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본능’은 잊어주시라
  • 이은선│<매거진M> 기자 ()
  • 승인 2013.10.16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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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를 사랑한 남자> 주연 맡은 마이클 더글러스

<쇼를 사랑한 남자>의 두 주인공은 모두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과 작업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횟수로만 보면 맷 데이먼이 한 수 위다. 그는 <오션스> 시리즈를 비롯해 이 영화까지 총 일곱 편을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과 작업했다. 이에 비하면 마이클 더글러스는 조촐한 편이다. 그는 13년 전 <트래픽>(2000년)에서 소더버그 감독을 만났고, 극 중 마약 단속반을 진두지휘하는 불도저 같은 인물을 연기했다.

당시 소더버그 감독이 마이클 더글러스에게서 남들이 보지 못한 독특한 면모를 발견한 모양이다. 10여 년이 흐른 어느 날, 소더버그가 느닷없이 더글러스에게 “리버라치를 연기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으니 말이다. 이 질문을 받자마자 마이클 더글러스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이 양반이 지금 나를 놀리나?’

ⓒ 티브로드폭스코리아
나이 초월한 섹시함 선보인 남자

리버라치가 어떤 인물인지 안다면 마이클 더글러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세계적인 엔터테이너로 이름을 날린 피아니스트다. 화려함은 그의 자존심이자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리버라치는 검은 턱시도를 입으면 피아노에 가려 자신이 부각되지 않을 것을 염려해 늘 요란하게 반짝이는 의상을 입고 공연했다.

또한 꽃으로 장식한 화려한 촛대에 불을 밝혀 무대를 장식했다. 언제나 화려한 엔터테이너였던 만큼 그의 이면에는 철저하게 감춰진 사생활이 존재했다. 언론에 알려진 리버라치는 평생 운명의 여인을 기다리며 피아노에만 매진하는 ‘순정남’이었지만, 사실 그는 화려한 연애 편력을 자랑하는 동성애자였다. 유명 인사는 오직 사적으로만 동성애자여야 했던 시절이다. 1950년대에는 그가 동성애자라는 기사를 실은 한 언론 매체가 고소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리버라치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성정체성을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영화의 원제는 <비하인드 더 캔들라브라(Behind the Candelabra)>. 무대 위에서 빛나기 위해 가려졌던 리버라치의 개인적인 시간들을 건져 올리는 데 ‘화려한 촛대 뒤’라는 표현은 꽤 적절해 보인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리버라치의 연인이었던 스콧 토슨의 회고록에서 제목을 그대로 가져와 사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는 스콧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원제가 리버라치와 스콧 두 사람 모두를 포괄한다면 한국 개봉명인 <쇼를 사랑한 남자>는 리버라치 쪽에 좀 더 무게감이 실린다.

스콧을 연기한 맷 데이먼의 금발 머리와 성형수술 분장도 데뷔 이래 가장 파격적인 모습이긴 하다. 하지만 리버라치로 분한 마이클 더글러스에 비할 바는 아니다. 특유의 지적이고 날카로운 눈매는 온데간데없고, 온화한 표정으로 나긋나긋하게 말을 건네는 그의 모습은 파격이라는 단어로도 한참 모자란다. <월 스트리트>(1987년)에서 “탐욕은 좋은 것”이라고 말하던 젊고 매력적인 ‘청년 더글러스’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모습일 테다. <위험한 정사>(1987년)나 <원초적 본능>(1992년) 같은 과거 작품부터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2010년) 같은 최근 작품까지 탐욕스럽거나 날 선 인물을 연기하며 나이와 상관없는 섹시함을 풍기던 더글러스가 아닌가.

물론 탐욕스러움이라면 <쇼를 사랑한 남자>의 리버라치에게도 있다. 금발의 젊은 청년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애정이 그것이다. 현실의 리버라치는 금발의 아름다운 청년들을 사랑했으면서도 그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영화 속 리버라치는 그들을 안고 침대에서 뒹구는 모습을 관객에게 모두 드러낸다.

열정 불태운 뒤 모든 것 내려놓다

그러나 리버라치로 분한 마이클 더글러스의 연기를 단순히 파격의 차원에서만 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알려진 바와 같이, 마이클 더글러스는 2010년 인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이 영화는, 다시는 촬영 현장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던 그가 힘겨운 투병 생활을 끝내고 선택한 복귀작이기도 하다. 돌아온 그에게서는 이전에 없던 기운이 느껴진다. 그건 삶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후 세월을 조용히 내려놓는 시간을 거쳤던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깊이다.

우리는 이 영화의 마이클 더글러스를 통해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쇼맨’도 만나지만, 대머리에 늘어진 군살들을 주렁주렁 단 채로 청년의 탄탄한 육체와 화사한 젊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노쇠한 남자 역시 만나게 된다. 거기에는 젊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스크린을 장악하던 화려한 세월들이 촛불 뒤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던 한 배우의 애수가 어려 있다.

결국 마이클 더글러스가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건, 아주 보편적인 관계와 사랑에 관한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리버라치와 스콧의 외모도 바뀌고 그들 사이의 관계도 변한다. 영화에는 사랑에 빠지고, 서로가 세상의 전부가 되고, 열병이 식고, 다시 남으로 돌아가는 그 모든 ‘관계’의 순간이 마이클 더글러스의 몸과 목소리를 빌려 섬세하게 새겨진다.

그가 아니었다면 소더버그 감독의 말마따나 이 영화는 단순히 늙은 동성애자가 주인공인 만화 같은 이야기에 그쳤을지 모른다. 올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영화가 공개됐을 때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이클 더글러스의 남우주연상 수상을 점쳤다. 결국 수상에는 실패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칸 국제영화제를 향한 원망스러운 뒤끝이 생겨날 것이다. 그만큼 탁월한 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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