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옹> <올드보이>가 창고에서 나왔다
  • 라제기│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
  • 승인 2013.12.03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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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재개봉·지각 개봉 러시…새 영화 제작 게을리한다는 지적도

최근 극장가는 1990년대로 돌아갔다. 이와이 순지 감독의 <러브 레터> <4월 이야기>, 뤽 베송 감독의 <레옹>,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다시 개봉관에 걸렸다. <올드보이>는 개봉 10주년을 기념한다는 수식을 붙여 재개봉했는데 박 감독이 인터뷰에 적극 나서는 등 마케팅에도 공을 꽤 들였다. 그만큼 재개봉이 돈이 된다는 의미다. 심지어 2003년 개봉했던 예술영화 <몽상가들>(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도 내년 초 다시 개봉할 정도다. “베르톨루치 감독의 신작 <미 앤 유>의 개봉을 기념해 재개봉한다”는 게 수입사의 설명이지만 영화계는 최근 국내 극장가에 거세게 불고 있는 재개봉, 지각 개봉 바람을 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몽상가들>의 재개봉은 ‘창고 영화’ 전성기를 상징한다. 예술영화로서 당시 흥행 성과를 거뒀지만 대중적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영화도 재개봉 대열에 합류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재개봉 영화에 환호하면서 국내 개봉 시기를 놓쳤던 묵은 영화도 잇달아 개봉했다. <라붐>과 <동사서독 리덕스>가 대표적이다. 1980년 작인 <라붐>은 국내 관객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지만 정작 국내에서 개봉된 적은 없다. <라붐2>가 1986년 개봉하며 <라붐>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고 비디오테이프와 TV 방영으로 관객과 만났다. 전학한 13세 소녀가 여러 남자와 로맨스를 형성하면서 이어지는 달콤한 방황이 당대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고, 그래서 수입도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영화계의 추정이다.

<동사서독 리덕스>는 <동사서독>(1995년)의 감독판이다.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이 자신의 입맛에 맞춰 편집을 새롭게 하고 디지털 기술로 영화를 손질해 2008년 칸 영화제에 처음 공개하며 화제를 뿌렸다. 한 국내 영화사가 비싼 돈을 지불하고 수입했으나 흥행 불투명성 때문에 개봉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왕자웨이 팬들 사이에선 <동사서독 리덕스>의 국내 개봉은 영영 불가능할 것이란 예측이 떠돌았으나 창고 영화 개봉 붐을 맞아 이 영화도 극장에서 빛을 보게 됐다.

벨기에 영화 <미스터 노바디>(2009년)와 일본 영화 <두더지>(2011년)도 뒤늦게 개봉 열차를 탔다. <미스터 노바디>는 <토토의 천국>과 <제8요일>로 국내에 알려진 자크 반 도마엘 감독의 최근작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가며 한 남자의 뒤엉킨 운명을 복잡다단한 구성으로 묘사한다. 2009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됐을 때 ‘개봉과는 거리가 멀다’는 평가를 받았다.

<두더지>는 일본 예술영화의 최전선에 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 소노 시온의 작품이다. 아버지를 죽인 한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두더지>에 대해선 일본 영화에 문턱이 높은 국내 극장가에 선보이기 힘들 것이라는 예측이 따랐다.

영화 의 한 장면. ⓒ ㈜미디어캐슬 제공
중년 관객과 IPTV가 열기 부채질

‘창고 영화’ 붐은 중년 관객이 불러일으켰다. 2년 전부터 중년 관객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극장가의 ‘추억 팔기’ 마케팅도 점점 활발해지는 형국이다. 현재의 중년 관객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청소년기와 20대 시절 대중문화, 특히 영화를 많이 향유한 연령대다. 이들이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엔 영화 동아리가 학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동아리 중 하나로 꼽혔다. 신문방송학과 진학을 꿈꾸는 학생이 많았던 세대이기도 하다. 이들은 신승훈·김건모·015B 등이 음반 판매 100만장을 곧잘 달성하던 대중문화 전성기에 청춘을 보냈다. 자녀를 취학시킨 후 시간적 여유가 생긴 이들 세대가 극장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94학번 대학생을 주인공으로 삼은 tvN의 복고풍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열풍도 이들의 대중문화 상품 소비와 무관치 않다.

