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천주교계 갈등 7월부터 싹텄다
  • 이승욱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3.12.03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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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동 추진하다 청와대가 일방 취소…박창신 신부 발언으로 감정 격화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에는 ‘기불천 교인’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이는 교도소 내에서 통용되는 은어다. 기독교(개신교)와 불교, 천주교 신도들이 정기적으로 교도소를 찾아 재소자의 교화를 위한 집회를 여는데, 이때 신도들은 으레 재소자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안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외부 음식을 가져온다고 한다. 여기에 눈독을 들인 재소자들 중 일부는 매번 종교를 바꿔가며 모든 종교 집회에 참석하곤 한다. 종교의 경계를 넘나들며 신도 행세를 하는 재소자들을 지칭하는 말이 바로 ‘기불천 교인’이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서도 박근혜 대통령의 종교를 두고 이른바 ‘기불천 교인’ 논란이 재연됐다.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박 대통령이 믿는 종교는 없다. 한마디로 ‘무교’다. 하지만 인터넷에 떠돌던 박 대통령의 일부 프로필 자료에는 특정 종교의 신자라고 나와 있다. 이러한 혼돈은 다양한 종교를 두루 경험해온 박 대통령의 행적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2005년 당시 대구 팔공산 동화사 주지로부터 선덕화(善德華)라는 법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4월엔 개신교 단체들이 주관하는 부활절 연합예배 성찬에 참석해 화제를 모았다. 박 대통령과 고 최태민 목사와의 인연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하지만 박 대통령과 천주교의 인연은 더욱 깊고 오래됐다. 박 대통령은 중학생 시절 ‘율리아나’라는 이름으로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박 대통령과 천주교의 인연은 가톨릭 재단인 성심여중·고와 서강대를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사제들이 11월22일 전북 군산시 수송동 성당에서 시국 미사를 봉헌한 뒤 촛불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 연합뉴스
“7월 회동 의제 논의하다 일방 취소”

박 대통령을 둘러싼 기불천 교인 논란은 자칫 ‘영혼 없는 신도’라는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이는 이명박 정권 당시 불거졌던 개신교 편중과 불교계와의 갈등 논란을 연상하면 더욱 그렇다. 최소한 박 대통령이 종교에 대해서만큼은 이전 정권과 달리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는 집권한 지 1년도 채 되기 전에 무너졌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최악의 관계로 치달은 종교는 박 대통령에게 율리아나라는 세례명을 준 천주교다.

11월28일자 동아일보는 청와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다른 종교와의 형평성 때문에 드러내놓고 말은 못하지만 천주교에 대한 대통령의 애정은 매우 각별하다”고 보도했다. 11월22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시국 미사와 당시 박창신 신부의 연평도 포격 관련 발언으로 천주교계와 청와대가 격렬히 대립하는 상황을 수습하는 차원의 발언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청와대와 천주교계의 갈등이 쉽게 수습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양측 간 감정의 골이 생각보다 깊기 때문이다. 그 갈등의 근원은 지난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와대는 7월 당시 주요 종교계 지도자들과 박 대통령의 회동을 추진했다. 하지만 회동은 개신교·불교계와만 성사됐다. 청와대가 천주교계와의 회동을 추진하던 중 박 대통령의 일정을 이유로 돌연 행사를 취소했던 것이다. 그런데 천주교계 안팎에서는 회동 무산이 단순히 대통령 일정 문제 때문만은 아니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천주교 주교회의 관계자는 “(회동 추진 당시) 청와대의 제안으로 양쪽이 협의해 참석 인원과 날짜까지 확정됐다”며 “하지만 구체적인 참석자나 대통령과의 면담 내용 등을 추가로 조율하는 과정에서 회동 자체가 무산됐다”고 말했다. 결국 천주교계가 적극적으로 사태 해결을 위해 나서고 있는 밀양 송전탑 시위나 대선 개입 의혹 등 민감한 정치 현안과 관련한 입장을 표명하려고 하자, 청와대가 갑자기 회동 자체를 취소시킨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된다.

천주교계에 따르면, 청와대와 천주교계 지도자들의 7월 회동이 무산된 이후에 만남을 다시 갖기 위한 추가 협의도 없었다. 천주교계 내부에서는 청와대가 일방적으로 회동을 취소한 것도 상당한 결례지만, 회동을 재추진하지 않는 데도 불쾌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청와대 측은 일부 언론 보도를 통해 “천주교 측과 (회동) 일정을 조율하고 있다”고 밝혀 천주교계와 대조적인 입장을 보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7월19일과 25일 청와대에서 각각 열린 기독교 지도자 오찬 간담회(위 사진)와 불교 지도자 오찬 간담회에 참석해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청와대에 연락해도 ‘알아서 하라’는 말뿐”

표면적으로 지금의 정·교 갈등은 청와대와 천주교계 일각의 갈등으로 비친다. 하지만 정·교 갈등은 불교와 개신교까지 가세하면서 종교계 전반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종교계의 반발이 확산되는 데는 정국 현안을 둘러싼 인식 차이도 있지만, 청와대와 종교계 간의 소통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동안 청와대의 불통을 우려하고 이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외부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비단 새누리당 등 정치권만이 아니었다. 기자와 만난 한 정부 부처 산하 기관의 고위급 인사는 “과거 정권 때는 청와대 비서진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정책과 현안에 대해 협의를 해왔다”며 “하지만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그런 게 일절 없다. 하도 답답해서 어렵사리 청와대 비서진에게 연락을 해도 ‘알아서 하라’는 답밖에 들을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가) 청와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대화는 일절 하지 않은 채 무조건 알아서 하라고 하는 건 공직자들더러 그냥 엎어져 있으라는 말밖에는 안 된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앞서 언급한 천주교 주교회의 관계자도 “이명박 정권 초기에도 특정 종교 편파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됐지만, 그래도 그때는 청와대 비서진이 나름으로 종교계와 소통하는 시스템이 작동했다”면서 “하지만 지금은 이게 고장 났다는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박 대통령이 천주교와의 회동이 무산된 데 아쉬움을 나타냈다지만, 취임한 지 1년이 다 돼가는 상황에서도 회동이 이뤄지지 않는 건 종교계와 소통을 하려는 의지가 부족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종교계와 대립각을 세우는 청와대의 대응 태도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박창신 신부의 연평도 포격 관련 발언이 회자되자,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 비난하며 논란을 키웠다. 새누리당 친박계의 한 관계자는 “청와대가 사건 초기에 이례적으로 강하게 대응하고 나선 건, 논란의 발단이 된 정의구현사제단이 대표성이 없고 일방적으로 진보 편에 선 단체로 봤기 때문인 것 같다”며 “하지만 대통령은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지, 보수적인 단체나 사람의 대통령만은 아니다. 청와대가 종교계와 대립각을 세우려 한 것처럼 비치는 우를 범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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