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값 비싸다고? 그래도 우리 것만 써”
  • 김원식│뉴욕 통신원 ()
  • 승인 2013.11.13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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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메인 주 ‘의약품 외국 구매 합법화’에 제약업체들 반발

미국의 북동쪽 끝에 위치해 캐나다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육지의 85% 이상이 삼림으로 덮인 곳. 자연경관이 수려하기로 유명한 메인 주(州)가 미국의 제약업계를 다급하게 만들었다. 10월9일 메인 주가 미국에선 처음으로 처방전을 가지고 우편으로 외국에서 약을 사 들여오는 것을 합법화했기 때문이다. 메인 주의 결정에 제약업계는 관련 법률의 무효 소송을 제기하겠다며 즉각 반발했다. 제약업계의 논리는 이렇다. 약을 무분별하게 수입하게 되면 소비자들의 안전이 위험해지고 제약업계의 매출이 감소하면 신약 개발 등 연구·개발 부문 투자가 위축된다는 것이다.

미국 식품의약청(FDA)도 제약업계 편에 섰다. FDA는 “외국에서 인터넷 판매나 현지 여행을 통해 수입되는 의약품은 안전하거나 효과적이지 못하다”며 “이런 의약품들은 건강에 해를 가할 수 있는데 만약 부작용이 생길 경우 FDA가 도울 수 없다”고 밝혔다.

메인 주 폴 라페이지 주지사(공화당)는 이번 합법화 조치를 안전과 무관한 문제로 생각했다. 그는 “제약업계의 기득권(turf)을 유지하려는 것일 뿐”이라며 FDA의 주장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메인 주 포틀랜드 시의 마이클 브레넌 시장은 “캐나다와 인접한 덕분에 2004~12년 지역 노동자들이 캐나다에서 약품을 사왔고 그로 인해 320만 달러나 절약할 수 있었다”며 “이 기간 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08년 대선에서 해외 의약품 수입에 찬성하는 공약을 제시했다. ⓒ EPA 연합
국경선 양쪽에서 같은 약 가격 세 배나 차이

<월스트리트저널>은 포틀랜드 주민들의 약품 구매기를 보도했다. 실제로 포틀랜드 주민이 심장약인 ‘넥시움(Nexium)’ 90일 치를 미국 현지에서 구매하면, 본인 부담금(155달러)을 포함해 621달러를 내야 한다. 하지만 캐나다 제약 중개업체(CanaRx)를 통하면 본인 부담금 없이 200달러에 구매할 수 있다. 기업 활동에도 이점이 있다. 440명의 직원을 고용해 나무젓가락 관련 제품을 만드는 ‘하드우드(Hardwood)’ 관계자는 “이런 방법으로 직원들의 치료약을 구입하면서 연간 60만 달러를 절약하고 있다”고 말했다.

암암리에 이뤄지는 해외 약품 구매가 메인 주처럼 합법화된다면 제약업계 큰손(Big Pharma)들이 가만있을 리 없다. ‘화이자(Pfizer)’ ‘존슨앤존슨(Johnson & Johnson)’ 등 다국적 제약회사와 ‘라이트에드(Rite Aid)’ 등 미국 제약 유통업체는 메인 주의 시도를 안전 문제로 몰아가고 있다. 메인 주의 합법화 조치가 다른 주에 연쇄적으로 퍼지는 상황은 이들에게 끔찍한 시나리오다. 로렌스 코틀리코프 보스턴 대학 경제학 교수는 “메인 주가 합법화하면 다른 주도 따라 할 것이고, 미국 제약업계의 장기적인 이익과 새로운 신약 개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우려하면서도 “하지만 이번 기회에 제약업계도 자성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했다.

