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그룹 오너들 돈 구하러 다니기 바쁘다
  • 김진령·조현주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3.11.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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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현대·두산·한진해운 유동성 비상…돌파구 마련 위해 총수들 직접 뛰어

중견 그룹의 유동성 위기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면서 경제계에 위기감이 증폭되고 있다. 지난해 웅진, 올해 STX와 동양그룹이 좌초한 데 이어 최근 몇몇 그룹의 유동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한국 경제 전체에 대한 위기감이 번지고 있다. 삼성·현대차·SK·LG·롯데·GS 등 10대 그룹을 제외한 대다수 중견 그룹이 ‘위험하다’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물밑에서 떠돌던 중견 그룹 위험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경제개혁연구소가 지난 11월 초 내놓은 ‘상호 출자 제한 기업집단의 연결 재무 비율 분석’이란 보고서다. 이 보고서에선 연결 이자 보상 배율과 연결 부채 비율을 근거로 현대그룹·한진그룹·두산그룹·동부그룹 등이 유동성 위험에 처해 있다고 ‘콕’ 찍어서 발표했다. 이자 보상 배율이란, 영업이익을 지급 이자 비용으로 나눈 지표다. 이자 보상 배율이 1 미만이라는 말은 기업이 벌어들인 영업이익보다 부채로 인한 지급 이자 비용이 크다는 의미다. 현재와 같은 영업 상황이 계속된다면 지속 가능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이 보고서가 발표된 이후 쉬쉬하면서 퍼지던 ‘○○그룹 위험설’이 공식화됐다. 입을 다물고 있던 신용평가사나 증권사들이 부정적인 평가서를 쏟아내면서 ‘위기설’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 시사저널 포토
■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돈 빌려 사업 확장하다 ‘쓴맛’

동부그룹은 11월17일 3조원 규모의 자구 계획을 발표하면서 자체 구조조정에 들어갔음을 시장에 알렸다. 반도체 제조사인 동부하이텍과 동부메탈을 매각하고, 동부제철의 부동산과 계열사를 매각한다는 것. 이로써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은 30년 가까이 품어왔던 반도체에 대한 꿈을 완전히 접게 됐다.

동부그룹의 건설·철강, 바이오, 반도체·전자, 금융 등 사업 포트폴리오는 국내 재계에 손꼽힐 정도다. 전망 좋은 업종은 모두 꿰차고 있다. 문제는 이처럼 좋은 포트폴리오에도 1990년대 중반 이후 늘 유동성 위기로 고전해왔다는 점이다.

유동성 위기의 근원지는 반도체와 철강 사업이다. 반도체와 철강 사업 투자 결정에는 김준기 회장의 집념이 작용했었다. 인천의 냉연공장에서 출발한 동부의 철강 사업은 외환위기 무렵 충남 당진 고대공단에 냉연공장을 지으면서 판을 키웠지만 그때부터 과다 차입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 와중에 김 회장은 1997년 동부전자를 설립하면서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외환위기로 주춤하던 반도체 사업은 2000년대 들어 비메모리 반도체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2002년 아남반도체를 인수하면서 본격화됐다. 이후 10여 년간 동부는 3조원가량을 반도체에 쏟아부었다. 동부의 반도체 사업은 출발 이후 계속 적자를 내다가 지난해부터 실낱같은 회생 기미를 보였다.

그럼에도 김 회장은 또 한 번 판을 키웠다. 2009년 당진에 전기로(열연) 공장 건설에 나선 것. 열연공장 건설에만 1조2000억원이 들어갔고 이는 대부분 차입금이었다. 여기서 나오는 이자 비용이 동부제철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그러나 김 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올 초 대우일렉트로닉스를 2700억원에 인수했다. 반도체부터 전자까지, 열연·냉연, 바이오, 금융 등 미래 유망 사업을 총집결한 환상적인 사업군이 완성됐다.

