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권력 5년 막후] #14. ‘박근혜 대항마’, 날개도 못 펴고 스러지다
  • 소종섭│편집위원 ()
  • 승인 2013.10.23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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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의 총리 취임 직전 즉흥적 ‘세종시 수정안’ 한마디로 권력 쟁투 가열

2009년 8월 중순.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지인들과 저녁을 먹고 있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하 정운찬)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학계 후배인 곽승준 대통령직속 미래기획위원장이었다. “어디 계신지, 지금 급히 찾아뵐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 뒤 곽 위원장이 찾아왔다. 그는 “대통령께서 함께 일하고 싶어 하신다”는 말을 전했다. 정운찬은 “2008년 초에 생활 물가 잡는다는 것과 대운하 추진을 비판하는 칼럼을 썼더니 대통령께서 보시고 화를 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나를 보자니 웬일인가” 하고 물었다. 곽 위원장은 “어려워서 대통령께서 연락을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곽 위원장은 정운찬을 태우고 정정길 대통령 비서실장 관저로 향했다. 정운찬을 만난 정 실장은 이명박(MB) 대통령의 뜻이라며 국무총리직을 제안했다.

MB, 정운찬에 서울시장 출마 강력히 권유

2~3일 고민하던 정운찬이 총리직 제의를 수락할 뜻을 굳혔을 무렵, 정 실장으로부터 다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다시 만난 자리에서 정운찬은 “나 이외에 또 누가 인사안에 올라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언론에 여러 명의 이름이 총리 후보로 오르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 실장은 “단독 추천이니 이 자리에서 매듭을 지읍시다”라고 말했다.

2009년 11월17일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정운찬 총리와 에너지 절약의 일환으로 입은 조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정운찬은 왜 총리직 제의를 수락했을까? 10월16일 필자와 만난 정운찬 전 총리는 이렇게 증언했다. “이념의 시대는 지났다. 당시는 이 대통령이 중도 실용의 기치를 들고 ‘서민을 따뜻하게, 중산층을 두텁게’라는 구호를 내걸었을 때다. 나는 양극화 현상을 완화시키겠다는 욕심이 있었고, 경직된 남북 관계를 유연하게 만들고 싶었다. 경제학자로서 경제 위기 극복에 일익을 담당하고, 우측으로 치우친 정책을 중도 개혁 노선으로 끌어당기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뜻을 받들 수 있다면, 그것도 우리 사회에 봉사하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갑작스럽게 경제 위기가 닥치지 않았더라면, 나날이 국민들과 유리되는 대통령과 내가 한 배를 탈 일도, 타고 싶은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정운찬과 MB는 그전부터 이런저런 인연이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인사를 나눈 것은 2002년 7월이다. 정운찬이 당시 서울시장으로 있던 MB에게 면담을 신청해 만나게 됐다. 서울시는 간선도로 신설 계획을 확정하면서 서울대 정문 앞에 100m가 넘는 고가도로를 설치하기로 방침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에 대해 서울대는 대학 발전에 지장이 있고, 학생이나 교직원들의 통학과 통근에도 불편할뿐더러 미관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며 반대하고 있었다. 고건 전 서울시장 당시 확정한 계획인데, 이미 1000명 가까운 교수들이 반대 서명을 한 상태라 신임 서울시장인 MB에게 반대한다는 뜻을 전하기 위한 자리였다. 양쪽 간부들이 배석한 가운데 이뤄진 두 사람의 첫 만남은 화기애애했다. MB는 “(고가도로 설치를) 재검토해보라”고 지시했다. 그 후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정운찬이 마련한 저녁 자리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어릴 적 추억 등을 반추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공통점이 있는 두 사람이 대화의 공통분모를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지인들과 식사를 함께 했다.

