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권력 5년 막후] #10. 웃음 뒤에 감춰둔 ‘비수’는 예리했다
  • 소종섭│편집위원 ()
  • 승인 2013.09.16 14:51
  • 호수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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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5년 내내 불편했던 MB-박근혜 “실제 둘 관계 나쁘지 않다”는 얘기도

“부산 민심이 심상치 않다!” 잇달아 올라오는 정세 보고는 박근혜 후보의 발걸음을 부산으로 옮기게 했다. 지난 2012년 대선 기간 동안 박 후보는 무려 15차례나 부산을 찾았다. 부산이 고향인 문재인 후보가 10차례 찾은 것과 비교해보면 박 후보가 얼마나 부산에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부산에서 부는 ‘문풍(文風)’을 잠재우지 못하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절박감이 있었다.

11월 마지막 날인 2012년 11월30일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이날 박 후보는 이명박 대통령을 직접 비판했다. 대선 기간 동안 이 대통령에 대해 처음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평소 박 후보가 원칙을 중시하고 가볍게 처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볼 때 이날 언급은 확실히 눈에 띄었다. 박 후보는 이날 부산 사상구 서부버스터미널에서 가진 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 정부도 민생에 실패했지만 이명박 정부도 민생에 실패했습니다. 저는 과거 정권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과 정부를 만들겠습니다.”

2010년 8월21일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전격 회동해 오찬을 함께했다. ⓒ 청와대제공
MB “날 비판해도 된다고 박 후보에 전하라”

이날 MBC 뉴스의 제목은 ‘박근혜, 부산 역습…“이명박 정부 민생 실패”’였다. 한겨레는 ‘(새누리) MB 정부 비판 유세 발언 빠뜨린 보도자료 돌려. 민감한 발언 ‘마사지’하려 했던 것 아니냐 의혹’이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새누리당이 보도자료를 돌리면서 박 후보가 이 대통령을 비판한 내용을 일부러 빼고 돌린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날 한겨레 보도는 틀렸다. 이날 박 후보의 발언 자체가 여권 내에서 조율된 결과로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숨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어떤 측면에서 보면 여권 핵심부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박 후보가 이 대통령을 비판한 내용을 알리려고 했다. 선거 전략상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이날 유세가 있기 전 박 후보의 수행비서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했다. 그러나 좀처럼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가 이처럼 애가 닳았던 이유는 이 대통령으로부터 일종의 미션(임무)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이 대통령)를 비판해도 된다는 말을 박 후보 측에 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화 연결이 안 되니 알릴 수가 없었다. 다급해진 이 고위 인사는 박 후보와 물밑 핫라인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A씨에게 SOS를 청했다. 이 인사가 박 후보 수행비서에게 전화를 하니 연결이 됐다.

A씨 : 왜 (고위 인사의) 전화를 안 받나?

수행비서 : 입력되지 않은 전화번호는 안 받는다.

A씨 : (고위 인사가) 꼭 전해야 하는 메시지가 있다고 한다. 지금 즉시 전화하라고 할 테니 꼭 받아라.

수행비서 : 알았다.

이후 고위 인사와 수행비서 간에 전화가 연결됐다. 그리고 실제 그날 박 후보의 이 대통령 비판 발언이 나왔다. ‘11월 마지막 날의 폭탄 발언’은 핵폭탄이 아니라 사전에 조율된 것이었다.

2012년 대선이 다가오면서 이처럼 달라지기는 했지만 이 대통령과 박 후보는 집권 기간 내내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어떤 때는 서로 소 닭 보듯 했고, 어떤 때는 용과 호랑이처럼 싸우기도 했다. 후보를 놓고 경쟁했던 관계이기도 하지만 ‘친이’ ‘친박’으로 나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두 수장은 물과 기름 같았다. 경선에서 이 대통령이 당심에서 뒤지고 민심에서 이겨 대선 후보가 됐던 것처럼 대통령이 된 후에도 당에 대한 박 후보의 장악력은 대단했다. 두 사람은 또 성격적으로도 그리 호흡이 잘 맞는 편이 아니었다. 이 대통령이 테니스, 수영 등을 즐기는 외향적 성격이라면 박 후보는 단전호흡을 수련하며 내공을 키우는 것에서 보듯 조용하면서도 단단한 성격이었다.