문제는 이게 빚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연결 부채 비율이 250.09%에서 2012년 397.57%로 뛰었다. 지난해 연결 이자 보상 배율은 0.3에 불과했다. 김 회장이 그룹의 명운을 걸고 새로 시작한 동부제철이나 동부하이텍의 퍼포먼스가 좋았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대다수 업종에서 1, 2위권 바깥에 있다는 게 문제였다. 김 회장과 비슷한 시기에 또는 뒤늦게 인수·합병을 통해 철강과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현대차그룹의 현대제철이나 현대하이닉스가 짧은 기간에 정상화되고 이익을 내는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어쨌든 김 회장은 집념을 보였던 반도체 사업을 매각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불길’이 동부그룹 전체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나섰다. 계열사 매각을 통해 현재 6조3000억원 규모의 차입금을 2015년까지 2조9000억원대로 대폭 줄이고 부채 비율을 270%에서 170%로, 이자 보상 배율은 1.6으로 개선해 재무 구조 개선 약정을 졸업하겠다는 것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현재 동부그룹의 사실상 주인이 김 회장의 장남인 김남호 동부제철 부장이라는 점이다. 김 회장은 이번 자구안에 “보유 계열사 지분 중 일부를 처분해 1000억원가량의 재원을 확보해 동부제철 유상증자 등에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증권가에서는 부채가 3조원에 달하고 2년 연속 적자를 본 동부제철 경영 정상화를 위한 감자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때문에 업계에서는 김 회장이 감자 이후의 유상증자에 대비한 ‘실탄 확보’에 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동부제철은 동부CNI가 1대 주주고, 동부CNI는 김남호 부장이 지분 18.59%로 1대 주주다. 반면 이번에 매각을 선언한 동부하이텍은 동부CNI·동부건설·동부제철이 대주주다. 동부하이텍에 대한 김 회장 오너 일가 지분은 미미한 수준이다. 계열사 중 부실이 심각한 동부건설은 주요 계열사 중 유일하게 김준기 회장이 1대 주주(33.92%)지만 이번 매각 대상에서는 빠져 있다. 여기서 보듯 김 회장 일가가 이번 구조조정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손해 보는 것은 없다.

결국 이미 경영권 승계를 끝낸 김 회장은 반도체와 철강 중 철강을 택했고, 이번 사태를 계기로 동부제철에 매진하겠다는 선언을 한 셈이다. 김 회장은 구조조정 선언을 한 뒤에도 동부하이텍 매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번 구조조정으로 김 회장 일가의 지배력은 오히려 커질 것으로 보인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경영권 방어 집착하다 위기 맞아

동부보다 더 상황이 좋지 않은 곳은 현대그룹이다. 현대그룹은 2012년 말을 기준으로 자산 총액이 11조7000억원인데 부채가 9조4000억원이다. 연결 부채 비율이나 연결 이자 보상 배율이 주요 그룹 중 가장 안 좋다.

현대그룹이 곤경에 처한 가장 큰 이유는 주력인 해운업이 불황 사이클을 타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상선은 지난해에만 1조원에 가까운 영업순손실을 기록했다. 현대상선 측은 “올해는 지난해보다 사정이 좋아졌고 내년엔 더 나아질 것이다. 내년 상반기까지 돌아오는 회사채 상환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곤경에 처한 것은 그룹 경영권 방어 대책과 관련이 깊다.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우 그룹 경영권 방어를 위해 재무적 투자자와 체결한 파생상품 계약에서 큰 손실을 부담해 영업흑자가 났음에도 2011년, 2012년 연속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한마디로 계열사 중 돈이 될 만한 기업이 없는 것이다.

경제개혁연대는 “이 파생 계약으로 현대엘리베이터에 신용 위험을 전가시켰다”며 현 회장을 상법 신용공여 금지 규정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남편 정몽헌 회장의 사망 후 급작스럽게 회장에 취임해 올해로 취임 10주년을 맞은 현 회장으로선 곤혹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대기업이 파산하면 피해는 전 방위적으로 퍼진다. 사진은 동양증권 피해자들의 시위 모습. ⓒ 시사저널 구윤성
■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M&A 후유증으로 재무 부담 가중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도 그룹의 유동성 위기설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동안 두산그룹 유동성 위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힌 것이 바로 두산인프라코어와 자회사인 ‘밥캣’이었다. 지난 2007년 미국 건설 장비업체인 밥캣 인수 당시 인수 자금이 51억 달러에 달했고 이 가운데 39억 달러가 신디케이트론과 외화 장기 차입금으로 그룹에 막대한 부채 부담을 안겼다.

최근 두산인프라코어가 자회사인 밥캣의 유동성 확보를 위해 4억 달러(한화 약 4250억원) 규모의 해외주식예탁증서(GDR)를 발행하기로 하면서 두산그룹 위기설은 잠시 수그러든 상태다. 두산인프라코어는 11월21일 최대 4억 달러 규모의 해외주식예탁증서를 발행하기 위해 유상증자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공시했다. 이번에 결정된 유상증자는 밥캣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생긴 외화 표시 차입금을 상환하기 위한 것이다.