2010년 6월29일 국회 본회의에서 세종시 수정안과 관련해 박근혜 전 대표가 표결에 앞서 5분 발언을 하고 있다. ⓒ 시사저널 포토
MB-정운찬 독대, 세종시 언급 일절 없어

이런 인연 때문일까. MB는 정운찬에게 호감을 가졌다. 2006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자신의 후임으로 서울시장직에 도전하라고 권했다. 정운찬은 아직 서울대 총장 임기를 마치기 전이라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완곡히 거절했다. MB는 집요했다. 사람을 보내도 정운찬이 뜻을 굽히지 않자 몇 차례 전화를 하고, 직접 만나 설득했다. “당신은 경제 전문가 아닙니까. 그중에서도 화폐경제학을 했잖아요? 앞으로는 금융 시대입니다. 부동산 시대는 갔어요. 서울시를 국제 금융 허브로 키워야 하는데, 우리나라에 정 총장만 한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서울대 총장의 임기를 반드시 채우겠다고 공약한 정운찬으로서는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MB는 다시 한 번 정운찬에게 요청했다. 선거운동을 지휘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운찬은 대선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MB의 메신저 역할을 한 인사는 “후보님이 대단히 섭섭하게 생각하고 계세요”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MB는 인수위원회를 구성하면서도 정운찬에게 인수위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했다. 2008년 4월 총선을 앞두고는 안강민 당시 공천심사위원장이 정운찬을 찾아왔다. “대통령의 뜻이니 총선에 출마해달라. 여럿이 같이 와 달라”고 했다. 물론 정운찬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무총리직 제의’는 MB가 정운찬에게 한 다섯 번째 제안이었다.

정운찬 전 총리는 당시 총리직 제의를 수락하면서 ‘대통령’을 꿈꿨던 것은 아닐까. 이미 그가 서울대 총장에 선출되면서부터 ‘정운찬 대망론’이 많이 퍼져 있던 상태였다. 이에 대해 정 전 총리는 단호하게 ‘NO!’라고 했다. “나는 사회로부터 도움을 받아 성장했고 생활했다. 빚진 것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봉사를 하기 위해서 총리직을 수락했다. 이후에 무엇을 하겠다, 무엇이 되겠다는 등의 생각은 전혀 없었다.”

2009년 9월3일 목요일, 정운찬은 택시를 타고 청와대로 갔다. 오전 10시 MB를 독대했다. 정정길 실장이 5분 정도 배석하다 나가고 두 사람은 35분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MB : 정 총장도 서민 출신이고, 나도 서민 출신이니 우리 손잡고 서민과 중산층을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해봅시다. 국정 운영에서 경제와 외교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정 총장도 관심을 많이 두시기 바랍니다(MB는 보름 전쯤인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친서민 중도 실용 정책’을 새로운 국정 지표로 제시한 뒤였다).

정운찬 : 헌법 86조 2항에 따르면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보좌기관으로서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하는 권한을 갖는다고 나와 있습니다. 할 말을 하겠으니 최대한 들어주십시오. 밖에 나가서 떠들고 다니지는 않겠습니다.

이날 두 사람의 대화에서는 세종시의 ‘세’ 자도 나오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정운찬 전 총리가 당시 총리로 내정된 직후 ‘세종시 수정안’을 언급한 것을 두고 ‘사전에 MB와 짜고 친 것 아니냐’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MB를 비롯한 여권 핵심부에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정 전 총리가 총리로 내정되는 과정에서 세종시와 관련해 사전에 입을 맞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정 전 총리는 “총리가 되기 전에 내가 어떤 미션을 받고 간 것은 아니다. 항간에는 대통령의 지침을 받고 내가 대신 총대를 멘 것이 아니냐고 오해하는 분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독대 시간 내내 그 문제는 일절 거론된 적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국무총리 시절 정운찬이 MB에게 ‘할 말은 한’ 사례 중 대표 격은 4대강과 관련한 것이다. 대운하를 반대한 정운찬은 4대강 사업에 대해서는 기본 방향이 옳다고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 내용은 대략 이랬다.

