락의 성명서를 낸 것이 그 반증이다. 반면, 애초 뜻을 같이했던 이구택 회장은 2009년으로 넘어가면서 권력의 뜻을 읽었는지 ‘정준양 포스코건설 사장’ 카드를 빼들었다. 애초에는 이 회장도 윤 사장을 차기 회장으로 생각하고 이런 뜻을 윤 사장에게 밝히기도 했다. 이 회장이 갑자기 뜻을 바꾼 막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박영준 전 비서관은 당시 이구택 회장만 만난 것이 아니었다. 윤석만 포스코 사장,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정준양 포스코건설 사장 등을 잇달아 만났다. 당시 포스코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다 접촉한 셈이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포스코 회장 선임을 앞두고 권력이 일종의 면접을 하는 과정 같았다. 정부 지분이 하나도 없는 포스코 회장 선임 막후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 일은 국회에서도 문제가 됐다. 2009년 4월21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장. 우제창 민주당 의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상대는 박영준 당시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이었다. “지난해 12월5일 강남의 한 호텔에서 윤석만 포스코 사장을 만난 적이 있지요?” “지난해 12월 말에는 포스코 박태준 명예회장을 신라호텔에서 부부 동반으로 만나 식사를 했지요?” 느닷없는 예상 밖 질문에 박 차장은 잠시 숨을 골랐다.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자연인 신분이었습니다. 내용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우 의원의 질문이 이어졌다. “정준양 포스코 회장을 만났습니까? 안 만났습니까?” 이때서야 사태를 눈치챈 이한구 예결위원장이 황급히 나섰다. “박 차장, 그것은 답변 안 하셔도 됩니다”라고 제지했다. 우 의원의 질문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2011년 3월31일 포스코파워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박영준 차관(맨 오른쪽)과 정준양 포스코 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 연합뉴스
윤석만 “박영준을 꼭 만나야 하나?” 오판

이구택 회장의 퇴임이 내부적으로 분명해진 2008년 12월5일 저녁, 박 전 비서관은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윤석만 포스코 사장을 만났다. 사정기관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2시간여 동안 계속된 이 자리에는 박 전 비서관과 친한 것으로 알려진 포스코의 내부 인사 두 명이 함께했다. 되돌아보면 당시 분위기가 그리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윤 사장은 박 전 비서관을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박 전 비서관이 만나자고 하는 요청을 받고 처음에는 ‘왜 나를 만나자고 하지? 꼭 만나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윤 사장은 거듭되는 요청을 받고서야 박 전 비서관을 만났다. 정무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실수였다.

당시 만남에 동석했던 이들 가운데 한 명은 포항고 총동창회장과 프로축구팀 포항 스틸러스 후원회장을 지낸 이동조 제이엔테크 회장이었다. 포항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기업가다. 그는 1975년부터 1991년까지 포항제철(현 포스코)에서 근무한 뒤 도시락업체를 창업해 포항제철 직원들에게 판매하는 사업을 했다. 2000년 기계설비 공사 업체인 제이엔테크를 창업해 2008년에 포스코건설 하청업체로 등록했다. 2008년 100억원대 매출을 올렸고 2009년에는 68억원, 2010년에는 200억원대, 2011년에는 170억원대 매출을 올렸다. 포스코와 관련한 매출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4월 터진 파이씨티 사건의 핵심 인물이기도 하다.

박 전 비서관은 크리스마스이브인 2008년 12월24일 박태준 명예회장과 부부 동반으로 시내에 있는 한 호텔에서 점심을 먹었다. 당시 상황에 정통한 한 인사에 따르면 박 전 비서관이 만남을 요구했다고 한다. 박 명예회장은 “격이 맞지 않는다”며 주저했으나 포스코 회장 선임과 관련한 일이라고 판단하고 자리에 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이상득 의원도 그해 12월29일 박태준 명예회장을 만났다. 서울 광화문 파이낸스센터에 있는 박 명예회장의 사무실에서였다. 당시 포스코 회장 자리를 둘러싸고 권력과 포스코 안팎에서는 이처럼 다양한 움직임이 펼쳐졌다.

