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불복’의 역사
  • 이상돈 | 중앙대 명예교수 ()
  • 승인 2013.11.05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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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대선 기간 중에 국정원 직원들이 댓글과 트위터 등을 통해 선거에 간여했다는 의혹이 ‘대선 불복’ 공방으로 이어지고 있다. 새누리당 지도부가 야당의 문제 제기에 대해 “대선에 불복하는 것이냐?”고 치고 나오자 민주당은 “대선 불복은 아니다”라고 물러섰다. 문재인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이 수혜자”라고 받아치자 ‘대선 불복’ 논쟁이 다시 불붙고 있다. 선거법상 제소 기간이 지나서 대선 불복 논란이 무의미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선 불복은 정치적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대선에서 패배한 측이 선거의 효력을 다투는 법적 절차를 직접 진행했던 경우는 2002년 대선 후에 한 차례 있었지만, 정치적 의미로서 대선 불복은 사실 그동안 우리 정치사에서 끊이지 않았다.

1956년 대통령 선거는 민주당 후보였던 신익희 전 국회의장이 급서하는 바람에 제1야당 후보가 없이 진행됐다. 신 전 의장이 출마했더라면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을 수도 있었을 터이니 민주당은 물론이고 많은 국민이 대선 결과를 내심 인정하지 않았다. 1960년 대선에서도 민주당 후보였던 조병옥 박사가 급서해서 이승만 대통령이 당선됐지만 많은 국민은 그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구나 이기붕 의장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광범위한 선거 부정이 있었음이 확인되자 학생 시위가 일어나서 자유당 정권은 종말을 고했다.

1963년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에게 근소한 표 차이로 패배한 윤보선 전 대통령은 서울 등 도시 지역에서 자신이 승리했음을 들어 “내가 정신적 대통령이다”라고 했으니, 이 또한 대선 결과에 불복하는 표현이라고 하겠다. 1971년 대선에서 신민당 후보 김대중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95만표를 졌다. 신민당은 “100만표 이상의 부정이 있었다”며 선거 무효를 주장했고, 이렇게 시작된 대치 정국은 이듬해 ‘10월 유신’이란 파국을 맞았다.

1987년 대선에서는 야권의 3당이 분열되는 바람에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36.6%라는 과반에 훨씬 못 미치는 적은 표로 당선됐으니, 야권을 지지한 유권자들은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2002년 대선 후에는 한나라당 의원들 사이에서 “김대업 병풍(兵風) 때문에 억울하게 졌다”는 정서가 팽배했고, 그런 분위기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사태로 이어졌다. 2007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정동영 후보는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 큰 표 차이로 패배했다. 하지만 야권은 BBK와 도곡동 땅 의혹에 대해 검찰이 부당한 판단을 했다는 ‘대선 불복’ 심정을 갖고 있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인 남북전쟁 또한 사실상 ‘대선 불복’에서 비롯됐다.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예제에 반대하는 링컨이 당선되자 남부 주들은 연방 탈퇴를 선언했고, 결국 남북전쟁이 일어나 4년 동안 60만명이 사망했다. 1860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링컨은 민주당이 남부와 북부로 분열된 덕분에 유효 투표의 40%도 얻지 못했음에도 선거인단 득표에서 과반을 차지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남부 주들은 선거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고, 결국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노예 제도에 중립적인 존 벨을 지지했던 버지니아와 테네시마저 연방을 탈퇴하자 노예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고 전쟁을 알리는 포성(砲聲)이 시작됐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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