정운찬 : 4대강 사업과 관련해 규모와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MB : 정 총리, 무슨 말이오?

정운찬 : 2개 강 정도를 먼저 공사하고 나머지는 다음에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어차피 대통령님의 업적으로 남습니다.

MB : 영산강을 먼저 하면 경상도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또 낙동강을 먼저 하면 전라도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정 총리, 물 사업에 대해 압니까?

정운찬 : 모릅니다.

MB : 상류 공사를 하다가 중단하고 하류 공사를 하다가 중단하고 이러면 공사 날아갑니다. 한 번에 해치워야 합니다.

정운찬이 청와대에서 MB와 독대를 마치고 나오니 정정길 비서실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 실장은 수석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가서 차나 한잔하자며 정운찬을 이끌었다. 이동관 홍보수석비서관과 박형준 정무수석비서관이 있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였던 정운찬은 그날 오후 자신이 맡고 있던 ‘경제학연습2’의 마지막 강의가 예정돼 있었다. 정운찬은 “학교에 가면 기자들이 와 있을 텐데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하고 청와대 참모들에게 물었다. “사진 찍고 질문 한두 개 받으시죠.” 누군가가 대답했다.

2009년 9월7일 정운찬 국무총리 내정자가 서울대 교수직 사의를 표명하고 학교를 나서고 있다 . ⓒ 시사저널 포토
‘세종시’ 질문 예상 못해 정국 격랑 속으로

당시 상황에서라면 ‘세종시’ ‘4대강’ 등에 대한 질문이 나올 것이 뻔했다. 게다가 정운찬은 충청도(충남 공주) 출신이 아닌가. 그러나 이날 자리에서 “그런 질문이 나오면 대략 이런 식으로 대답하시죠”라고 말한 참모는 없었다. 이 한 번의 판단 실수, 정무 감각의 부족은 이후 여권에 큰 짐이 됐다. 예정에 없던 ‘세종시 정국’ 격랑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정책을 추진하느냐, 수정하느냐의 차원을 넘어 여야 간, 여권 내 세력 간 권력 쟁투로 이어졌다. 여권의 분열을 가속화했고 한편으로는 여권 내에서 ‘박근혜 권력’이 강해지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역사에 우연은 없다지만 만약 이때 참모들이 “그런 질문이 나오면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도로 대답하시지요”라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여권은 아마 좀 더 시간을 갖고 분위기를 조성한 뒤 치밀한 계획하에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했을 것이다. 그래서 수정안이 통과됐다면? 박근혜 대권 전선에도 변화가 왔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MB는 정운찬을 ‘박근혜 대항마’로 염두에 뒀던 흔적이 엿보인다. 이명박 정권에서 고위직을 역임한 한 인사는 익명을 전제로 “정운찬의 총리직 내정을 앞두고 MB와 정운찬이 독대한 자리에서 MB는 ‘미래 지도자들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똑 부러지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미래 지도자’라는 말로 에둘러 정운찬의 대권 후보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이 인사는 정운찬 그리고 뒤이은 김태호 등의 총리 후보 내정은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묻자, 정운찬 전 총리는 빙그레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서울대로 돌아온 정운찬은 마지막 수업을 마친 후 강의실 밖에서 기다리던 기자들과 즉석 회견을 했다. KBS 기자가 “행정복합도시(세종시)를 원안대로 추진할 의지가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정운찬은 “행정복합도시는 경제학자인 제 눈으로 보기에 아주 효율적인 플랜은 아니다. 이미 계획을 발표했고 사업도 많이 시작했기 때문에 원점으로 돌리기는 어렵지만, 원안대로 다 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 원안보다 수정안으로 가지 않을까 본다. 정부 부처를 분할하는 것은 행정의 효율성에 문제가 있다”고 답했다. 평소 자신의 소신을 진솔하게 밝힌 멘트였다. 회견장은 술렁였고 바로 ‘정운찬 총리 내정자 세종시 수정안 추진 시사’ 운운하는 속보가 뜨기 시작했다. 뒤이어 ‘충청도 출신인 정 총리가 세종시 안 수정의 총대를 멨다’ ‘세종시 수정으로 정 총리를 대권 후보로 키우겠다는 게 이 대통령의 생각’이라는 등의 보도가 쏟아졌다. ‘세종시 정국’의 시작이었다.