박근혜, MB에게 빈 봉투 들이밀어

2007년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실용주의 노선과 경제 살리기를 앞세운 이 대통령에게 패한 박 후보는 “저 박근혜, 경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합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화학적으로 결합하지는 않았다. 2007년 12월 대선과 2008년 4월 총선에서 승리한 한나라당 내에서 친이계와 친박계의 대립은 끝없이 이어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 직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국무총리직을 제안했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당에 남겠다며 거절했다. 2008년 4월 제18대 국회의원 선거는 친이계가 자신들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며 의회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이었다.

대선이 끝나고 10일이 지난 후인 2007년 12월29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박근혜 전 대표가 대선 이후 처음으로 만났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이 당선인 집무실에서 이뤄진 이날 회동은 배석자 없이 약 35분간 비공개로 진행됐다. 언론에는 두 사람의 모두발언만 공개됐다. 겉보기에 큰 갈등은 없었으나 이날 모임에서는 이명박 정권 내내 지속된 ‘친이-친박’의 갈등을 예고하는 조짐이 보였다.

오후 2시55분께 접견실에서 박 전 대표를 맞은 이 당선인은 “고생 많이 했다. (대선 때) 정말 수고가 많았다”고 먼저 인사했다. 박 전 대표는 “별 말씀을. 당원으로서 당연한 도리다. 정권 교체를 해주셔서 정말 잘됐다”고 답했다. 이 당선인은 “박 전 대표가 도와주셔서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고 받았다.

바로 이때쯤,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박 전 대표는 ‘공천’을 언급했다. “대통령이 됐으니 정치 발전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바란다. 사실 공천 문제나 기타 이런 게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초석이 된다. 거기서부터 삐꺽거리고….” 여기까지 말했을 때 이 당선인이 말을 잘랐다. “아이고 그럼요. 내 생각도 똑같아요. (공천 문제로 삐꺽거리면) 국민들이 볼 때 ‘이 사람들이 밥그릇 챙기나’ 그렇게 하고 말이지(비칠 수 있다). 잘해야 할 책임이 당 대표에게도 있고, 옆에서 그렇게 되도록 우리가 해야 한다.” 박 전 대표는 “(공천 등이) 안정적으로 돼야…”라고 말을 이어가려고 했다. 다시 이 당선인이 말을 잘랐다. “정말 국민이 원하는 정치 변화를 가져와 (총선에서) 과반수가 되도록 박 전 대표가 더 애를 써야 한다.”

그럼에도 박 전 대표는 물러서지 않았다. “세 가지 부탁을 드리겠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 당선인의 임태희 비서실장이 “저기하고(기자들 내보내고) 할까요?”라고 끼어들었다. 박 전 대표는 “예. 그냥 먼저…”라며 말을 이었다. ‘경제 살리기’ ‘나라 정체성 세우기’ 등의 당부를 전한 뒤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동안 정치 발전을 했지만, 많은 관심을 갖고 계속 발전해나가도록 해주시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내용상 보면 공천을 공정하게 해줬으면 한다는 얘기였다. 이 당선인은 이에 대해 “내가 바라는 것과 똑같다”고 답했지만 이후 펼쳐진 상황을 보면 셈법은 달랐던 것 같다.

