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장’ 카리스마에 당·청 압도되다
  • 이승욱·조해수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3.11.27 17:1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위만 바라보는’ 김기춘 비서실장…안팎에서 불만 목소리

11월18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은 분주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후 첫 국회 시정연설이 예정돼 있었다. 국회 관계자와 청와대 관계자 그리고 취재진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박 대통령이 정진석 국회 사무총장의 안내를 받으며 국회 본회의장으로 들어서자 카메라 셔터와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본회의장을 뒤덮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해프닝이 발생했다. 갑자기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가 정 사무총장을 제치고 박 대통령 곁으로 바짝 다가서려 한 것이다. 윤 수석부대표는 지난 대선 때 박 대통령의 수행단장을 맡았고, 박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로 분류된다. 윤 수석부대표의 돌발 행동에 정 사무총장은 그를 밀쳐냈다. 이 장면이 취재진의 카메라 렌즈에 고스란히 담겼고, 이 사진은 박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 못지않게 화제가 되며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정진석 사무총장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당시 상황과 관련해 “윤 의원(원내수석부대표)을 제가 밀어낸 게 맞다”며 “윤 의원이 영접 프로토콜(규칙·약속)을 무시하고 ‘들이대는’ 바람에 자칫 제 어깨가 VIP(박 대통령)와 부딪칠 수도 있을 것 같아 본능적으로 제지하게 됐다”고 밝혔다. 윤상현 의원은 당시 상황에 대해 "청와대 경호실 관계자가 (나에게) 대통령의 의전을 위해 (현장에) 나와 달라고 요청해서 나간 것"이라면서 "박 대통령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데 잘 들리지 않아 자세히 듣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는 상황에서 정 총장이 밀어서 빚어진 일종의 해프닝"이라고 말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의전을 누가 할 것인지를 두고 마치 승강이를 벌이는 듯한 모양새가 연출된 것이다. 이 한 장의 사진이 뒤늦게 논란을 빚자, 두 사람은 이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다시 만나 카메라를 향해 악수하며 화해 제스처를 취했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8월5일 청와대 춘추관 기자회견장에서 인사 관련 소감을 발표한 뒤 홍경식 민정수석, 윤창번 미래전략수석, 최원영 고용복지수석과 걸어나오고 있다. ⓒ 연합뉴스
대통령 앞 몸싸움 일거에 정리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당시 자칫하면 대통령 앞에서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할 수도 있었을 불편한 상황을 일거에 정리한 주역이 있었다. 바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박 대통령의 국회 방문에 동행한 김 비서실장은 정 사무총장과 윤 수석부대표가 승강이를 벌이는 듯하자, 윤 수석부대표에게 ‘다른 위치로 가 있어라’며 눈짓을 보냈다고 한다. 결국 윤 수석부대표는 김 비서실장의 지시에 따라 물러나야 했다. 박 대통령의 의전을 둘러싸고 벌어진 친박 인사들의 아웅다웅이 김 비서실장의 눈짓과 말 한마디로 제압되는 순간이었다. 윤상현 의원은 "당시 박 대통령의 오른쪽에 있던 김 비서실장이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겠다 했다"면서 하지만 박 대통령이 의장실로 바로 이동하셨기 때문에 (나는) 뒤로 물러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새누리당 친박 의원실의 한 보좌관은 “두 사람 모두 친박 핵심으로 내로라하는 인사들인데, 김 비서실장의 말 한마디로 모든 상황이 정리됐다”며 “말로만 듣던 ‘기춘대원군’의 위상을 실감하는 해프닝이었다”고 말했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허태열 전 비서실장 후임으로 청와대에 입성한 것은 지난 8월 초다.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 출신인 그는 박 대통령의 원로 자문 그룹인 ‘7인회’의 핵심 멤버다.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그가 정치 전면에 나서자, 정권 초반부터 인사 난맥상과 정책 혼선 등을 낳으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청와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실제 김 비서실장이 청와대에 들어간 이후 인사 참화 과정에서 논란이 됐던 ‘문고리 권력’ 논란도 잦아들었다.

