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몸 건사도 힘든데 연애가 뭐람
  • 김원│문화평론가 ()
  • 승인 2013.10.30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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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들어 멜로 영화 품귀…각박한 세태와 관객 취향 반영

가을인데 멜로 영화가 드물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가만 생각해보니 지난 1년여간 ‘정통 멜로’ 영화를 본 기억이 있나 싶다. 가을이면 으레 봇물을 이루던 남녀상열지사는 어느새 영화 속에서 실종되다시피 했다. 심지어 정우성과 한효주가 등장하는데도 <감시자들>은 그저 동료애로 끝냈다. 사실 예전 같으면 말도 안 되는 반전, 아니 뒤통수였다. 관객은 설마 이대로 끝나랴 했겠지만 그냥 그대로 끝났다.

놀라운 것은 이처럼 연애하지 않는 영화들이 흥행한다는 사실이다. 관객들은 실망은커녕 현실 반영이라며 오히려 열광한다. 한국 영화 속에서 사랑 이야기를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올봄 <연애의 온도>는 재미있으면서 대단히 현실적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남녀 둘이 합쳐 36.5˚C를 밑도는 체감 온도였다.

지난해 3월 개봉한 은 400만 관객을 넘어 한국 멜로 영화의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연애는 이제 36.5˚C를 밑돈다

또 올여름의 <설국열차> <더 테러 라이브> <숨바꼭질> <감기>를, 그리고 올해 초의 <7번방의 선물>을 떠올려보자. 지난해 말 대통령 선거일에 개봉한 외화 <레미제라블>도 있다. 휴머니즘과 부성애, 제 핏줄이든 아니든 미래 세대를 위한 헌신과 분투, 우리를 울린 건 그런 사랑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로막는 온갖 어려움이 운명처럼 놓여 있다. 가야 할 길은 희미하나마 어느 정도 보이기는 하지만, 상처 없이 빠져나가기란 애당초 불가능해 보인다. 자식은 있을지라도, 배우자는 처음부터 없거나 중간에 잃는다. 편부·편모들이 초인적인 희생을 통해 자식을 다음 세상으로 넘겨주려 애쓰는 이야기들이다.

문제는 가을로 접어들면서 개봉한 영화들은 그 패턴마저 깨고 있다는 점이다. <관상>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 <공범> 등에 이르면 아비와 자식은 첨예하게 대립하는 존재다.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이나 헌신만으로는 공존이 불가능하다. ‘시대를 몰라서’ 혹은 ‘키워준 죄’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내가 양보한다고 너를 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비의 탓만도 아니다. ‘아비의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제 공존을 위해서는 대안(代案) 혹은 원안(原案)을 신중히 모색해야 한다.

윤수일의 왕년 히트곡 <사랑만은 않겠어요>가 절로 떠오른다. 그 옛날의 청춘들은 그래도 패기 혹은 객기라도 있었나 보다. 사랑이 ‘이다지도 괴로울 바에야 차라리’ 안 하고 말겠다는, 사랑의 달콤함과 고통을 다 절절하게 맛본 사람의 고백을 이토록 당당히 외치다니! 그 시절 모두가 알아듣고 뜨겁게 공감했다는 점에서 다들 사랑만은 해봤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혼자 품는 감정이나 혼자 하는 사랑의 아픔이 대세인, 그마저 조용히 중얼거리거나 속으로 삭이는 요즘 가요의 느낌과는 다르다. 그때가 지금보다 더 ‘가난’했을지라도, 미래에 대한 기대나 약속은 서로에게 걸 수 있었다는 뜻이겠다.

SBS 드라마 <내 연애의 모든 것>에서 김수영 의원(신하균 분)은 사귄 지 며칠 만에 ‘끝내자’는 노민영 의원(이민정 분)에게 버럭 소리친다. “뭘 시작을 했어야 끝내든가 말든가 하지!”

그렇다. 시작을 해야 끝내든가 말든가 할 수 있다. 사랑은 더욱 그러하다. 연애는 지난한 기승전결을 거쳐야 할 뿐 아니라 이 과정이 무한 반복될 수도 있다. 하중과 권태를 견뎌야 한다. 도돌이표, 변주, 합주를 온통 끌어들여야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총체적 사건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시간이다. 얼마나 소요될지 짐작도 안 된다. 그래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을 무렵에야 사랑하는 그녀를 만나게 된 정원(한석규 분)은, 유리창 너머로 아스라이 보이는 다림(심은하 분)을 서럽게 응시한다. “시간이 얼마 없는데… 나는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랑을 하려 한다.”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15년 만에 재개봉을 앞둔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가 어쩌면 이 가을의 유일한 정통 멜로인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흥행에 성공한 한국 멜로 영화들. 왼쪽부터 . ⓒ CJ 엔터테인먼트·NEW 제공
흥행에 방해된다면 사랑도 ‘싹둑’

사랑에는 품이 많이 들어간다.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하고, 많은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게다가 돈이 든다. 다시는 회복하기가 불가능한 ‘기회’를 써버려야 한다. 엄청난 ‘매몰 비용’과 ‘기회비용’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과정은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물론 몸과 마음과 주머니에 여유가 있다면 이런 긴장과 불안도 삶의 활력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항변한다. 이 한 몸 부지하기도 힘들다고. 사랑이 실로 얼마나 비경제적인지 낱낱이 알아버린 신세대에게는, 연애를 위한 최소한의 환상이나 결혼을 위한 최소한의 기대가 무너진 것은 아닐까.

연애, 이제 이런 노역(勞役)이 따로 없다. 그리고 이렇게 위험한 도박도 없다. 설령 상대의 마음을 얻어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해도, 만에 하나 다 이겨내고 결혼이 성사된다 해도, 이제야말로 고행길이 시작되는 것일 수 있다.

말하자면 먹고사는 고민에 대한 본격적인 ‘지옥문’이 열리는 것이다. 무한 책임의 뚜껑을 여는 게 바로 연애라면, 누가 감히 쉽게 다가갈 수 있겠는가. 정신분석 전문가인 김혜남 박사 방식으로 말하면 “이래도 너희가 사랑할 수 있을까?”를 시험하는 것 같은 현실이다. 대가를 기대하지 않아야 진정한 사랑이라는 오래된 격언도 딜레마에 처한 상황이다. 사랑은 하고 싶지만, 감수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인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요즘 멜로의 주체는 고등학생 아니면 (부와 명예가 있는) 노년이다. 사랑은 아무것도 모를 때 겁 없이 덤비거나, 모든 준비를 갖췄을 때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연애 세포는 쪼그라들고, 어쩌면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정규직’이 되는 게 청춘의 꿈처럼 보이는 시대에, 관객의 본심까지 읽어내야 하는 영화의 생존 비법은 당분간 연애를 배제한 이야깃거리를 찾는 것에 있을지 모른다. 현재로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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