해가 바뀐 2008년 1월11일. 이명박 당선인은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주변 4개국에 파견될 특사단을 만났다. 그러나 공천 문제로 이 당선인과 갈등이 커진 박 전 대표는 끝까지 굳은 표정으로 일관했다. 박 전 대표는 중국에 특사로 가기로 한 상태였다. 3일 뒤인 1월14일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분위기는 비슷했다. 이 당선인이 중국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특사 자격으로 방한한 왕이(王毅) 외교부 부부장의 예방을 받는 자리였다. 박 전 대표는 왕 부부장이 들어서자 “니하오”라고 중국어로 인사했다. 이 당선인이 접견장에 들어서 왕 특사와 인사한 뒤 박 전 대표를 발견하고 악수를 청했다. 박 전 대표는 목례로 답례했으나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2008년 총선 사흘 뒤인 4월12일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맨 왼쪽)의 부친상에 조문 온 친이계 핵심 안상수 원내대표(왼쪽에서 세 번째), 이재오 의원(왼쪽에서 다섯 번째), 이방호 사무총장(맨 오른쪽) 등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당시 총선에서 친박계 공천 학살을 주도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 연합뉴스
정진석 수석, 비밀리에 이-박 회동 추진

중국에 특사로 다녀온 박 전 대표가 이 당선인과 다시 만난 2008년 1월24일, 공천 갈등은 봉합되는 듯했다. 중국에 다녀온 일로 덕담을 주고받은 후 비공개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은 공동 발표를 했다. “이 당선인은 원칙과 기준을 갖고 공정한 공천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 전 대표도 전적으로 공감했다.” 문제는 실천이었다. 이날의 만남과 관련해 중앙일보가 지난 2월, 흥미로운 보도를 했다. 당시 공개되지 않은 뒷얘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중앙일보 보도 내용이다.

박(근혜) 당선인은 이날 이 대통령에게 노란 봉투를 내밀었다. 유력 대선 주자이지만 여당 소수파 리더인 사람이 대통령에게 노란 봉투를 건넨 건 처음이 아니었다. 1991년 노태우 대통령 때 YS도 그랬다. 당시 봉투 안엔 YS의 ‘자질 부족’을 다룬 정보 보고서가 담겨 있었다. YS는 그걸 근거로 “나를 고사시키려는 거냐”고 노 대통령을 강하게 압박했었다.

박 당선인의 봉투엔 무엇이 있었을 것 같은가. 한 인사가 현 정부 말미까지 비보도를 전제로 전한 정황은 이랬다. “대통령이 곧바로 봉투를 참모들에게 넘겼다. 한 참모가 봉투를 뜯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거다. 다시 원상태로 해보더라. 도중에 누가 뜯어봤나 싶어서였다. 아니었다. 빈 봉투를 밀봉해서 준 거였다. 공천 명단이라도 들어있을 줄 알았는데….” 대통령에게 빈 봉투를 들이민다? 쉽게 내기 어려운 계책이고 담력이었다. 이 대통령 쪽에선 박 당선인이 원하는 바가 무엇이고 어디까지인지 몰라 더 당황했었다. 박 당선인은 이렇듯 정치적 심리전에 강했다.

어쨌든 3월 중순 발표된 공천 결과는 ‘친박계’ 인사들이 대거 공천에서 탈락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러자 박 전 대표는 참고 참았던 독설을 뱉어냈다. 3월23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고 한 것이다. 그가 토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쓴소리였다. 그만큼 분노가 컸다. 공천에서 탈락한 김무성 의원을 비롯한 친박 무소속연대와 서청원 전 대표가 중심이 되어 만든 정당인 ‘친박연대’는 ‘박근혜’라는 이름 하나를 내세워 그해 4월 총선에서 25석의 의석을 가져갔다. ‘박근혜’라는 브랜드가 갖고 있는 대중적인 표의 흡인력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때부터 2010년 8월21일 두 사람이 만나 ‘이명박 정부의 성공과 정권 재창출’에 합의하기까지 2년 반 넘게 갈등은 계속된다. 만날수록 간격이 좁혀지기는커녕 갈등이 더 커지곤 했다. 참 이상한 관계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2009년 12월1일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가 두 달여 만에 만났다. 이 대통령은 이날 오후 방한 중인 라슬로 솔욤 헝가리 대통령을 위해 청와대에서 마련한 국빈 만찬에 박 전 대표를 초청했다. 당시 정치권의 최대 현안이었던 세종시 문제를 놓고 이견을 보이고 있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지가 관심사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가벼운 인사말만 주고받고 헤어졌다. 별도 대화는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박 전 대표는 2009년 9월 이 대통령이 꺼내든 ‘정운찬 총리’ 카드와 2010년 8월 ‘김태호 총리 후보’ 카드를 자신을 견제하려는 의도로 받아들였다. 친이계가 자신의 대항마를 키우려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결국 정운찬·김태호 두 사람은 2010년 8월 대열에서 낙마했다. 정운찬은 세종시법 수정안 사태 후폭풍으로, 김태호는 각종 구설에 휘말리며 스스로 총리 후보직을 사퇴했다.

