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집게 강사의 유혹 “1000만원 내면…”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승인 2013.10.23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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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SAT 문제 유출해 어학원에 공급하는 브로커 활개

미국의 대학 수학능력시험인 SAT(Scholastic Aptitude Test) 문제 유출 의혹이 또다시 불거져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벌써 세 번째다. 이미 한국 학원들이 SAT 출제 방식의 허점을 이용해 문제를 유출하다가 국제적으로 망신당한 일이 있다. 이로 인해 지난 5월 한국에서 치러질 예정이던 시험이 전면 취소됐다. 시험 부정 때문에 국가 전체에서 SAT가 취소된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SAT 문제 유출 의혹은 끊이지 않는다. 오히려 시험지를 빼돌리는 수법이 갈수록 대담하고 치밀해지고 있다. 이번의 경우 강남의 일부 학원이 지난 3월 미국에서 시행된 SAT 시험지를 불법적으로 입수해 수강생들에게 제공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10월5일 치러진 SAT가 당시 시험과 동일하게 출제돼 해당 학생들이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받았다는 것이다.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문제 유출

SAT는 한국의 대학 수학능력시험(수능)과 출제 방식이 다르다. 한국의 수능은 1년에 한 번 치르는데 이때 얻은 점수로 상대평가를 한다. 반면 SAT는 1년에 보통 일곱 번을 치르고, 이때 얻은 점수로 절대평가를 한다. 매년 문제가 바뀌는 한국의 수능과 달리 SAT는 한 번 나왔던 문제가 다시 나올 수 있는 문제 은행식으로 관리된다. 일곱 번 치르는 시험 중에서 세 번은 문제와 정답을 공개하지만, 나머지 네 번은 문제를 공개하지 않고 재활용하고 있다. 기출문제 유출이 불법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학원가에서는 ‘무슨 학원에서 SAT 문제를 입수해 강의한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흘러나온다. 강남의 SAT 학원이 80여 곳인데 이 중에서 10%가량이 이런 식의 강의를 하고 있다는 말이 나돈다. 학부모가 상담할 때 기출 시험지가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물불 안 가리는 학부모와 돈만 많이 벌면 된다는 일부 몰지각한 학원장 및 강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일부 학원의 SAT 과정 수강료는 상상을 초월한다. 10회에 500만원, 25회에 1000만원을 받는 식이다. 사교육 천국인 한국에서도 가장 비싼 사교육이 SAT 수강인 셈이다. 조기 유학을 갔던 학생들이 방학 때 일시 귀국해 SAT 강의를 듣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명문 대학에 진학하려면 SAT에서 고득점을 올려야 하는데 미국 고등학교에서는 문제 풀이식 교육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유학생이 미국 대학에 가기 위해 한국 학원을 다니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학벌에 목을 매는 한국 사회의 삐뚤어진 자화상이다.

SAT와 관련한 부정행위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먼저 대리 시험이 있다.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시험을 대신 봐주는 것이다. 2010년 미국 롱아일랜드에서 한 대학생이 고등학생들에게 1500~2500달러를 받고 SAT를 대신 치러준 사실이 발각돼 파문이 일었다. 이로 인해 본인 확인 절차가 강화됐다고 한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지금도 SAT 대리 시험 관련 글이 꾸준히 올라온다.

다음으로 국가 간 시차를 이용해 문제와 정답을 알려주는 수법이다. 2010년 1월 강남의 한 어학원 강사가 태국에서 시험을 본 뒤 한국계 미국 학생에게 이메일로 정답지를 전송한 사실이 적발됐다. 태국이 미국보다 12시간 먼저 시험을 치르는 점을 악용했다. 이때부터 한국·태국·베트남 등에서 SAT 관리가 강화됐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조직적으로 문제를 유출하는 유형이 있다. 여러 명이 나눠서 문제를 외워오거나 시험지를 조금씩 찢어서 갖고 나와 복원하는 방식이다. 실제 한국의 SAT 강사들이 시험지를 군데군데 칼로 오려서 갖고 나오다가 발각된 적이 있다. 최근 제기되고 있는 문제 유출 의혹의 경우 시험장에 초소형 카메라를 숨기고 들어가 몰래 찍어왔다는 얘기가 나돈다. 지난해에도 한 수험생이 윗옷 단추에 소형 카메라를 달고 시험지를 찍다가 적발됐다. 문제 유출에 첨단 장비까지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를 유출해 어학원에 공급하는 전문 브로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번에 유출 의혹을 받고 있는 SAT의 경우 학원들이 중국 쪽 브로커를 통해 시험지를 사들여 학생들에게 풀어보도록 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5월 한국에서 SAT 기출 문제들이 브로커를 통해 500만원에 거래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이유 중 하나는 문제 유출이 범죄라는 인식이 약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시험지를 빼돌려 제공하는 강사를 능력 있는 강사로 여기는 분위기는 여전하다. 족집게 학원으로 소문나면 수강생들이 넘쳐난다. 그러다 보니 잡혀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팽배하다고 한다. 한번 문제를 빼내면 큰 돈을 벌 수 있으니까 걸려서 몇 년 고생해도 남는 장사라는 것이다.

서울시 소재 SAT 학원장들이 5월28일 서울시교육청에서 문제 유출을 하지 않겠다는 자정 결의대회를 가졌다. ⓒ 연합뉴스
시험지 빼돌려야 능력 있는 강사로 여겨

문제는 일부 학원과 강사들 때문에 다수의 정직한 학원과 강사들까지 싸잡아 욕을 먹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5월 말에는 서울시 소재 SAT 학원장들이 서울시교육청에서 문제 유출을 하지 않겠다는 자정 결의대회까지 가졌다. 하지만 채 5개월도 지나기 전에 또 한 번 시련을 맞게 됐다.

더 큰 문제는 한국인 응시생들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일이 반복될 경우 한국인의 응시에 제한 조건을 두거나 한국인은 아예 시험을 못 보게 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러한 제한 조치가 없더라도 미국 대학에서 한국 학생의 SAT 점수를 불신하는 상황 자체가 피해라고 할 수 있다. 벌써부터 한국 학생의 SAT 성적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는 대학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SAT 공동 주관 기관인 칼리지보드(College board)와 미국교육평가원(ETS)은 국내 홍보대행사를 통해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신뢰할 만한 자료를 얻게 되면 철저히 조사할 것”이라고 강도 높은 진상 조사를 예고했다. 검찰에서 ETS 측에 SAT 문제와 유사한 학원 강의 교재 등을 보내 감정을 의뢰한 것으로 알려져 조만간 문제 유출 의혹의 진상이 밝혀질 전망이다. 이에 따라 또 한 번 한국인 응시생을 대상으로 한 제재 조치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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