이동관 홍보수석 등 청와대 일부 참모가 정운찬 총리 내정과 관련해 “여권 내부는 물론 정치권 전반의 구도에도 상당한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며 ‘대권 후보’ 운운한 것이 기름을 부었다. 여권 내에서 이른바 ‘친박근혜 세력’은 MB의 ‘박근혜 죽이기’가 아니냐는 의구심을 표출했다. 놀라기는 청와대도 마찬가지였다. 느닷없이 ‘세종시 수정안 추진’이 빅뉴스가 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박형준 정무수석비서관은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뉴스로 정 총리의 세종시 수정 발언을 듣고 깜짝 놀랐다. 세종시 수정은 총리가 된 다음 과학비즈니스벨트 등 대안을 마련해놓고 조심스럽게 추진해야 했다. 여당 내 역학 구도도 생각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였다. 그런데 정 총리가 그런 계산 없이 기자 질문에 불쑥 말해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일이 꼬였다.”

MB에 국민투표 건의했으나 수용 안 돼

정운찬 전 총리는 그때 일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후회하지 않는다. 정직한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내 생각을 얘기했던 것이다. 결국에는 옳은 길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종시를 기업·교육·과학·문화 도시로 만드는 것이 좋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여권 핵심부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박근혜 전 대표는 2009년 10월23일 정부의 세종시 수정 추진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공식 표명한다. MB에 정면 대응키로 한 것이다. MB는 그해 11월27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세종시 원안 파기를 사과하면서까지 수정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충청권 민심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박 전 대표는 “(세종시 수정안이) 당론으로 확정돼도 수용 못한다. 어떤 경우에도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화합도 된다. 원안이 배제된 수정안에 반대한다”며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다. 이때부터 충청권 민심은 세종시를 공약으로 내건 민주당보다 ‘친박근혜’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박 전 대표로서도 ‘세종시 싸움’은 자신의 대권 운명을 건 양보할 수 없는 한판 승부였다. 수정안이 통과되면 ‘정운찬 대권론’이 힘을 얻을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었다.

정운찬은 세종시 수정안을 둘러싼 논란 와중에 “국민투표가 유일한 해법이다. 국민투표를 발의하시라. 잘되든 잘 안 되든,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제가 안고 가겠다”고 MB에게 여러 차례 건의했다. 인적 구성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17대 국회에서 확정한 법안을 18대 국회에서 수정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국민의 의사에 따라 국회 결정을 번복하는 것이 헌법 정신에 맞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와대 참모들은 “국민투표에서 졌을 경우 레임덕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며 반대했다. 결국 국민투표는 현실화하지 못했다.

박 전 대표가 강하게 버티면서 세종시 수정안은 2010년 6월29일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정운찬은 ‘세종시 총리’라는 꼬리표를 단 채 그해 8월11일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조순 전 부총리는 정운찬에게 “장관을 한 번 하고 총리직을 맡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고 한다. MB는 퇴임 직전인 2013년 1월15일에야 처음으로 세종시를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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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박근혜 대항마’, 날개도 못 펴고 스러지다
- 정운찬의 총리 취임 직전 즉흥적 ‘세종시 수정안’ 한마디로 권력 쟁투 가열


#15. 요란한 구호 속 한몫 챙기기 바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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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궐 밖에선 최고 권력자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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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실세들이 설친 자리엔 빚더미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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