2010년 6월 박 전 대표는 직접 본회의장 반대 토론에 나서며 세종시법 수정안을 저지시켰다. 정운찬 총리를 내세워 강력하게 수정안을 밀어붙였던 이 대통령이 현실적인 힘의 한계를 느꼈을 만한 사건이었다. 수정안 부결 직후인 2010년 7월16일 이 대통령은 정진석 전 의원을 정무수석으로 임명했다. 임태희 대통령 비서실장, 백용호 청와대 정책실장, 홍상표 홍보수석 등도 새로 청와대에 들어왔다. 정진석 수석은 평소 “차기는 박근혜로 가는 것이 순리”라고 말해왔다. 세종시 수정안을 반대했던 그는 박 전 대표는 물론 이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 박 전 대표의 동생인 박지만씨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비밀리에 이명박-박근혜 회동을 추진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야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정 수석이 노력한 결과물이 두 사람 관계의 분수령이 된 2010년 8월21일의 회동이다. 이날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는 ‘이명박 정부의 성공과 정권 재창출을 위해’ 힘을 모으기로 합의했다. 이후에도 이런저런 갈등은 있었지만 이날 만남은 긴 갈등에 점을 찍은 사건이었다.

박, “MB 출당” 참모들 건의 안 받아들여

회동 후 이 대통령 쪽을 비난해왔던 친박계 인사들은 더 이상 비판을 하지 않았다. 이날의 만남 이후 박 전 대표가 이 대통령과 각을 세운 것은 2011년 3월 정부의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에 관해 “국민과의 약속을 어겨 유감이다”라고 말한 것 정도다. 이 대통령 임기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여권 내에서 박 전 대표의 위상은 날로 높아가고 덩달아 신조어들도 진화했다. 박 대통령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친이에서 친박으로 넘어온 월박(越朴), 상대적으로 친박 성향이 덜한 범박(汎朴), 원조 친박이라고 해서 원박(元朴), 중립 성향이지만 박 대통령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해서 호박(好朴) 등의 용어가 정치권에 떠돌았다.

2012년 총선에서는 미래 권력의 힘을 보여주듯 친이계 인사들이 공천에서 많이 탈락했다. 박 전 대표는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후인 2012년 9월2일, 8개월여 만에 이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만났다. 50분간의 만남에서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대화를 나누었다. 일각에서 제기된 ‘청와대의 안철수 지원설’을 잠재우고 신뢰 관계를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이명박 정권 말기에 특임장관을 지낸 고흥길 전 의원은 “두 분 사이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그렇게 나쁜 관계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임기 말 당을 탈당하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이다. 박 전 대표는 대선 때 “이 대통령을 출당시켜야 한다”는 일부 참모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지난 대선 과정에서 ‘3가지 실험’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현직 대통령 공격하지 않기 △지킬 수 없는 약속 하지 않기 △언론의 자율성과 독립성 인정 등이다. 이명박-박근혜, 두 사람의 대선 밀월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2012년 12월19일, 박 후보는 51.55%의 득표율로 1577만여 표를 얻어 1469만여 표를 얻은 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108만여 표 차이로 누르고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이 되었다.   

*다음 호에는 'MB, 독도 전격 방문 내막'편이 이어집니다.

