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훌리건, 축구장을 점령하다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3.10.30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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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분데스리가, 그라운드 안팎에서 난동 부려도 구단은 ‘모르쇠’

독일에서 축구는 국민 스포츠다. 분데스리가 1부는 경기당 평균 4만3000명의 관중을 동원하고 있으며, 2부는 물론 3, 4부 리그도 활발하게 운영 중이다. 독일인들의 지독한 축구 사랑은 독일 축구가 월드컵 3회 우승,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등 국제 무대에서 성적을 내는 원동력이 된다.

독일 축구에도 그늘은 있다. 극우주의다. 그라운드 위에서 벌어지는 공공연한 인종차별도 문제지만, 극우주의자들이 경기장 안팎에서 벌이는 선동과 폭력은 독일 축구계의 고질병으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독일축구연맹(DFB)은 축구 국가대표팀을 ‘나치에 반대하는 네트워크 캠페인’ 홍보대사로 내세우는 등 축구팬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이러한 연맹 차원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드는 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다.

지난 1월20일 열린 바이에른 뮌헨과 알레마니아 아헨의 분데스리가 경기. ⓒ DPA 연합
같은 팀 서포터끼리 치고받고

지난 9월20일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 대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의 경기. 이번 시즌에 1부 리그로 올라온 브라운슈바이크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전반전을 0-2로 뒤진 상황에서 후반전에 한 골을 넣으며 역전을 노렸지만 결국 1-4, 브라운슈바이크의 참패로 끝났다. 그러나 진짜 싸움은 그라운드가 아닌 응원석에서 벌어졌다. 원정 응원석에서 브라운슈바이크 팬들 사이에 난동이 벌어졌다. 상대팀 서포터와 벌어진 싸움이 아니라 자기들끼리의 싸움이었다. 분데스리가에서는 한 구단이 많게는 수십 개의 소규모 응원단을 거느리고 있어서 종종 같은 구단을 응원하는 팬클럽 간에 마찰이 빚어진다. 그런데 이날의 갈등은 성격이 달랐다. 극우 성향의 훌리건들이 응원단 ‘울트라즈 브라운슈바이크(UB01)’를 향해 “유대인들은 꺼져라” “더러운 좌파” 등의 욕설을 퍼부었고, 경찰의 제지에도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다. 결국 UB01은 다른 팬들과 격리돼 경기를 관람해야 했다.

더 큰 사건이 일주일 후에 터졌다. 구단 측이 “브라운슈바이크는 폭력·인종주의·극우주의에 무관용으로 대응한다”며 징계에 나섰는데, 엉뚱하게도 폭력 피해자인 UB01의 경기장 출입을 금지한 것이다. UB01은 성명서를 내고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처벌하는 구단 측의 처사를 비판했다. <슈피겔>을 비롯한 독일 언론 역시 “브라운슈바이크 구단은 (폭력을 휘두른) 다른 쪽에 대해서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며 출입 금지 조치의 형평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브라운슈바이크 구단의 미리암 헤르츠베르크 대변인은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경찰이 폭행에 연루된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는 중이라 아직은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다”고 밝혔다. 출입 금지 조치를 내린 한 달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답변이었다. UB01에 경기장 출입 금지 조치를 취한 배경에 대해서는 “이 응원단이 다른 응원단은 물론 구단과도 수년간 여러 차례 의견 충돌이 있었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문제의 원인이 과거에 있다고 주장한 셈이다.

UB01 측은 공식 성명서를 통해 “과거 문제를 일으킨 회원들을 모두 제명시켰음에도 과거를 문제 삼는 것은 현재 상황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반론의 여지가 없는 (극우주의적) 욕설과 폭력을 놓고 마치 우리가 빌미를 제공한 것처럼 정당화하는 처사를 이해할 수 없다”며 UB01에 대한 출입금지 조치를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구단 측은 여전히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독일의 극우주의 전문가들은 지역 리그 및 아마추어 클럽이 극우주의 단체의 표적이 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분데스리가에 비해 지역 연고가 더 강하고 연맹과 언론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어 극우주의자들이 더 쉽게 침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1월 벌어진 알레마니아 아헨 팬클럽 간의 마찰이 좋은 예다. 축구 팬의 의식 개선 캠페인을 벌여온 아헨 울트라즈(ACU)가 극우 성향의 카를스반데 울트라즈(KBU)의 집요한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앞으로 경기장 응원을 포기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응원을 포기하게 만든 KBU는 단순한 축구 팬클럽이 아니다. 극우 정당인 독일민족당(NPD)의 사샤 바그너, 네오나치 단체인 아헨전우회(KAL)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극우 단체다. 아헨 지방경찰청의 파울 케멘 대변인은 한 인터뷰에서 “극우주의자들이 KBU를 잠식할까 우려된다”며 “아헨 축구 경기장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폭행 사건은 명백히 KBU 쪽에서 촉발되고 있다”고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ACU의 한 임원은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KBU 회원들이 경기장에서 인종주의적인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ACU 회원들을 집까지 따라와 폭행하는 바람에 더는 축구장에 갈 수 없게 됐다”고 털어놨다.

그는 왜 굳이 경기장에서 반극우주의 캠페인을 벌였을까. “인종차별적이고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내용을 담은 응원가와 욕설 때문에 구장에 가기를 꺼리는 팬들이 있다. 누구나 즐거운 마음으로 경기를 보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이번 시즌 단 한 차례도 아헨의 경기장을 찾지 않았다. 팬클럽 임원으로 활동한 탓에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극우주의자들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어서다. 그는 “구단은 표가 팔리기만 하면 응원석에 누가 앉아 있든 상관하지 않는다”며 독일의 구단이 극우주의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난 9월 구단과 아헨 팬클럽 연합이 마련한 평화 시위에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하나였다. ‘극우주의’가 명백하게 문제인데도 이를 묵살하는 주최 측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

경영난 겪는 구단일수록 극우주의 색채 강해

현재 분데스리가 각 구단은 궁여지책으로 보안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공항 보안검색대를 방불케 하는 소지품 검색을 실시하는가 하면 경기 전후에도 홈팀과 원정팀 응원단이 마주치지 못하도록 이들을 완벽하게 분리시켜놓는다. 하지만 이러한 대책으로는 같은 팀을 응원하는 응원단 간의 마찰을 막을 수 없다. 독일 축구는 지역 연고주의가 극단적으로 분출되는 스포츠다. 그럼에도 정치적 이해관계가 통하면 팬들 간에 다른 지역과의 연대가 이뤄지기도 한다. 아헨 울트라즈는 10월 초 홈페이지를 통해 울트라즈 브라운슈바이크를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극우주의자들 역시 연고팀과 무관하게 결집하고 있다. 10월19일 MSV 뒤스부르크의 일부 팬이 경기 중에 UB01을 지지하는 현수막을 펼쳤다가 극우주의자들에게 린치를 당했다. 용의자 중에는 뒤스부르크와 앙숙인 도르트문트 팬들도 섞여 있었다. 5년간 뒤스부르크에서 반차별주의 프로젝트를 이끌어 온 사회학자 게어트 뎀보스키는 “경영난을 겪고 있는 오래된 구단에서 특히 극우주의 성향이 강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파산 위기에 빠진 MSV 뒤스부르크가 가장 먼저 축소한 예산은 바로 반차별주의 프로젝트 지원금이었다. 결국 구단의 경영난과 팬 문화의 우경화가 악순환의 고리를 만드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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