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이 고객과 직원들 다 죽였다”
  • 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3.10.30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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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체불·분양 사기로 얼룩진 종로 ‘피맛골’…르메이에르 임원들 “정경태 회장이 주범”

말을 피하는 길. 서울 종로에 있는 ‘피맛(避馬)골’은 과거 조선 시대 서민들이 고위 관료의 행차를 피해 다니는 길이었다고 전해진다. 자연스레 서민 취향의 음식점과 선술집이 늘어섰다.

조선 시대 이래 피맛골은 서울의 서민 문화를 대표하는 장소로 꼽혔다. 그러나 이미 과거의 얘기다. 2003년 ‘청진동 도시 환경 정비 사업’이 시작되면서다. 부동산 불패 신화를 등에 업고 대규모 재개발 공사가 잇따르던 때다. 오래된 상점과 주택이 차례로 헐려나갔다. ‘서민 문화의 전통 명소’라는 상징적 가치는 개발 광풍에 휩쓸려 뭉개졌다.

서울 종로구 청진동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전경. 과거 피맛골 입구가 있던 자리다. 작은 사진은 정경태 회장. ⓒ 시사저널 구윤성
최근 3년간 임직원 임금 72억원 체불

피맛골 입구는 서울 도심의 한가운데이자 종로의 노른자위 같은 땅이다. 상당수 대기업과 건설 자본이 눈독을 들였다. 그런데 2004년 대외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건설업체 르메이에르가 시행과 시공을 따냈다. 주상복합건물 ‘르메이에르 종로타운’이다. 지하 7층에 지상 20층 건물로 연면적이 2만8000여 평에 달한다. 하지만 2007년 건물 준공 후 6년여가 지난 지금, 피맛골에서는 르메이에르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르메이에르는 종로타운 분양 당시 200억원대 사기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르메이에르는 건축 자금을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로 조달했다. 당시 종로타운을 대한토지신탁에 관리신탁하고, 분양 대금은 대한토지신탁 계좌에 입금하도록 약정했다.

그런데 분양을 진행하면서 분양 대금을 회사 계좌로 입금하도록 유도해 빼돌렸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상가 소유권을 대한토지신탁에 고스란히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다. 다른 신탁사에 얽힌 피해까지 합하면 총 피해액은 680억원에 달한다. 또 회사가 농협에서 252억원을 대출받는 과정에서 공문서를 위조해 제출하는 ‘사기 대출’을 저질렀다는 고발도 접수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르메이에르 정경태 회장이 최근 3년 동안 임직원 급여 72억원을 체불해왔다는 사실이 <시사저널> 취재 결과 확인됐다. 임직원들은 모든 사태의 중심인물로 정경태 회장을 지목한다. 회장 개인의 욕심 때문에 종로타운 분양 피해자가 생기고 임직원 등이 고통을 겪게 됐다고 주장한다.

“회사는 외형적으로는 법인이지만 사실상 철저한 개인(정경태 회장) 회사다. 1원 한 푼도 정 회장의 결재 없이는 지출되지 않는 구조다. 다른 부서 직원들 간의 교류는 상상도 못한다.” 1997년 입사해 16년간 르메이에르에서 근무한 양 아무개 전 영업본부장의 말이다.

정 회장이 회사의 모든 일을 일일이 챙겼고, 각 부서 간의 교류를 차단해 임원들마저도 타 부서의 사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영업 업무를 총괄했던 양 전 본부장은 “회사 상황이나 정보를 알게 되면 영업에 차질이 생길까 봐 모든 정보를 철저히 차단시켰다. 영업부가 회사의 어려운 상황도 모른 채 오로지 영업 실적만을 위해 노력하도록 하려는 의도였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고 주장했다.

양 전 본부장의 증언에 따르면, 정 회장은 9시30분, 11시30분, 13시30분, 15시30분, 18시 등 하루 두 시간 간격으로 비서실을 통해 각 부서장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감시했다고 한다. 그는 “휴일에도 회장이 부르면 만사를 제쳐놓고 가는 등 일반적인 기업에서는 있을 수 없는 회장의 종살이를 해왔다. 임직원들을 향한 폭행도 잦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회사와 관련한 모든 일에서 정경태 회장의 독단이 심했다는 것이다.

정경태 회장과 임원들 간 책임 공방

“다른 기업에서였다면 ‘구사대’ 노릇을 할 사람들이 지금 들고 일어났다. 회장이 임원들을 포함한 모든 직원을 다 죽인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현재 앞장서 정경태 회장과 대립하는 사람들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정 회장의 수족으로 일했던 임원들이다. 그들은 정 회장이 직원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면서도 회사의 어려움을 해결할 어떠한 가능성도 보여주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오히려 임원들에게 회사의 여러 문제에 대한 법적 책임을 계획적으로 떠넘기려 했다고 주장한다.

우선 임금 체불 건부터 보자. 르메이에르건설에선 2010년 11월부터 전 임직원에게 급여가 지급되지 않고 있다. 2009년 워크아웃에 접어든 이래 회사 사정이 극도로 어려워졌다는 이유에서다. 이라크 유전 사업, 평창 동계올림픽 선수촌 숙소 공사 수주 등을 계획하고 있으니 임직원들이 고통을 분담해달라는 취지였다. 그렇게 하루하루 흘러간 시간이 어느덧 3년여였다는 것이다. 정 회장은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임금 체불 사실을 인정하며 “도의적 책임을 통감한다. 지금도 회사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고 밝혔다.

