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절경에 피는 꽃이 아니다, 폐허에서 솟아나는 꽃이다”
  • 조철│문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3.12.03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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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시편> 고은 시인 동행 취재

11월27일 오후 부산일보사 대강당에서 대한불교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이 마련한 ‘성철 스님 20주기 추모 고은 시인 초청 강연회’가 열렸다. ‘선시에서의 성철 게송’을 주제로 한 강연에서 시인은 강당을 꽉 채운 청중과 ‘줄탁동시(?啄同時)’가 있기를 바랐다. ‘줄탁동시’는 안과 밖이 동시에 힘을 기울여야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으로 인용하는 말이다. “어미 닭이 품은 알은 20일쯤 되면 알 속에서 자란 병아리가 밖으로 나오려 알껍데기를 쪼기 시작한다. 이 소리를 기다려온 어미가 거의 동시에 같은 부위를 쪼아 껍데기를 깨뜨려 병아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다. 어미와 새끼의 부리가 만나는 지점은 위험할 수 있다. 잘못하면 새끼가 죽는 것을 아는 어미는 아주 조심스럽다. 부모가, 스승이, 리더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주는 예다. 이 사회가 줄탁동시하듯 해야 한다.”

시인의 부산 행사에 필자가 수원에서 목적지까지 동행했다. 전날 저녁 전화상으로 근황을 여쭈면서 부산 행사를 들먹였는데, 그는 “부산에 같이 가면서 얘기하는 것도 괜찮겠다”며 동행을 허락했다. ‘줄탁동시’하듯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 시사저널 전영기
시작(詩作) 새로 시작하는 ‘어린 시인’

11월27일 오전 8시30분께. 수원역 대합실에서 고은 시인(80)을 찾았다. 따뜻한 대합실 텔레비전 앞에 사람이 많이 몰려 있었다. 그 무리에 고은 시인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약속 장소에 그는 없었다. 전화해보니 플랫폼에 미리 내려와 있다고 했다.

부산행 KTX 승차장은 쌀쌀한 늦가을 바람의 통로였다. 트렌치코트 깃을 세우고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가죽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쓴 한 노인이 그 바람을 타고 노는 듯 가만히 있지 않고 이리저리 오갔다. 추워서 그러려니 했는데 가다 멈추고 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무언가를 관찰하는 듯했다. 다가가 인사를 드리니 마스크를 벗고 장갑에서 손을 빼 악수를 청했다.

인사를 하고 나서도 그는 도무지 어린아이처럼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플랫폼 이쪽과 저쪽을 두어 번 왔다 갔다 했다. 동행은 더 있었다. 스승과 제자 같은 사이라며 그의 오랜 지인이 인사했다. 부산 행사 안내를 맡았다는 지인은 “선생은 때와 장소 가리지 않고 생각하고 관찰하고 메모하고 그런다”고 귀띔했다. 그의 건강 비결은 따로 물을 것이 없어 보였다.

8시55분발 열차가 출발한 지 1시간쯤 후에 대전역을 지났다. 중부 지방에 서설이 내리고 있었다. 차창 밖 설경은 절경이라 할 만했다. 절경을 보는 시인에게 시심이 발동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는 “시는 절경에 피는 꽃이 아니다. 폐허에서 솟아나는 꽃이다”라고 했다. “로마 콜로세움 옆에 커다란 폐허 마센치오 야외극장이 있다. 거기서 내 시를 가지고 문학 행사를 열었는데, 그때 느낀 것이다. 밤중의 대기 속으로 내 시들이 퍼져나갔는데, 폐허야말로 유적이야말로 시가 꽃피어야 할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 2013년은 여러 변화를 안겨준 해였다. 그는 올해 자신을 향해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자로서 의미 있는 행사들을 운명처럼 치렀다. 8월 수원 광교산 자락으로 이사하면서 30여 년 절정처럼 지냈다고 고백한 ‘안성 시대’를 마감했다. 그는 올봄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주로 머물렀다. 4월 그곳 카포스카리 대학에서 명예 펠로십을 받았다. 5월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세계시인대회에 참가했다. 여름에는 칭하이 국제시인대회에 초청받아 중국을 방문했다. 9월에는 22일간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했다. 그렇게 그는 유럽·아프리카·중앙아시아 곳곳을 여행하면서 ‘시의 별똥별들이 밤낮을 모르고 퍼부어 내리는 경험’을 했다.

자갈치시장에서 떠올리는 ‘폐허의 추억’

여행하고 이사하는 동안 폭발하듯 넘쳐난 창작열은 6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그중 539편이 제목이 없다. 이들을 엮은 시집 제목이 <무제 시편>인 이유다. 제목을 달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새로운 시작을 향하는 전 단계라고 할까. 지난 55년의 시인 생활을 정리하고 새롭게 쓰려는데, 55년의 과거보다 이제 막 시작하는 신생아로서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하는 마음을 담으려 했다. 30년의 안성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수원 시대를 열기 위해 탁 던져놓는 시집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번 시집을 내면서 그는 프로필에 너절한 설명들을 다 치워버렸다. ‘시인 생활 55년. 시집 여럿.’ 이게 전부다. 그렇게 한 것도 시인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다짐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가 아닌 시, 시로부터의 내란과 야생, 때로는 시의 역사와 내 시의 몇십 년을 초토화하는 내 폐허주의는 내 시가 시작한 고향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것은 미래의 폐허다. 시의 시작이 있는 텅 빈 곳 말이다.”

