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낯의 ‘진짜 엄마’가 되다
  • 이은선│<매거진M> 기자 ()
  • 승인 2013.10.08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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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성폭력 소재 영화 <소원>에서 열연한 엄지원

엄지원은 <소원> 촬영장에서 늘 민낯이었다. 급하게 대충 묶어 틀어 올린 머리,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 아무렇게나 주워 입은 듯한 옷차림을 하고. 여배우가 아무런 치장도 없이 카메라 앞에 선다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배우들은 민낯으로 연기하는 것을 발가벗겨진 채 연기하는 기분에 비유하기도 한다. 기어이 그것을 감행할 만큼, ‘진짜’를 보여주고 싶다는 엄지원의 열망은 간절했다.

<소원>은 아동 성폭력을 소재로 하지만 그 자체를 자극적으로 묘사하는 데는 관심이 없는 영화다. 오직 그 가족이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사려 깊게 그린다. 엄지원은 끔찍한 일을 당한 아홉 살 소원(이레)의 엄마 미희를 연기한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세상 모든 엄마의 마음 대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듯 찾아온 불행을 마주한 사람의 표정이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입혀진다.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는 고통을 안고 딸 앞에 선 여자. 미희는 분노하고, 오열하고, 잠든 딸의 머리맡에서 서성인다. 세상 모든 엄마의 마음을 대변한 그 모습에 보는 이의 마음이 미어진다.

2년 전 처음 <소원>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만 해도 엄지원은 정중히 역할을 고사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실력이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이야기와 역할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연기하는 순간만큼은 그 과정을 즐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도저히 미희의 감정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엄지원이 말하는 ‘진짜’란, 이야기의 진정성만큼이나 배우의 연기 또한 진심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배우가 인물의 감정을 견디지 못한다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어차피 연기란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해서 그럴싸하게 보여주는 것이지만, 자신을 완전히 지우고 그 인물에 동화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달리 보일 수밖에 없다. 엄지원은 “그저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연기’는 하기 싫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2년 사이 엄청난 자신감이라도 생긴 걸까. 이에 대해 엄지원은 아주 진솔한 답변을 내놓는다. “솔직히 2년 사이에 내 연기력이 얼마나 늘었겠나. 그런 건 아니다. 다만 한번 해볼까? 진짜처럼? 그런 용기가 조금 더 생긴 것뿐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 엄지원에게 다시 한 번 출연을 권유한 이는 그와 친분이 있던 배우 송윤아다. 설경구가 소원의 아버지 동훈 역으로 출연을 결정하면서 엄지원을 직접 설득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 사이 엄지원은 김수현 작가의 가족극 <무자식 상팔자>(2012~13년, JTBC)에서 호평을 받고 있었다. 2년 만에 다시 받아들게 된 시나리오를 보고, 그제야 엄지원은 ‘어차피 내게 올 작품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영화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의 순간도 있지만 밝고 희망찬 기운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다. 미희가 다시 씩씩하게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을 때, 딸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따뜻하게 배려할 때, 가족을 위해 억척스럽게 생계를 다시 이어가려 할 때, 이 모든 순간은 일말의 어색함도 없이 고스란히 ‘미희의 일상’으로 영화에 투영된다. 거기엔 엄지원이 없고 미희만 있다. 엄지원의 연기가 ‘진짜’가 된 순간들이다.

엄지원은 그동안 연기력으로 이렇다 할 지적을 받은 일은 없다. 그는 극 안에서 늘 제몫을 다 했다. 그러나 특별히 인상적인 작품을 꼽기는 어려웠다. 무난함. 그것이 엄지원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던 것이다.

엄지원 역시 이것을 시원하게 인정한다. “내 연기 멘토이자, 가장 좋은 친구이자 엄마, 김해숙 선생님이 예전에 그러셨다. ‘너는 뭘 해도 엄지원이야. 연기를 딱히 못한 작품은 없는데 보고 나면 죄다 엄지원이란 말이야. 너 그거 문제 있다고 생각하지 않니?’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익숙한 습관들을 다 버리고 연기하는 걸 어색해했다. 내게 익숙한 것들과 적당히 타협해왔던 것이다.”

단단한 배우로 거듭나겠다는 소원 풀어

<소원>이 엄지원에게 특별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이 영화는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은 첫 번째 작품이다. 엄지원은 “다음에 또 이렇게까지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동안 남자 배우를 든든하게 보조하는 역할에만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았음을 상기할 때, <소원>의 엄지원은 확실히 다르다. 배우들의 연기가 조금만 삐끗했더라도 이 영화는 자극적인 소재를 내세워 관객의 공분만 조장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엄지원은 기어이 영화를 현실에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역할을 해낸다. 그를 통해 관객은 안타깝다가, 화가 치밀다가, 다시 진심으로 소원이네 가족의 상처가 곱게 아물기를 소망하게 된다.

가족이 절망을 극복해가는 과정이 보기에 따라서는 예쁜 동화나 판타지 같다는 말에, 엄지원은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난 이 영화가 그리는 위로의 방식이야말로 정답이라고 본다. 길에서 사람이 넘어지면 ‘많이 아프지?’라며 붙잡아줘야지 ‘그러게 누가 넘어지래?’라고 하는 건 잘못된 것 아닌가? ‘현실에서는 절대 이렇게 착한 방식으로 타인을 위로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건, 사회가 그만큼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소원>을 거친 엄지원은 한층 단단한 배우가 됐다. ‘진짜’를 보여주는 법. 그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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