Series) MB권력 막후 5년


#1.  드디어 피바람이…“당신 주변엔 빨갱이가 왜 이리 많아”
- 이상득·박영준 등 TK의 권력 장악 시나리오…허망하게 무너진 정두언 ‘한 달 천하’



#2. 함께 가자더니 하루아침에 배신을…”
- 이재오 향한 정두언의 분노…TK는 ‘55인의 반란’ 초기에 진압


#3. 읍참마속(泣斬馬謖) 후 노무현 세력 척결 나서다
-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MB 집권 첫해 중심 못 잡고 허둥지둥


#4. 봉하마을 향하는 칼끝 최종 타깃은 노무현
- 진보 단체 돈줄 색출…‘박연차 게이트’ 광풍 몰아쳐


#5. MB 검찰, 지관 총무원장 계좌 뒤졌다
- 노발대발한 총무원장, 불교계 총동원령 내려


#6. 한상률의 배신, 노무현 등에 비수 꽂아
- TK 세력과 손잡고 ‘정치성 세무조사’…부하의 보복에 자신도 거꾸러져


#7. 이상득은 친인척 관리 대상 위에 있었다
- MB도 어쩌지 못하는 ‘궐 밖 권력’ 김윤옥 여사와 SD 부인 최신자씨 간 갈등도


#8. ‘대군’들의 밀약, 촛불에 한 줌 재로 사라져
- 전·현직 대통령 ‘형님’들 핫라인…2007년 대선 전후 가동


#9
. 검찰 수사 나서며 회장 퇴진 압박
- ‘왕차관’ 박영준, 핵심 인사들 면접 보듯이 일일이 접촉


#10. 웃음 뒤에 감춰둔 ‘비수’는 예리했다
-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불편했던 MB-박근혜 “실제 둘 관계 나쁘지 않다”는 얘기도


#11. 암호명 ‘동해 일출’ “VIP를 독도로 모셔라”
- 김효겸 전 청와대 비서관이 전하는 이명박 정권 뒷얘기


#12. 정권 실세들 떡고물 챙기려 ‘4대강’ 기웃기웃
- MB, 2008년 6월 ‘대운하 포기’ 언급 이후에도 논란 이어져


#13. 정권 끝날 때까지 “믿을 건 내 사람뿐”
- MB 정권, 사정·정보·인사 등 핵심 라인 ‘고대·영남’ 출신 독식


#14. ‘박근혜 대항마’, 날개도 못 펴고 스러지다
- 정운찬의 총리 취임 직전 즉흥적 ‘세종시 수정안’ 한마디로 권력 쟁투 가열


#15. 요란한 구호 속 한몫 챙기기 바빠
- 5년 내내 ‘동반 성장’ ‘녹색 성장’ ‘중도 실용’ ‘공정 사회’ 등 키워드만 난무


#16. 궐 밖에선 최고 권력자였지만…
- MB 정권 실세의 상징 ‘6인회’ 멤버, 잇따라 몰락의 길 걸어


#17. 실세들이 설친 자리엔 빚더미만 남아
- MB 정권 ‘자원 외교’, 공기업들에 수조 원대 부채 떠안겨


#18. KT·포스코는 정권의 전리품
- 민간 기업을 낙하산 집합소로 만들어…버티면 검찰권 동원해 압박


#19. 정운찬·김태호·오세훈 제 무덤 파거나 포격에 무너져
- 실패로 끝난 MB의 ‘후계 프로젝트’…‘박근혜 대항마’ 부각되기도 전 좌초


#20. 강남 ‘큰손’ 부동산업자에게 땅 비밀 거래 꼬리 잡히다
- 시사저널, ‘내곡동 사저 단독 공개’로 MB 정권 강타…특검도 의혹 해소 못해


#21. 거물들 모셔왔으나 성과 없이 내리막길
- ‘친기업주의’ 정책 펼치며 해외 유명인들 영입…권력 내부에서는 균열 조짐


#22. 잇단 북 도발에 ‘병역 면제 정권’ 조롱
- 천안함·연평도 사태로 ‘안보 무능’ 드러나…컨트롤타워 부재 따른 혼선에 지지율 뚝


#23. ‘MB맨’ CEO들 빚더미 안기고 퇴장하다
- 지난 정권 5년간 공기업 부채 244조원 증가…4대강 사업 등에 돈 쏟아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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