부산역에 내려 강연회 장소로 가기 전 점심 식사를 하러 자갈치시장을 찾았다. 이날 부산의 명물 영도다리가 복원돼 개통식이 열리고 있었다. 북적대는 사람들 속에서 그에게 부산과의 인연에 대해 묻자 한국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의 ‘폐허주의’는 전쟁을 겪으면서 만들어진 듯했다.

“전쟁 때 무수한 죽음을 봤다. 시체 치우는 일도 많이 했는데, 인육 썩는 냄새는 다른 동물이 썩는 냄새와 달랐다. 그 냄새를 맡으면서 사람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독성이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데올로기 때문에 친지까지 죽고 죽이는 것까지 볼 수밖에 없었으니 인간을 고상하게 생각했던 지난 생각이 다 달아났다. 내가 그 후 10년 이상을 불면증에 시달린 것도 전쟁 때문이었다.”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던 농촌 소년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내려오면서 처음 부산 땅을 밟았다. 끔찍했던 죽음의 기억으로 자살 미수를 반복하게 했던 세월을 지나면서 한때 승려로 살다가 시인이 된 고은. 그는 성철 스님을 기리는 강연을 앞두고 부산의 냄새를 새롭게 맡았다.

“수원역에서 마신 공기, 여기서 마시는 공기. 다 새로 마시는 공기다. 난 종말론 같은 것을 우습게 생각한다. 사람이라면 자기가 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의 운명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존재다.”

11월27일 부산일보 대강당에서 열린 성철 대종사 열반 20주기 추모 강연회에서 고은 시인이 강연을 하고 있다. ⓒ 시사저널 전영기
“아주 순결한 상태에서 ‘취기’와 만나 쓴다”

식사는 장어구이로 했다. 주인이 재첩국을 내오자 시인이 반겼다. 재첩국을 한 숟가락 떠먹은 뒤 구수한 추억 하나를 띄웠다. “젊은 시절 부산에 오면 광복동시장에서 술 먹고 여관에서 자곤 했다. 새벽 네 시쯤에 ‘재첩국 사이소’ 하는 소리에 잠을 깨곤 했다. 그때 먹었던 ‘허연 국물’의 재첩국을 잊지 못한다.” 끔찍한 죽음의 냄새를 씻어준 것 중에는 재첩국 냄새도 있었던 것이다.

소문난 주객인 시인은 반주로 청한 소주 한 잔을 아껴 마시며 “좋네” 하는 추임새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시인은 “난 고대 이백하고 형제간이다. 어제도 후배들하고 좀 마셨다”며 웃었다. 또 “예전에는 양주도 많이 마셨는데, 이제는 옛 친구에게로 돌아왔다. 막걸리·소주를 즐긴다”고 덧붙였다. 술과 관련해 시인이 5년 전 그림 전시회 때 한 말이 생각나 물었다. 술 없이도 취할 수 있는 세상은 만나보았는지.

5년 전인 2008년 시인은 그림전을 열었다. 당시 전시회를 열게 된 배경을 털어놓았다. “등단 50주년 기념행사였다. 내가 어린 시절 화가 지망생이었다는 걸 후배들이 알고 추진한 것이다. 등단 이후 처음으로 붓을 드는 것이어서 망설이다가 미루자는 요청도 했다. 중학교 시절 미술부 활동을 했을 때 실력으로 하는 일이니 깜깜했다. 한 일간지에서 후원하고 그러니 할 수 없이 아는 조각가 작업실에 가서 그해 여름 발가벗다시피 하고 100여 편의 그림을 그려냈다.”

당시 시인은 인사말에서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화가가 되었을 것이다. ‘술 없이도 취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으로 그린 것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그는 “실제로 우주 안에는 술 없이도 취하는, 정말 취기라는 것이 널려 있다. 그것과 자신이 만나면 취하는 것이다. 내가 그러고 싶다고 한 것은 겸손한 말이고, 난 이미 그런 경험을 해왔다. 난 술 먹고 쓰는 것이 아니라 맨 정신, 아주 순결한 리얼한 상태에서 ‘취기’와 만나 쓴다”고 말했다.

문단의 스승으로 불리는 80세 시인은 스스로 ‘유년’이라며 부끄러워했다. 지난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새 깨달음으로 미래를 향해 시작하는 삶이라고도 했다.

아직도 ‘한국의 대표적인 참여 시인’이라고 소개하는 곳이 있다고 하자 그가 답했다.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말을 강조한 이유는, 여기 있는 것은 따로 없다는 말이다. 시가 그렇다. 일상의 언어를 가지고 항상적인 진리를 밝히는 것이다. 소설은 허무맹랑한 것을 쓸 수도 있지만 시는 현실에 발 디디고 쓰는 것이다. 현실을 외면하면 시가 아닌데, 참여 시인이다 아니다 이런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런 그이기에 ‘무제 시편 133’에서 ‘낯설어야 해. 낯익으면 더 이상 낯익을 것 없지. 자꾸자꾸 목 타서 배고파서 낯설어야 해’라고 노래했다. 이탈리아에서 영감을 얻은 새로운 시 쓰기의 전망에 대해서도 “시는 망상이 아니라 엄연한 내 하루하루이기를 바라며 모국어는 또다시 어린 나를 호명한다. 페트라르카는 ‘이탈리아는 시인을 불러내는 땅’이라 했다. 나는 한반도의 아픈 영광이야말로 때려 죽여도 때려 죽여도 살아나는 시의 땅이라고 되받는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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