문제는 임금 체불에 그치지 않는다. 그에 대한 법적 책임을 아랫사람에게 전가하려 한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임금 체불이 시작되기 한 달 전인 2010년 10월, 정경태 회장은 당시 전무이사였던 서 아무개씨를 대표이사 자리에 앉혔다. 서씨는 “워크아웃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된 회사에서 대표이사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그런데 정 회장이 워크아웃과 관련해 법원에 출석하거나 채권·채무 연장 등에 대표이사 직함을 갖고 참여할 것을 지시했다. 자신은 평창 선수촌 사업 추진에 전념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웠다”고 말했다.

정 회장이 이 과정에서 권한은 없이 오직 대표이사 직함만을 갖는다는 각서를 작성하게 했다는 것이 서씨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정 회장은 “각서가 조작된 것”이라며 맞서고 있다.

임금 체불이 길어지자 회사 직원들은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제기했다. 피진정인은 등기상 대표이사인 서씨였다. 결국 서씨는 피고인이 돼 형사 기소됐다.

“노동부에는 정 회장이 지시한 대로 특정 시일 전에 체불 임금을 지불하겠다고 진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약속한 시일이 지나도 체불된 임금은 지불되지 않았다. 악덕 기업주가 계획적으로 법적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최근 일부 직원은 실질적으로 회사를 운영한 정경태 회장이 임금 체불에 대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취지의 탄원서를 법정에 제출했다. 이에 대해 정경태 회장은 “법적 책임이 있다면 그것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 법이 판단하는 대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임금 체불은 임시로 대표이사 자리를 맡겨놓은 전무에게, 분양 사기는 영업본부장에게, 대출 사기는 경리이사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는 것이 임직원들의 주장이다. 정경태 회장은 반발한다. “우리 직원이 모두 600명이다. 어떻게 모든 일을 내가 다 체크하나. 자기들이 해놓고 법률적인 책임이 있을 것 같으니까 똘똘 뭉쳐 저러는 것이다. 직원들을 향해서는 (체불된) 임금 받아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들의 법률적인 책임을 피하려고 저러는 것이다.” 이에 임원들은 회사의 경영 구조상 절대 그럴 수 없는 일이라고 항변한다. 단돈 1만원을 지출하는 것도 직접 확인하고 결재하는 사람이 수십~수백억이 걸린 일을 잘 몰랐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양 전 영업본부장은 분양 사기 문제로 가장 피해를 본 게 자신들이라고 말한다. “영업부의 실적 압박이 엄청났다. 미분양된 상가도 아무 이상이 없는 것처럼, 큰 혜택을 주는 것처럼 지인에게 팔라고 지시했다. 직원들은 자기 돈을 털거나 지인의 힘을 빌려 실적을 메워야 했다. 영업부 직원과 그 지인들이 고스란히 (분양 사기의) 피해를 입었다. 이런 경우가 총 43건, 피해액이 215억원이다. 이런 우리에게 분양 사기의 책임을 덮어씌우려 한다.”

대출 사기 혐의에 대해 강 아무개 전 경리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현재 관련 혐의의 당사자로 지목돼 고발된 상태다. “세무 회계를 담당했을 뿐 회사 자금의 이동은 내 소관이 아니었다. 그건 자금부가 담당했다. 공식 회계와 실제 자금 운용 사이의 차이를 모른다는 얘기다. 나로서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정 회장은 마치 내가 자금 대출 관련 실적을 더 올리려는 충성심에서 그런 일을 저지른 것처럼 몰아갔다.” 회사의 자금 운용이 매우 불투명했다는 설명이다.

르메이에르의 한 직원이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대박’ 꿈 사라진 자리엔 절규와 분쟁만

임원들은 정 회장이 회사 자금을 횡령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강 전 이사는 “나중에 살펴보니, 10억 이상의 자금이 회사 통장으로 들어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 회장 개인의 통장으로 흘러들어간 사실이 다수 포착됐다. 그 돈이 회사 운영 자금으로 쓰였는지, 정 회장 개인의 것이 됐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고 주장했다.

양 전 본부장은 “스스로 신용불량자인 정 회장이 큰며느리나 사돈 쪽에 돈을 숨겨둔 듯하나,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을 찾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경태 회장은 “모든 돈은 법인 통장으로 들어온다. 여기서 (회사 자금을 개인이) 갖다 썼으면 횡령인 것이다. 만약 실체가 있었다면 진작 그걸 갖고 크게 떠들었을 것이다. 선동을 목적으로 한 근거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상당수 임원은 최근 회사를 그만뒀다. 바깥에서 정 회장과 싸우지 않고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재 임직원 중에는 회사의 실적 압박에 휘말려 평생 모은 재산을 날리고 엄청난 빚을 떠안은 이도 상당수라고 한다. 신용불량자, 파산 신청자도 속출했다.

전무이사로 근무했던 서씨는 “회사가 어려워도, 정 회장이 무리한 요구를 해도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회사에 돈이 물려 있었다. ‘너도 임원인데 회사가 어려우니 어떻게 좀 해보라’는데 피할 길이 없었다. 집을 담보 잡혀서, 지인에게 돈을 빌려서 10억원 상당을 회사에 부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지금의 사태를 책임져야 할 인물은 자신들이 아니라 정 회장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양 전 본부장은 “17년 동안 열심히 일한 결과가 고작 가정 파괴에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인가. 정 회장은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말했다.

피맛골의 풍경을 변화시켰던 ‘대박’의 꿈은 이미 스러졌다. 글로벌 금융 위기를 거치며 얼어붙은 건설 경기 속에서, 급격히 부실화의 길을 걸은 중견 건설사가 비극의 단초를 제공했다. 지금 거기엔 거액을 잃고 삶이 망가질 위기에 처한 이들의 절규가 있다.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두고 벌어지는 분쟁의 먼지만 자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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