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이 그리 넓나
  • 윤길주 편집국장 ()
  • 승인 2013.11.05 09:3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누군가 의혹을 제기한다(또는 내부 폭로)→여당은 오리발을 내민다(때론 폭로자의 신상을 문제 삼아 물타기를 한다. “그자는 조직에 불만이 많은 돌출 분자다” 등)→언론은 균형을 맞춘다며 양측 주장을 반씩 나눠 보도한다→정치권의 폭로전이 거세진다→일부 언론이 민생은 안 챙기고 싸움질만 한다고 싸잡아 깬다→수세에 몰린 여당은 새로운 이슈로 반전을 꾀한다→본질은 흐지부지된다.’

정치적으로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봤던 낯익은 풍경입니다. 김대중 정권 때도 그랬고, 이명박 정권 시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이 판박이입니다. 정부·여당은 맞불을 놓다가 아니다 싶었는지 ‘경제 살리기’ 카드를 꺼냈습니다.

먹힐까요? 우리는 이미 적나라한 모습을 봤습니다. 국정원 댓글 사건을 수사하던 팀장이 국정감사장에 나와 “외압이 있었다”고 폭탄을 터뜨린 겁니다. 여당은 “항명이다, 검찰이 콩가루 집안이 됐다”며 초점을 흐립니다. “수사팀장은 조직을 배신한 꼴통”이라고 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별로 귀 기울이는 것 같지 않습니다.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했느냐, 수사 과정에 외압이 있었느냐가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국정원 댓글 사건은 애초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 합니다. 국가기관이 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헌법을 유린하는 행위입니다. 더해서 이번 사태를 통해 대한민국 정보기관의 무능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국정원은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질하게 댓글을 달다 들켜 온통 나라를 뒤집어놓다니, 실력이 형편없습니다. 지하 밀실에 끌고 가 두들겨 패면 없는 것도 나오는 향수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닌지 한심합니다.

조직 이리저리 갖다 붙이고 사람 옮긴다고 본래 모습이 바뀌지 않습니다. 정보기관이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고, 수장의 임기를 법으로 보장하는 게 우선입니다.

국정원 댓글 사건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기 힘든 지경이 됐습니다. 궁지에 몰릴 때마다 새누리당은 “대선 불복이냐”고 흘러간 옛 노래를 틀어댑니다. 어떤 의원은 “논란이 되는 댓글과 트위터는 한강에 물 한 바가지 붓는 격”이라고 했습니다. “(검찰에서 수사한) 5만5000여 건의 트위터 글은 국내에서 4개월간 생산된 2억8800만건 가운데 0.02%에 불과해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국정원 댓글이 대선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결과가 바뀌었다고 믿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심각한 것은 국가기관이 크든 작든 선거에 개입했다는 점입니다. 댓글이 몇 개 안 되니까 괜찮다면 큰돈 들여 선거는 뭐하려고 하나요. 끼리끼리 모여 체육관에서 정하면 되지.

댓글 사건은 이명박 정권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댓글 사건에서 자유롭다면 이번 기회에 엄정하게 책임 소재를 밝히는 게 옳습니다. 긴 침묵을 깨고 박근혜 대통령이 진상을 정확하게 밝히겠다고 한 것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제 검찰과 사법부가 진실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밝히는 일만 남았습니다. 손바닥이 아무리 넓은들 하늘을 가릴 순 없습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