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콜 날려도 돌아오는 건 홀대뿐
  • 최정민│프랑스 통신원 ()
  • 승인 2013.11.20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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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본 박 대통령 프랑스 방문…지상파 방송 한 차례도 안 다뤄

‘총성 없는 전쟁’이라는 외교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은 전쟁의 방식이다. 여기서 방식이란 ‘협상’과 ‘의전’을 말한다. 어떤 절차와 어떤 격식을 갖추었나에 따라 상대국을 얼마나 중요하게 대접하는지 드러난다.

예컨대 미국의 부시 행정부 시절 G8 정상회담에서 홀로 양복 정장을 입었던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의 모습은 미국의 패권주의에 던진 어떤 성명서보다 강력한 경고였다. 시라크의 모습에서 보듯 프랑스의 외교는 실리적이고 치밀하다. 그런 곳을 11월3일 박근혜 대통령이 공식 방문했다.

이번 박 대통령의 유럽 순방 중 영국만 국빈으로 초청된 것이었을 뿐, 프랑스와 벨기에는 기착지와 경유지였다. 그래서일까. 방문에 대한 관심에서 나라마다 차이가 났다. 프랑스의 외교 의전은 왕실이 있는 영국만큼이나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그 까다로움은 때로 낯 뜨거울 정도로 속내를 드러내는 표현이 된다. 이른바 ‘대접’이 달라진다. “엘리제궁 만찬에 나오는 포도주만 봐도 프랑스가 상대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박근혜 대통령과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11월4일(현지 시각) 파리 엘리제궁에서 열린 한-프랑스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박 대통령 프랑스어 연설은 훌륭하지만…”

아프리카 어느 낯선 이름의 국가 정상도 엘리제궁의 만찬에 초대된다. 하지만 그 작은 나라를 뜯어보면 석유 등 자원이 있는 국가가 대부분이다. 장 모네 대학의 베르제 교수가 “프랑스의 외교는 절대 실리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단언했을 정도다.

그렇다면 이번 방문에는 어떤 포도주가 나왔을까. 그런 고민이 필요 없었던 것이, 양국 정상 사이에는 만찬이 없었다. 오찬만 있었을 뿐이다. 국내 언론에서는 수행원들까지 프랑스 정식을 대접받았다고 호들갑이었지만, 이곳 기준으로는 결코 좋은 대접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나마 나은 것이라면, 이명박 전 대통령 방문 때는 정상 간의 오찬조차 없었다. 그때 두 정상은 다과만 들었을 뿐이다. 이 전 대통령과 박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모두 정상 간 회담은 있었지만, 만찬을 주재한 사람은 대통령이 아닌 총리였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미테랑 대통령이 제공했던 화려한 대접과도 명확하게 차이가 난다. 당시 프랑스는 한국에 고속철도를 팔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번 박 대통령의 공식 방문을 앞두고 먼저 환대를 한 언론은 프랑스의 우파 일간지인 <르피가로>였다. 공식 방문 직전에 가진 <르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은 북한 문제와 창조경제 등 중요한 사안을 자세히 밝혔지만, 이 신문은 ‘과거 독재자 대통령의 딸(la fille d‘un ancien prsident-dictateur)’이라는 표현을 지우지 않았다. ‘철의 여인’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얼음공주’라는 별명도 놓치지 않았다.

경제인연합회인 ‘메데프’를 방문한 박 대통령은 프랑스어로 깜짝 연설을 해 국내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국제 외교가에서는 프랑스를 달래는 가장 좋은 수단을 프랑스어 연설이라고 말한다. 프랑스에서 받아낼 것이 있을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프랑스어 연설을 잘 이용한 사람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다. 2006년 당시 외무부장관 자격으로 아프리카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반 총장은 파리에 들렀다. 국제정치학교 세미나에 참석해 프랑스어로 연설할 기회를 얻었다. 프랑스 그랑제콜(소수 엘리트 교육기관)의 속담을 인용하며 친근하게 시작된 강연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끝났다. 강연은 성공적이었는데 반 총장이 프랑스어 연설을 했던 이유는 유엔 사무총장 출마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프랑스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번 박대통령의 프랑스어 연설에 대해서는 훌륭했다는 평가가 많다. 특히 국가수반의 프랑스어 연설이었으니 더 후한 점수를 받은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내용도 한몫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르몽드>는 박 대통령의 프랑스어 연설을 ‘완벽한 프랑스어’라고 호평했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냉정한 견해를 잃지 않았다. “프랑스 경제인들이 환호했던 것은 국가수반의 프랑스어 구사 때문이 아니라 한국의 공공 시장을 외국 기업에 개방하겠다는 내용 때문이었다”고 전했다.

한국을 푸대접하는 프랑스 정상들

국가수반이 해외 순방 중 반드시 거치는 행사 중 하나가 방문국의 현지 교민 또는 유학생을 격려하는 자리다. 역대 한국 대통령들은 프랑스를 방문하면 늘 파리 시내 오페라 인근의 인터콘티넨털 호텔 컨벤션센터에서 교민 간담회를 개최했다. 이번에도 11월3일 교민 간담회 자리가 만들어졌는데 파리 교민 사회는 이미 둘로 갈라졌다. 한쪽에서는 환영 만찬이 열린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반대 시위가 열렸다.

프랑스 최대 한인 네트워크인 ‘프랑스존’을 비롯해 파리의 한인 매체들은 박 대통령의 방문 이전부터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한 조속한 해결과 대화를 촉구하는 사설을 지속적으로 게재했다.

이번 프랑스 방문을 앞두고 시사주간지 <렉스프레스>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알아야 할 다섯 가지’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1974년 고 육영수 여사의 피격 사건, 독재자 아버지의 그늘, 마거릿 대처와 메르켈을 모델로 삼고 있다는 점 등을 소개하면서, ‘정권 출범 초기 윤창중 스캔들로 얼룩졌으며 국정원 댓글 사건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인터뷰를 했던 <르피가로>나 박 대통령의 경제 행보를 다룬 <르몽드>와 달리 이번 공식 방문은 프랑스 지상파 방송에서 단 한 차례도 다뤄지지 않았다. 도착일인 11월3일에는 말리에서 프랑스 기자 2명이 피살된 사건으로 외교가가 들썩였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11월4일 12시30분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문학상인 공쿠르상 수상자 발표를 1시간 앞둔 때였다. 프랑스 모든 미디어의 안테나는 공쿠르상을 발표하는 생제르망으로 향하고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르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프랑스를 유럽 제일의 동반자라며 러브콜을 보냈다. 그러나 그동안 프랑스의 외교 행보에서 한국은 없었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사르코지는 재임 기간 중 여섯 차례나 중국을 방문했고, 후쿠시마 사태 직후 최초로 일본을 찾은 외국 정상이었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한국을 찾은 것은 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 때 방문해 머무른 20시간이 전부다. 게다가 2011년 프랑스는 한국에 이어 G20을 준비했는데 전임 개최국의 국가수반을 초대하는 관례를 무시하며 한국 정부에 초대장조차 보내지 않았다.

올랑드 현 대통령도 비슷한 행보를 보인다. 지난 4월과 6월, 중국과 일본을 방문했지만 한국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프랑스에는 이런 말이 있다. “프랑스는 미국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아직까지 그 보답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지금의 한국과 프랑스 관계는 이것보다 더한 모습이다. 박 대통령은 “한국은 프랑스를 몹시 사랑한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프랑스는 여전히 한국을 홀대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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