이구택 회장은 2009년 1월 초 ‘포스코 회장은 정준양’이라는 게 권력의 뜻임을 분명히 했다. 이 회장은 윤석만 사장에게도 이를 알렸다. 때를 맞춰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도 윤 사장에게 몇 차례 전화해 비슷한 얘기를 했다. 천 회장은 과거 콜타르를 정제해 포항제철에 납품하는 사업을 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박태준 명예회장과도 잘 아는 사이다. 포스코 회장 선임 과정에서 천 회장은 박 명예회장과도 여러 차례 통화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 정권 창출 과정에서 공을 세운 원로 그룹의 모임인 이른바 ‘6인회’ 구성원인 천 회장까지 나섰을 정도로 권력 핵심부는 포스코 회장 인사에 관심이 컸다. 뒤늦게 축이 기울었음을 안 윤 사장은 나름대로 이를 뒤집기 위해 움직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윤 사장의 관할 아래에 있던 포스코 조직조차 그를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차기 회장은 정준양’이라는 사발통문이 은밀하게 돌았기 때문이다.

윤 사장은 분루를 삼켰으나 도리가 없었다. 그는 ‘포스코 CEO 추천위원회’에서 폭탄을 터뜨리기로 결심했다. 권력이 인사에 개입했다는 것을 사외이사들에게 알려 막판 뒤집기를 노렸다.

최대 실적 올리고도 권력 압박에 중도 사퇴

2009년 1월15일 열린 포스코 이사회에서 이구택 회장은 자진해서 사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치적 외압이나 외풍에 의한 사임은 아니다. 지금과 같은 비상 상황에서는 새 인물이 새 리더십을 발휘해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포스코는 이날 아이러니컬하게도 2008년보다 매출은 38%, 순이익은 20.9% 증가한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고 발표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누가 이 회장의 퇴임을 순수한 퇴임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정권이 출범할 때마다 회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퇴한 전철이 이명박 정권에서도 되풀이된 것이다. 포스코는 김영삼 정권 때는 박태준 명예회장이, 김대중 정권 때는 김만제 회장이, 노무현 정권 때는 유상부 회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 사퇴했다. 이구택 회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포스코 회장 선임 과정은 내용적으로 보면 ‘박태준-윤석만 라인’과 ‘정준양-이구택-정권 실세 라인’의 한판 대결이었다. 두 후보는 홍보·경영 전문가(윤석만)와 광양제철소장을 지내는 등 현장에 강하다(정준양)는 차이가 있었다. 권력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정준양 카드’가 낫다는 판단을 할 수 있다. 정무적인 측면에서 배경이 약하고 그와 관련해서는 당시 이러저러한 의혹 또한 불거졌었다. 자사주를 매입했다가 되팔아 차익을 남겼다거나 친인척들이 포스코에 납품을 했다는 의혹 등이다.

2009년 1월29일 차기 회장을 선임하기 위해 열린 ‘포스코 CEO 추천위원회’에서 이런 문제들과 관련해 “조사해본 결과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포스코 감사실의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언제든 다시 불거질 소지가 있다.

윤 사장은 비공개로 열린 추천위원회 회의에서 권력 실세들이 어떻게 포스코 회장 인사에 개입했는지를 증언했다. 그러나 사외이사들은 외풍을 막는 ‘울타리’ 역할을 하는 데 한계를 드러냈다. 포스코는 독립 경영을 위해 사내이사(5명)보다 많은 사외이사를 두고 있다. ‘포스코 CEO 추천위원회’는 정준양을 차기 포스코 회장으로 결정했다.

계열사 52개, 자산 규모 81조원으로 재계 서열 6위인 포스코에 대해 정부가 갖고 있는 지분은 전혀 없다. 지난 2000년 9월 갖고 있던 지분을 모두 팔아 민영화했기 때문이다. 외국인 지분율이 51.8%에 달한다. 굳이 연관성을 찾는다면 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민연금이 5.99%의 포스코 지분을 갖고 있다는 정도다. 그럼에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강한 외풍에 시달리는 것이 현실이다. 눈독을 들이는 권력도 문제이고 빌미를 주는 회사 측을 바라보는 눈길도 곱지만은 않다.   

