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눈으로, 글자를 그림으로 느낀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3.09.11 15:0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동리 소설그림전’ ‘ECM: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 공감각 전시

공감각(共感覺). 가시광선을 눈으로 보고 색과 형상을 느끼고, 음파를 귀로 들어서 소리를 이해하는 것은 감각이다. 공감각은 이런 자극과 감각기관의 일대일 대응을 넘어 소리를 들으며 시각적 이미지를 느끼고, 그림을 보면서 음악 소리를 떠올리고, 글을 읽으며 시각적 형상을 그리는 것을 가리킨다.

공감각을 자극하는 두 개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서울도서관(옛 서울시청)의 ‘김동리 탄생 100주년 기념 소설그림전’과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열리는 ‘ECM: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그것이다.

체헤트마이어 콰르텟의 슈만 4중주곡 앨범에 쓰인 장 기 라튀리에르의 사진. ⓒ ECM 제공
김동리의 <등신불> 같은 단편소설은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기에 누구나 한 번쯤 읽어봤을 법한 작품이다. 김동리는 <무녀도> <황토기> <화랑의 후예> 같은 친숙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의 단편소설 8편이 불러일으키는 심상을 8명의 중견 화가가 대산문화재단의 의뢰를 받아 시각 이미지로 표현한 작품을 전시한다. 김선두 화가는 <무녀도>의 마지막 장면인 모화가 물에 빠져 죽고 홀로 남은 딸 낭이를 찾아와 데려가는 장면을 <해변의 길손>이라는 이름으로 시각화했다.

 

‘…열흘쯤 지난 뒤다. 동해안 어느 길목에서 해물 가게를 보고 있다던 체구 조그만 사내가 나귀 한 마리를 몰고 왔을 때, 그때까지 아직 몸이 완쾌하지 못한 낭이가 퀭한 눈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다. … 다시 열흘이 지났다. “여기 타라.” 사내는 손으로 나귀를 가리켰다. “…….” 낭이는 잠자코 그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나귀 위에 올라앉았다. 그네들이 떠난 뒤엔 아무도 그 집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고, 밤이 오면 그 무성한 잡풀 속에서 모기들만이 떼를 지어 울었다.’

ECM에서 발매된 김덕수와 레드선의 협연 앨범(위)과 얀 가바렉 그룹의 앨범.
무당 모화의 불같은 성정과 한없이 쓸쓸한 가족사를 작가는 담담한 수묵화로 처리했다.

김동리 그림 프로젝트에 참가한 화가는 박영근(<화랑의 후예>)·최석운(<바위>)·김선두(<무녀도>)·황주리(<황토기>)·이인(<역마>)·임만혁(<흥남철수>)·김덕기(<밀다원 시대>)·윤후명(<등신불>) 등이다.

김동리 그림전이 소설을 회화로 보여준다면 ‘ECM: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에서는 소리를 회화나 사진으로 보여준다.

ECM은 국내에선 재즈 뮤지션 키스 재럿이나 팻 매서니 음반으로 널리 알려진 음반사다. 특이한 점은 회사 자체가 ‘ECM 사운드’로 브랜드화됐다는 점이다. 이번 전시회 제목(the Most Beautiful Sound Next to Silence)이 모토일 만큼 ECM은 소리에 민감한 레이블로 정평이 나 있다. 이는 회사의 창립자이자 레코딩 프로듀서인 만프레트 아이허가 클래식 연주자 출신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 명징한 음색을 내세운 ‘ECM 사운드’는 1969년 창립한 이래 1400여 종의 음반을 내면서 흔들리지 않는 팬덤을 형성해왔다. 특정 뮤지션이 아닌 음반사 레이블에 대한 선호가 생긴 것. 이는 폴리돌·데카·필립스 등 거대 음반사들이 인수·합병으로 사라지는 와중에도 ECM을 자기 색이 뚜렷한 독자 레이블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① 최석운, 캔버스 위에 아크릴, 72.7×60.6cm.② 임만혁, 한지에 목탄 채색, 25×75cm.
감각의 전이를 통한 새로운 경험

월드뮤직과 재즈로 이름난 ECM은 1990년대 이후 뉴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현대음악 쪽에도 발을 뻗었다. 기돈 크레머, 언드라스 쉬프, 킴 카슈카쉬안, 체헤트마이어 콰르텟, 켈러 콰르텟 등 중견 연주가들이 죄르지 쿠르탁, 알프레드 슈니트케, 윤이상, 아르보 패르트 등의 현대음악 작곡가 작품을 담은 레코딩을 내면서 클래식 쪽에서도 확실한 지분을 챙긴 레이블로 발돋움했다.

체헤트마이어 콰르텟이 슈만 현악4중주곡 1번과 3번의 연주를 담은 2003년도 앨범은 그해 그라모폰 상과 디아파종 상 등 10여 개의 상을 휩쓴 수작이자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앨범의 커버는 프랑스의 사진작가 장 기 라튀리에르의 작품이다. 그는 체헤트마이어 콰르텟은 물론 랄프 타우너, 토마쉬 스탄코의 앨범 등 ECM에서 나온 20여 개의 앨범에서 커버를 담당했다. 장 기 라튀리에르는 이번 서울 전시에서도 4점 이상을 선보였다.

그의 사진은 매번 사진이라는 정지된 2차원 틀 안에 시간, 바람 등의 궤적을 담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슈만의 앨범 커버에도 예외 없이 짙푸른 어둠 속에 흔들리는 키 큰 나무와 불빛을 담아냈다. 이 앨범 첫 번째 트랙의 바이올린 소리가 흘러나올 때의 서늘하고 애잔한 정조는 완벽하게 커버 이미지와 맞아떨어진다.

지하 4층부터 지하 1층까지 이어진 이번 전시는 각 코너마다 LCD·MP3플레이어·하이파이 음향 감상실을 고루 갖췄다. 재즈부터 실내악·교회음악·합창곡까지, 바흐와 베토벤부터 리게티까지 취향껏 탐닉할 수 있게 구성돼 있다. 좁고 깊게 감상할지, 넓고 얇게 즐길지, 시각 이미지만 볼지 여부는 관람자의 선택에 달렸다.

 





















김선두, 장지 위에 먹 분채, 75×50cm.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