제약업계에 자성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안전성 문제부터 살펴보면 미국에서 판매되는 약 중 84%는 ‘제네릭 의약품(generic drugs)’이다. 제네릭 의약품은 신약의 특허 기간이 만료돼 일반 제약회사들이 똑같이 만드는 카피 약을 말한다. 약들은 중국·인도 등 여러 국가에서 제조돼 미국의 제약 유통업체로 수입된다. FDA가 카피 약을 승인하고 권장하는 이유는 의료비 상승을 막기 위해서다. 환자들도 이미 값이 싸진 제네릭 의약품을 굳이 해외에서 수입하지 않는다.

문제는 아직 특허가 남아 있는 ‘브랜드 의약품’이다. 특허는 제약업계 큰손들이 대부분 쥐고 있다. 이들 브랜드 의약품도 해외 현지 공장에서 똑같이 생산돼 각국으로 보내지는데 이상하게도 미국 국민은 캐나다 국민에 비해 3배 이상의 돈을 줘야 살 수 있다. 미국에서 사든, 캐나다에서 사든 똑같은 브랜드 의약품이며 해외 유통 경로를 통해 구매하는 것과 안전성은 무관하다는 게 대체적인 지적이다.

한 해 5000만명이 과도한 약값에 처방전 포기

캐나다국제제약협회 관계자는 “미국 국민들은 1950년대부터 캐나다에서 의약품을 사갔는데 안전성에 문제가 있었다면 벌써 중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설립된 지 10년이 넘은 이 협회에는 처방전을 받으려는 미국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미국인에 대한 처방전이 1년 동안 대략 100만건 넘게 발행된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2%,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 중 5%는 치료약을 다른 국가에서 구입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이 불법적이기 때문에 조사 결과보다 실제 구입은 더욱 많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즉 이미 적지 않은 미국인이 고가의 치료약을 해외에서 싼값에 들여오고 있다는 얘기다.

FDA 등 정부 기관들이 불법을 강조했던 것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를 막지 못하고 있고 대부분 묵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각지대에 놓인 자국민 3600만명을 의무적으로 의료보험에 가입하게 하려는 ‘오바마케어’가 엄청난 정치적 논란을 가져온 미국이지만, 설혹 의료보험이 있다 해도 너무 비싼 의약품 가격 탓에 치료약을 구입하지 못하는 환자가 태반이다. CDC에 따르면 2009년 한 해 동안만 약값 때문에 치료약 구입을 포기한 사람이 2500만명에 달했다. 민간 재단인 ‘공익기금(Commonwealth Fund)’ 조사에서는 그 숫자가 더 늘어난다. 2010년 결과를 보면 약 4800만명의 미국 성인이 비싼 가격 탓에 처방약을 구매하지 못했다. 미국 소비자들이 해외로 눈을 돌리는 것은 생존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미국에서 처방전을 가지고 해외에서 의약품을 구매하는 것은 불법이라 온갖 편법이 난무하고 있다. 제약업계 큰손들의 기득권이 유지될수록 소비자는 과도한 의료비 부담을 져야 하고 이를 피하려면 불법을 저질러야 한다.

과도한 의료비 혜택으로 제약업계는 풍요롭다. 올해 5월 미국 IMS의료정보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8년 동안 미국 제약업계의 큰손들은 막대한 수입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11개에 달하는 대표적인 제약업체가 2012년 한 해 동안 850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이런 수익을 보면 해외 구매 합법화를 막기 위해 갖은 로비를 벌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메인 주가 시행하는 정책은 원래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하려던 것이었다. 2008년 대선에서 의료 비용 감소를 위해 해외 의약품 수입에 찬성했던 그다. 하지만 당선된 이후 FDA 등 관련 기관에서 ‘안전성’을 이유로 강력히 반대했고, 제약업계는 이를 허용할 경우 3000억 달러 이상의 손실이 발생한다며 크게 반발했다. 결국 당시 내놓았던 의료보험 개혁안에는 수입 허용 조항이 삭제됐다. 백악관이 실패한 정책을 이제는 메인 주가 꺼내 들었고 일전 불사를 외치고 있다. 또 한 번 백악관은 해외 수입 허용의 총대를 메야 할지 모를 처지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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