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이 떨어져도 ‘들국화’는 시들지 않는다
  • 김영대│대중음악평론가 ()
  • 승인 2013.10.30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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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찬권 사망으로 멤버 둘 잃은 전설의 록 밴드 어디로 가나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까. 참으로 갑작스런, 뼈아픈 상실이다. ‘가왕’ 조용필이 화려하게 귀환했고 이문세의 잠실 주경기장 콘서트가 명불허전의 실력을 입증했으며, 병상에서 녹음한 미발표곡이 뒤늦게 공개된 가객(歌客) 김현식의 거친 음색이 다시 올드팬들의 마음을 매만지려던 순간이었다.

그에 더해 지난여름에 진작 예고된 들국화의 새 음악과 후속 활동은 아마 올해 벌어진 노장의 역주 중에서도 최정점의 순간으로 기록되었으리라. 들국화가 다시금 멋진 무대를 통해 흐드러지게 피어날 광경이, 마치 그들의 노래 제목처럼 노래가 ‘깨어날’ 순간이 다시 올 거라 기대한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여름 후에 있었던 이들의 반가운 활동 재개와 녹슬지 않은 연주 감각은 그 기대감을 한껏 부풀리기에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밴드의 4분의 1인 드러머 주찬권을 잃어버리면서 그들을 지켜보던 음악 팬 모두는 다시금 망연자실한 채 깊은 슬픔을 느껴야만 했다.

1980년대 들국화. 왼쪽부터 허성욱·최성원·전인권·조덕환. ⓒ 뉴시스
1997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허성욱에 이어 주찬권마저 자리를 비우며 들국화의 행보에는 불가피한 변화가 찾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부침이 늘 반복되어온 들국화의 ‘돌고 도는’ 세월을 떠올려 볼 때 어떤 예단도 금물일 테지만 이제 이른바 ‘원년’ 들국화의 이야기에는 이렇게 또다시 아쉬운 한 막이 열리고 닫히는 느낌이다.

20세기 소년·소녀의 전설, 들국화

주찬권. 그는 정적인 모습 속에서도 늘 열정을 잃지 않은 뮤지션이었다. 드러머라는 포지션의 한계에도 그의 행보는 늘 다채롭고도 의연했다. 순간적인 트렌드와는 한 발짝 떨어져서 들국화의 한 축으로, 솔로 뮤지션으로, 무엇보다 굵직한 존재감의 드러머로서 자리를 지켰다. 들국화 해체 이후 불가피했던 이합집산, 한국 대중음악의 변해버린 지형 등은 분명 주찬권의 편은 아니었지만 멈추기보다 지속을 택한 그의 디스코그래피는 포크와 블루스록, 어덜트 컨템포러리 팝·록을 아우르며 지난해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평범한 스튜디오 뮤지션으로 전향하지 않고 꾸준히 창작 의지를 불태운, 드러머로서는 쉽지 않았던 독특한 면모였다. 그리고 비로소 들국화라는 집으로 돌아온 주찬권, 유명을 달리하기 전에 녹음을 마쳤다고 전해지는 그의 새 음반 속 연주가 그 어느 때보다 힘이 있었을 걸 알기에 더욱 마음 한편이 욱신거린다. 그는 너무 빨리 가버렸다.

들국화는 늘 전인권으로 대중에게 각인되어왔고 이는 작곡과 보컬이라는 측면, 대중적 이미지를 모두 고려해봤을 때도 틀림없는 말이다. 그리고 두 코어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점은 들국화의 미래를 떠올렸을 때 여전히 다행스러운 부분이다. 문제는 들국화가 단순한 개인의 조합이 아니라 늘 밴드였다는 점이다. 이 점은 사실 또 한 명의 음악적 버팀목인 허성욱이 일찍이 세상을 떠나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키보디스트 허성욱은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한국 록, 아니 한국 대중음악의 모더니티를 이끈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할 수 있다. 1980년대 말 들국화의 라이브 콘서트를 직접 관람했던 세대라면 허성욱의 묵직한 존재감에 대해 이론을 제기할 여지조차 없을 것이다. 귀가 예민한 키보드 주자를 쉬이 뜨끔하게 만든 풍성한 화성의 운용, 페달 포인트 등 앞선 테크닉의 활용은 당시 한국 밴드 음악에서 이례적이었던 재능과 기술이라 그의 빈자리는 쉽게 대체되지 못했다. 김현철, 정석원(‘공일오비’) 등 1990년대의 내로라하는 키보드 주자가 모두 허성욱의 한 발짝 앞선 연주 테크닉과 아이디어에 큰 영감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새 스튜디오 작업에서 정원영 등 최고의 연주자들과 세션맨이 그의 자리를 메웠다고 알려지지만 지난 5월에 있었던 재결성 기자회견 자리가 유독 허전했던 것은 분명 허성욱의 부재 때문이었다.