‘M&A의 귀재’로 불리던 박용만 회장은 그동안 ‘밥캣 후유증’으로 진땀을 빼야 했다. 한때 ‘밥캣의 저주’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밥캣은 두산그룹에 치명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최근 밥캣의 영업 실적이 개선되면서 한숨 돌리게 됐다. 일단 밥캣은 올해 3분기 9144억원의 매출과 806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중국 시장 축소로 고전하고 있던 두산인프라코어의 3분기 실적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박 회장에게 고비는 남아 있다. 두산그룹의 지주회사인 두산과 주력 계열사인 두산중공업의 당기순이익이 올해 3분기에 적자로 전환되면서 그룹 경영에 ‘먹구름’이 끼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 공시에 따르면 두산은 올해 3분기 연결 기준 당기순이익이 225억원 손실로 적자 전환했다.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5조1606억원, 2447억원으로 지난 분기에 비해 11.7%, 35.9%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두산중공업은 3분기 연결 기준 매출액 4조5515억원, 영업이익 2211억원을 기록했지만 당기순이익은 적자 전환해 159억원의 손실을 냈다.

한국기업평가(한기평)는 최근 그룹 분석보고서를 통해 두산그룹 상황에 대해 “그룹 주력사의 M&A 등 지속되는 투자 부담으로 인해 그룹 차원의 재무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와 관련해 한기평은 “최근 5년간  두산의 늘어난 차입금은 대부분 인수·합병에 소요된 인수 자금이었으나 인수 이후 해당 기업의 영업 실적이 부진한 점 등을 감안할 때 영업 흐름을 재원으로 해 차입금을 줄여 그룹 차원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기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해 3월 박 회장 취임 이후 두산그룹 위기설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박 회장은 그룹 유동성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된 ‘밥캣’ 인수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에 대해 두산그룹 관계자는 “박용만 회장 체제에서 위기설이 불거졌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라며 “지난해 건설 경기 불황과 중국 시장 축소로 인해 예년보다 실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그룹을 유동성 위기로 몰아가는 시각에도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며 “내년 회사채 만기 도래분이 1조5000억원 규모라 유동성 위기가 아니냐는 지적이 있는데 두산그룹이 보유한 현금만 해도 2조7000억원에 달한다”고 말했다.

■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
오랜 해운업 불황으로 ‘휘청’

한진해운도 경기 불황의 여파에 직격탄을 맞은 기업 중 하나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해운업이 극심한 불황에 허덕이면서 업계 1위인 한진해운 역시 유동성 위기에 처했다. 위태롭게 버텨오던 한진해운은 결국 11월 만기가 돌아오는 기업어음(CP) 1050억원을 융통하지 못해 지난 10월 말 한진그룹 측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한진그룹이 1500억원을 지원해 급한 불은 껐다.

대한항공은 지난 10월30일 한진해운 주식 15.36%를 담보로 한진해운홀딩스에 1500억원을 빌려줬고, 한진해운홀딩스는 다시 이 돈을 한진해운에 빌려줬다. 또 대한항공은 11월20일 한진해운에 대한 정밀 실사를 마친 뒤 1000억원의 추가 지원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지원으로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이 내세우고 있는 한진그룹으로부터의 ‘계열 분리’가 요원해지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삼남인 조수호 전 회장은 지난 2006년 11월 지병인 암으로 세상을 떠나며 아내인 최은영 회장에게 한진해운의 독립적 경영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남편으로부터 경영권을 이어받아 2007년 한진해운 부회장으로 시작해 2008년 회장직에 오른 최 회장은 줄곧 한진해운의 계열 분리에 힘써왔다.

조중훈 창업주의 장남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그동안 한진해운의 계열 분리에 부정적 입장을 보여왔다. 업계 안팎에서는 이번에 조 회장이 최 회장을 직접적으로 지원하면서 향후 대한항공이 한진해운 경영에 참여할 발판을 마련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최 회장은 한진해운 경영을 맡은 지 4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한진해운의 저조한 경영 실적은 최 회장의 리더십을 뒤흔드는 요소다. 조수호 전 회장 체제였던 2004년만 해도 한진해운은 매출액 6조2000억원, 순이익 6457억원을 기록할 정도로 탄탄한 회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글로벌 금융 위기 여파로 실적이 저조하다. 한진해운은 지난해 6379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고 2011년에는 8238억원의 당기순손실을 냈다. 대규모 당기순손실로 자기 자본이 2조7000억원에서 1조3000억원으로 절반 이상 감소했다. 여기에 선박 도입에 따른 차입금이 불어나 자본 감소 효과까지 더해지면서 부채 비율이 지난 6월 말 기준 775%대로 높아졌다.

최 회장은 최근 한진해운의 주 채권 은행인 산업은행 측에 “회사를 살리는 게 우선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며 ‘경영권 포기’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유동성 확보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경제개혁연구소 측은 2011년 보고서에서 부실 징후가 드러났던 금호·대한전선·웅진·STX·동양그룹 중 금호나 대한전선은 채권단과의 자율 협약을 통해 선제적인 구조조정을 했지만 미적거렸던 웅진·STX·동양그룹은 결국 파국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올해 보고서에 발표된 부실(징후) 그룹의 선제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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