*이번 호에는 '포스코 쟁탈전'을 먼저 게재합니다. 지난 호에 예고했던 '이명박-박근혜, 가깝고도 먼 밀월'편은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Series) MB권력 막후 5년


#1.  드디어 피바람이…“당신 주변엔 빨갱이가 왜 이리 많아”
- 이상득·박영준 등 TK의 권력 장악 시나리오…허망하게 무너진 정두언 ‘한 달 천하’



#2. 함께 가자더니 하루아침에 배신을…”
- 이재오 향한 정두언의 분노…TK는 ‘55인의 반란’ 초기에 진압


#3. 읍참마속(泣斬馬謖) 후 노무현 세력 척결 나서다
-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MB 집권 첫해 중심 못 잡고 허둥지둥


#4. 봉하마을 향하는 칼끝 최종 타깃은 노무현
- 진보 단체 돈줄 색출…‘박연차 게이트’ 광풍 몰아쳐


#5. MB 검찰, 지관 총무원장 계좌 뒤졌다
- 노발대발한 총무원장, 불교계 총동원령 내려


#6. 한상률의 배신, 노무현 등에 비수 꽂아
- TK 세력과 손잡고 ‘정치성 세무조사’…부하의 보복에 자신도 거꾸러져


#7. 이상득은 친인척 관리 대상 위에 있었다
- MB도 어쩌지 못하는 ‘궐 밖 권력’ 김윤옥 여사와 SD 부인 최신자씨 간 갈등도


#8. ‘대군’들의 밀약, 촛불에 한 줌 재로 사라져
- 전·현직 대통령 ‘형님’들 핫라인…2007년 대선 전후 가동


#9
. 검찰 수사 나서며 회장 퇴진 압박
- ‘왕차관’ 박영준, 핵심 인사들 면접 보듯이 일일이 접촉


#10. 웃음 뒤에 감춰둔 ‘비수’는 예리했다
-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불편했던 MB-박근혜 “실제 둘 관계 나쁘지 않다”는 얘기도


#11. 암호명 ‘동해 일출’ “VIP를 독도로 모셔라”
- 김효겸 전 청와대 비서관이 전하는 이명박 정권 뒷얘기


#12. 정권 실세들 떡고물 챙기려 ‘4대강’ 기웃기웃
- MB, 2008년 6월 ‘대운하 포기’ 언급 이후에도 논란 이어져


#13. 정권 끝날 때까지 “믿을 건 내 사람뿐”
- MB 정권, 사정·정보·인사 등 핵심 라인 ‘고대·영남’ 출신 독식


#14. ‘박근혜 대항마’, 날개도 못 펴고 스러지다
- 정운찬의 총리 취임 직전 즉흥적 ‘세종시 수정안’ 한마디로 권력 쟁투 가열


#15. 요란한 구호 속 한몫 챙기기 바빠
- 5년 내내 ‘동반 성장’ ‘녹색 성장’ ‘중도 실용’ ‘공정 사회’ 등 키워드만 난무


#16. 궐 밖에선 최고 권력자였지만…
- MB 정권 실세의 상징 ‘6인회’ 멤버, 잇따라 몰락의 길 걸어


#17. 실세들이 설친 자리엔 빚더미만 남아
- MB 정권 ‘자원 외교’, 공기업들에 수조 원대 부채 떠안겨


#18. KT·포스코는 정권의 전리품
- 민간 기업을 낙하산 집합소로 만들어…버티면 검찰권 동원해 압박


#19. 정운찬·김태호·오세훈 제 무덤 파거나 포격에 무너져
- 실패로 끝난 MB의 ‘후계 프로젝트’…‘박근혜 대항마’ 부각되기도 전 좌초


#20. 강남 ‘큰손’ 부동산업자에게 땅 비밀 거래 꼬리 잡히다
- 시사저널, ‘내곡동 사저 단독 공개’로 MB 정권 강타…특검도 의혹 해소 못해


#21. 거물들 모셔왔으나 성과 없이 내리막길
- ‘친기업주의’ 정책 펼치며 해외 유명인들 영입…권력 내부에서는 균열 조짐


#22. 잇단 북 도발에 ‘병역 면제 정권’ 조롱
- 천안함·연평도 사태로 ‘안보 무능’ 드러나…컨트롤타워 부재 따른 혼선에 지지율 뚝


#23. ‘MB맨’ CEO들 빚더미 안기고 퇴장하다
- 지난 정권 5년간 공기업 부채 244조원 증가…4대강 사업 등에 돈 쏟아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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