멤버의 이합집산과 갈등, 재충전과 도약의 역사만큼이나 들국화는 독특한 밴드였다. 이들의 데뷔 음반인 <들국화>(1985년)는 평단이 선정한 대중음악 사상 최고의 명반 1위를 십수 년째 고수하고 있는데, 이는 한편으로 익숙하면서도 놀라운 사실이다. 포크 듀오 ‘어떤날’과 함께 들국화는 대중매체와는 담을 쌓은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전설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인디 밴드가 음원 차트에서 주류 톱 가수와 순위 경쟁이 가능한 지금의 현실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로, 이들은 일체의 틀에 박힌 상업적 활동 없이 자체적인 라이브 활동과 언더그라운드 경력의 결산과도 같은 데뷔 음반 한 장만으로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정점으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10월20일 별세한 들국화의 멤버 고 주찬권씨의 빈소. ⓒ 뉴시스
들국화로 피어난 한 시대의 개막이자 정점

들국화가 실로 독특했던 것은 한국적인 포크 가요와 록 성향의 밴드 음악을 성공적으로 결합해낸 사실상 최초의 사례였다는 점이다. 조금은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던 물 아래의 실력자들이 뒤늦게나마 뭉쳐 만든 한국 언더그라운드 최초의 ‘슈퍼 그룹’(들국화의 데뷔 앨범이 나왔을 때 허성욱을 제외하고 대부분 30대를 넘긴 나이였다)인 이들은 음악적 지향이 신중현이나 사랑과평화로부터 이어지는 사이키델릭이나 펑키, 혹은 산울림이나 송골매의 록 사운드의 미학과도 확연이 달랐다는 점에서 한국 록 음악의 정통 직계에 위치하지 않은 새로운 한국 팝 흐름의 단초로 보는 것이 음악적으로는 더욱 타당한 분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전인권과 최성원 역시 유사한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다). 가요라기보다는 팝-록을 교차하는 멀티 보컬리스트에 가까웠던 전인권, 역시 정통의 록보다는 당대의 포퓰러한 편곡과 연주 스타일을 보유했던 허성욱의 결합만으로 그 새로움은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췄다. 특히 전인권의 길들여지지 않은 독특한 야성미에는 당대 언더그라운드의 왕자였던 김현식이나 최고의 가수 조용필이 갖지 못했던 독특한 뉘앙스가 있었다. 물론 음악적인 견지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음악적 핵이라 부를 만한 최성원의 합류였다. 이미 레코딩과 라이브 경험이 풍부했던 최성원은 1980년대 초반 심지어 들국화 1집과 2집에 수록될 대부분의 곡을 만들어놓은 상태였는데(다수의 곡이 그가 만든 프로젝트인 <우리 노래 전시회>라는 앨범에 담겨 발매되기도 했다), 김민기와 조동진을 흠모했던 포크 키드 최성원은 전인권·허성욱과 조우하면서 전혀 새로운 한국형 팝의 탄생을 떠올렸을 것이다. 들국화는 그렇게 탄생했고 동시대의 다른 음악에 비해 예외적으로 진보적인 작업이었던 것은 물론, 영미 팝의 세례를 받았던 입맛 까다로운 음악 마니아의 즉각적인 환호를 이끌어냈다.

데뷔와 동시에 전설로 남은 들국화의 여정은 혼란과 정체의 굴곡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힘이 빠진 2집 앨범 이후 들국화라는 이름이 유지되는 와중에도 전인권과 최성원이 사실상 다른 길을 걸었고, 허성욱과 주찬권은 들국화에서 펼쳐내지 못한 그들만의 음악 세계를 일련의 솔로 작품을 통해 펼쳐냈다. 물론 어느 것도 그들의 데뷔 음반에서 뻗어나온 이들의 음악적 욕심을 해소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올여름, 끝없는 부침과 공백을 딛고 18년 만에 돌아온 그들은 오직 ‘음악’을 일깨우기 위해 뭉쳤다는 당위를 역설했다. 물론 밴드 음악에 불친절한 작금의 상황과 주찬권의 공백으로 인한 동요로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든 도전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설보다 현재를 택한 들국화만의 이야기는 그들만이 아닌 한국 대중음악의 풍성함을 위해서라도 조금 더 계속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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