청와대 당무보고 부활…김기춘-홍문종 접촉

김 비서실장을 중심으로 청와대 내부가 일사불란한 진용을 갖추고 있다는 징후도 곳곳에서 감지됐다. 임명 3개월 만에 김 비서실장이 최고 권력자인 박 대통령을 뒷받침하는 권력 2인자로서의 자리매김을 확고히 한 것이다. 청와대 안팎에서는 그의 역할을 ‘청와대 집사’에 국한하지 않고 있다. 김 비서실장의 기세가 청와대를 넘어 정부 부처와 새누리당까지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당무보고의 부활은 대표적인 사례다. 청와대 내부 사정에 밝은 새누리당 핵심 관계자는 “정치권 일각에서는 청와대와 여당의 소통이 완전히 단절됐다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며 “홍문종 새누리당 사무총장이 청와대를 정례적으로 찾아 당내 상황과 현안 등에 대해 김 비서실장에게 직·간접적으로 보고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과거 정권에서 폐지됐던 청와대 당무보고 제도가 사실상 복원된 것”이라고 밝혔다.

청와대 당무보고는 김대중 정권 시절까지만 해도 정례화돼 있었다. 김영삼 정권 시절에는 매주 목요일마다 여당의 총재 권한대행과 사무총장·정책위의장·원내총무 등 당 3역 및 대변인까지 총출동해서 대통령에게 직접 정례보고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청와대 당무보고는 노무현 정권 시절 중단됐고, 이는 이명박 정권 때까지 이어졌다. 청와대가 당내 상황에 지나치게 개입한다는 부정적인 시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근혜정부 들어 부활한 청와대 당무보고는 당연히 박 대통령이 최종 보고 대상이지만, 그 길목에 2인자 김 비서실장이 버티고 있다. 청와대 당무보고를 통해 김 비서실장이 당내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 10월29일 홍문종 사무총장은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채동욱 전 검찰총장 낙마 후 후임 인사와 관련해 “(김 비서실장이 채 전 총장의 후임 제안자를) 어디 분이라고 말씀은 안 하셨고 ‘PK(부산·경남) 인사는 아니다’라고 했다”고 말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전적으로 홍 사무총장의 착오에 의한 발언”이라고 이를 부인했다. 하지만 새누리당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정국 현안과 관련해 긴밀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정치권 주변에서 돌고 있는 TK(대구·경북) 지역 국회의원들 간의 대화 내용에서도 ‘기춘대원군’의 존재감이 드러난다. TK 지역 사정에 정통한 사정기관의 한 관계자는 “TK에 지역구를 둔 한 의원이 ‘지금 청와대 수석비서관 중에는 TK 인사가 한 명도 없다. 그러니 소통이 안 된다. 우리도 뭔가 연결 고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라는 불만을 표출했고, 김 비서실장에게 이런 뜻을 전달해야 한다는 얘기들이 나왔다고 한다. 김 비서실장과 자리를 한번 만들어야 한다는 주문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의원들 사이에서만 말이 오갔을 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그는 “이에 대해 김 비서실장은 ‘나와 소통하면 된다’는 입장이라고 했다. 그게 김 비서실장의 스타일이다. 새누리당 친박 핵심 의원들 사이에서도 김 비서실장은 상당히 어려운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정치권 동향에 밝은 또 다른 사정기관 관계자는 “내가 아는 한 김 비서실장이 TK 지역 의원들의 부름에 응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 지극히 개인적인 자리까지는 모르겠지만. 다만 김 비서실장이 새누리당 의원들을 공관으로 불러서 회동한 적은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서도 TK 지역 의원들 사이에는 비서실장이 국회의원들을 부르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속앓이에 그쳤을 뿐 누구 하나 밖으로 표출하진 못했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11월18일 시정연설을 위해 정진석 국회 사무총장,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 등과 함께 국회로 들어서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행정관에게 인사 통보 받아야 하나” 불만

청와대 인사위원장을 겸하고 있는 김기춘 비서실장의 인사 스타일은 허태열 전 비서실장과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는 게 청와대 안팎의 설명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하는 철통 보안 원칙을 지키는 인사를 한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하지만, 실제로 전·현직 비서실장의 인사 청탁에 대한 대응 태도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친박계 인사는 “허 전 실장은 인사 청탁을 받으면 ‘그래 좀 있어봐’라며 다독거리는 스타일이지만, 김 비서실장은 ‘그냥 가만히 있어’라며 말문을 막아버린다”며 “인사 청탁을 해도 먹혀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게 김 비서실장의 카리스마”라고 밝혔다.

