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호야, 보고 싶다”
  • 이장호│영화감독 ()
  • 승인 2013.10.02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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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이장호가 말하는 소설가 최인호…초등학교 시절부터 단짝

서울 덕수국민학교를 다녔을 때다. 월요일 아침이면 전교생이 작은 운동장에 모여 조회를 했는데 교장선생님이 전국백일장대회에서 장원을 한 학생 이름을 불렀다. “최인호!”

잠시 후 거짓말처럼 아주 조그만 애가 교단 위로 올라가 교장선생님 앞에 당돌한 모습으로 섰다. 상품과 표창장이 주어졌다. 우리는 모두 박수를 쳤다. 이런 일이 벌써 몇 번째일까?

백일장이 열렸다 하면 장원은 최인호였다. 최인호는 나와 같은 학년이었다. 그러나 덕수국민학교는 오직 중학 입시에만 관심을 갖고 있어서 백일장 글짓기의 장원은 학생들의 뇌리에서 곧 사라지고 말았다.

서울중학교를 다녔을 때다. 1학년 1반. 최인호는 제일 앞줄에 앉아 있었다. 나는 제일 뒷줄에 앉아 있었다. 어느 날 국어 시간에 임상흠 선생님은 지난 시간에 우리가 제출한 작문 가운데 우수한 글을 발표하게 했는데 최인호 순서였다. 모두 귀가 쫑긋해 집중하고 있었다. 킬킬거리는 놈도 있었지만 대부분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중학교 1학년 학생의 글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연애소설이었다. 다 들은 후 선생님이 따지듯이 물었다.

“이거 진짜 네가 쓴 글이니?”

“물론이죠.”

1975년 이장호 감독과 지인들이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고 최인호 작가의 집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부터 이 감독의 동생이자 배우인 이영호씨, 촬영기사 박장하씨, 이장호 감독, 최인호 작가, 영화배우 이영옥씨, 이 감독의 선배인 카피라이터 이만재씨. ⓒ 이장호 제공
서울고 시절 담배 피우던 키 작은 아이

임상흠 선생님은 아무래도 미심쩍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다음 학생 순서로 넘어갔다. 그 꺽다리 꾸부정한 임상흠 선생님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최인호를 변호했다.

‘선생님 그 애는 초등학교 때부터 글짓기 선수였습니다.’

서울고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우리는 가끔 수업이 끝나면 태평로 덕수궁 뒤쪽, 성공회 성당의 정원 으슥한 곳에 숨어서 담배를 피우곤 했다. 그때까지 최인호가 모범생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나는 의외로 불량 학생처럼 담배를 태우는 그 애의 모습을 발견하고 신기하기만 했다. 뿐만 아니었다. 더욱 인상적인 일은 아직도 키가 작은 그 애가 입을 꼬부려 휘파람을 능숙하게 불어재꼈는데 내 아버지가 좋아하는 외국 곡이었다. “Come to my garden in Italy ….”

그때 문득 최인호의 모습이 어른으로 느껴졌다. 바지통이 좁은 맘보바지라는 것이 유행할 때여서 내가 어머니 몰래 재봉틀로 바지통을 줄여 입고 교칙을 위반해가며 불안하게 학교를 다니던 꼬락서니에 비하면 5년 위인 형의 교복을 물려받아 항상 자기보다 큰 옷으로 후줄근해 보이는 최인호의 넉넉한 모습과 그날의 휘파람 소리는 오래오래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런 최인호는 아니나 다를까, 고등학교 2학년 때 마침내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해 그 천재성으로 다시 한 번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최인호의 소년 시절은 사람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이 애늙은이로, 깜찍한 앙팡테리블로, 조숙한 시절을 외롭게 보냈을 것이고, 청년이 된 최인호는 가난과 야망과 조바심 속에 질풍노도의 시절을 대학 입학, 군 입대, 제대, 연애, 결혼으로 분주하게 보냈다.

내가 최인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은 조감독 시절이었다. 전화를 걸어 내가 영화판에서 고생한다고 내 존재를 알렸을 때 인호는 껄껄 웃으면서 도인처럼 말했다.

“네가 고생이 많겠구나. 장호야, 내가 고등학교 때 장래 희망이 무엇인가 알려줄까? 영화감독이었지.”

그 자리에서 나는 인호 앞에 기분 좋게 무릎을 꿇고 그의 수제자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최인호의 글씨는 무지무지한 악필이다. 올챙이처럼 꼬물거리는 그의 자필을 익히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갔고 이윽고 해독의 경지에 이르자 인호는 대학 노트에 연필로 빼곡하게 적은 그의 습작들을 보여주었다. 감동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한국소설은 김승옥 형의 단편소설 외에는 거들떠보지 않는 편식주의자여서 러시아·프랑스·독일·영미 소설에 흠뻑 빠져 있다가 최인호의 한글 문장을 보자 첫눈에 반해버렸다.

얼마 후 최인호를 여관방에 초대해놓고 시나리오를 부탁했다. 제대 후 복학과 휴학을 거듭하며 어렵게 살고 있던 최인호는 지금 미망인이 된 아내 황정숙 여사와 열애 중이었다. 그녀는 직장이 있었고 돈 없는 최인호에게 유일한 생계의 후원자였다. 그런 그에게 원고료도 지불하지 않으면서 장밋빛 환상을 심어 여관방에 가둬놓고 시나리오를 쓰게 하는 나 또한 대책이 없는 백수건달이었다.

이장호 감독 ⓒ 시사저널 임준선
“인호는 늘 앞서가는 개척자”

시나리오가 완성돼 여관을 나올 때 모자라는 여관비와 마지막 점심을 최인호의 애인 황정숙의 도움을 받으며 눈물 없이 먹지 못하는 짜장면을 나는 뻔뻔스럽게 체험했다. 그 시나리오 <이제 더 힘찬 포옹을>은 통일 염원을 주제로 하는 멜로 드라마였지만 나의 무능으로 끝내 영화가 되지는 못했다.

내 인생에서 최인호는 친구라기보다 늘 앞서가는 개척자였고 그 개척의 수혜자는 나였다. 그가 가난하면서도 대책 없이 결혼하자 나도 대책 없이 뒤따라 결혼했다. 그리고 그가 첫딸을 낳았고 나도 뒤이어 딸을 낳았다. 또 인호가 아들을 보자 나도 아들을 보았다. 그가 신문 소설 <별들의 고향>으로 혜성같이 등단한 인기 작가로 변신했고, 그의 후광을 입고 나도 영화 <별들의 고향>으로 어느 날 신데렐라와 같은 젊은 인기 감독이 되었다.

인호가 타계한 지금, 젊은 시절 이후론 그와 함께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오랜 세월이 어느새 덧없이 지나갔음을 돌이켜보게 된다. 내가 가난에서 벗어났고 제법 자리를 잡아 최인호의 배려에서 벗어난 때문이었을까? 인호는 제멋대로 살아가는 내 모습을 보며 씁쓸한 심정은 아니었을까? 언제나 앞서갔던 최인호는 나보다 먼저 사후의 세계로 들어섰다. 이제 내가 뒤따르는 순서가 되었다. 어느 날 어쩐지 꿈을 오래 꾸면서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날이 오면 거기에 최인호가 따뜻한 미소로 나를 맞아 그곳에서도 선배로서 최인호와 깊은 얘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다. 고마워!!! 인호야. 2013년 9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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