청와대가 인사 통보를 할 때도 차이가 느껴진다. 허 전 비서실장은 박근혜정부 출범 초기, 대선 활동에 기여한 이른바 ‘개국 공신’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본인이 맡을 직위를 제안하고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반면 김 비서실장은 인사와 관련한 통보를 자신이 직접 하지 않고 철저히 공식 라인을 통해 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위 당직을 맡고 있는 새누리당 한 의원의 보좌관은 “청와대로부터 인사 통보를 받은 사람들이 분통을 못 참고 우리에게 항의 전화를 하기 일쑤”라며 “일부 인사는 3급 행정관으로부터 인사 통보를 받고 ‘불쾌하다’며 항의 전화를 해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일부 인사들의 경우 대선 때 같은 직책을 맡고서도 공기업이나 공공기관장 인사에서는 서로 다른 급으로 인사 통보를 받아 불만을 토로한 사례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김 비서실장에게 직접 항의를 하지 못하고 당을 통해 항의 표시를 하는 것이다. 그만큼 이들에게도 ‘기춘대원군’은 부담스런 존재라는 얘기다.

친박 인사들의 불만이 쏟아지고 있지만, 새누리당 내부에서는 김 비서실장의 인사 스타일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청와대 안팎에서는 허 전 비서실장이 돌연 낙마한 배경을 두고, 그가 민간 금융기관 인사에 깊숙이 개입하려 했다는 설이 유력하게 돌고 있다. 이에 따라 김 비서실장이 권력 2인자로 있지만 개국 공신을 챙기더라도 사심을 갖거나 자신을 드러내면서까지 인사에 깊이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따라서 가뜩이나 늦어지고 있는 공기업·공공기관 인선 등 후반기 인사가 계속 지지부진할 수도 있을 전망이다. 그만큼 친박 내부의 불만도 더 커질 수 있다. 집권 1년 차를 정리해야 할 현 정부의 운명이 ‘기춘대원군’의 어깨에 달려 있는 듯하다.  

 


조응천 공직기강비서관 파워 막강 


지난 8월 초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필두로 청와대 참모진 2기가 출범하면서 청와대 내 권력 구도에도 상당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기춘대원군’이라는 얘기가 나돌 정도로 김 비서실장이 권력을 독점하는 분위기지만, 이 와중에도 ‘뜨는 해’와 ‘지는 해’가 구분되는 모양새다.

민정수석실의 조응천 공직기강비서관은 2기 참모진 출범 후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다. 조 비서관은 곽상도 전임 민정수석과 인사 검증 시스템 구축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만 해도 교체 대상 1순위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홍경식 민정수석 체제가 들어서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 비서실장 모두 공직자의 기강을 엄격히 하고 있기때문이다. 실제 지난 10월 청와대 경제수석실의 행정관 한 명이 기업으로부터 부적절한 접대를 받고 교체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는 자체 감찰 결과 밝혀진 것으로 전해졌다. 언론에서 관련 사실을 보도하자 김 비서실장의 지시로 청와대가 한 달 만인 11월21일 이런 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조응천 비서관이 검찰·경찰을 담당하는 민정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길 것이라는 얘기도 나돈다. 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현재 민정비서관인 이중희 비서관에 대해서는 곽 전 수석 경질 이후 위치가 애매해졌다는 얘기가 많다. 반면 조 비서관의 경우 새누리당 중진 의원들까지도 그의 눈치를 볼 정도라고 한다. 공직 기강에 대한 대통령과 비서실장의 추상같은 의지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정무수석실에선 박근혜정부 초기의 위세를 찾아볼 수 없다. 윤창중 전 대변인 성추행 사건이 터지기 전 정무수석실은 ‘왕수석’으로 통하는 이정현 현 홍보수석 아래 ‘십상시’로 불리는 핵심 비서진이 화려한 진용을 구축했다. 그러나 이 수석이 홍보수석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핵심 비서진 일부도 빠져나갔다. 현재 박준우 수석이 이끄는 정무수석실은 ‘유명무실’한 존재라는 게 여야를 막론한 정치권의 평가다. 심지어 여당에서 “정무장관을 부활시키자”고 제안했을 정도다. ‘문고리 권력 3인방’으로 불리며 정부 초기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던 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 등도 김 비서실장의 청와대 입성 이후 눈에 띄게 조용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게 내부 관계자의 전언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