이들이 청춘이던 시절 한국에도 예술영화 붐이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 <노스탤지아> 등을 어둠 속에서 지켜보며 영상미를 배워가던 이들은 왕자웨이의 아름다운 영상에 열광했다. 지난 8월 열린 <왕가위 걸작 기획전>은 매 상영회마다 거의 모든 표가 팔리는 등 예상 밖의 성황을 누렸다. 청춘을 왕자웨이 영화와 함께 보냈던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 관객의 호응 덕분이다. 왕자웨이를 국내 대중에게 알린 <중경삼림>과 그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 영화라는 호평을 듣던 <화양연화>는 <동사서독 리덕스>와 함께 국내 극장가를 다시 찾는다. 왕자웨이 영화의 잇단 재개봉과 지각 개봉은 지금의 창고 영화 붐을 이끄는 관객층이 누구인지를 암시해준다.

창고 영화의 개봉이 잇따르는 이유로 IPTV의 등장을 빼놓을 수 없다. 비디오테이프의 퇴장과 DVD 시장 붕괴로 국내 부가 판권 시장은 사실상 소멸됐다. IPTV의 VOD 서비스가 부가 판권 시장을 살리면서 오래된 영화나 상업성이 떨어지는 예술영화도 빛을 보고 있다. 선정적인 소재를 다루거나 야한 장면이 들어간 예술영화는 안방에서 짭짤한 수입을 올리게 됐다.

특히 극장 개봉과 IPTV 공개가 함께 이뤄지는 이른바 ‘동시 개봉’ 이벤트 등이 창고 영화의 개봉을 부추기고 있다. ‘동시 개봉’ 영화의 경우 보통 VOD 1회 다운로드할 때 1만원을 지불하게 된다. 다운로드 비용이 2000원 정도 하는 옛날 영화도 극장에서 재개봉하면 1만원짜리 VOD로 둔갑하기 일쑤다. 지난 8월 재개봉한 리샤오룽(李小龍) 주연의 추억의 쿵푸 영화 <정무문>이 대표적이다. 이 영화는 재개봉과 함께 IPTV에서 ‘동시 개봉’ 서비스를 하며 다운로드 요금을 1만원씩 받았다. 영화 한 편을 개봉하는 데 드는 최소 비용은 보통 1억원 정도다. 아끼고 아끼면 5000만원가량이 든다. 재개봉이나 지각 개봉에 의해 1만명 정도가 VOD로만 관람해도 어느 정도 돈을 벌 수 있는 셈이다. IPTV 가입자는 지난 5월 700만명을 넘어섰다.

다양성 영화 시장 더 좁아져

추억의 영화들이 극장가에 몰리면서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 영화사가 ‘추억 팔기’에 몰두하면서 정작 새로운 영화 상품 개발을 게을리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그것이다. 최근 충무로는 스릴러와 사극 영화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간혹 로맨틱 코미디가 나올 뿐 멜로 영화는 전무하다. 늦가을 낭만을 찾는 관객을 위해 올해 영화계가 내놓은 상품이 <8월의 크리스마스>라 할 수 있다. 당대의 감수성으로 관객의 정서에 호소하기보다 추억의 영화로 퇴행적 관람을 부추기고 있는 셈이다.

창고 영화들이 속속 개봉하면서 다양성 영화(독립영화·예술영화 등) 시장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작은 영화끼리 싸우던 좁은 시장이 더욱 좁아지는 모양새다. 11월27일 다양성 영화의 1일 박스오피스를 보면 <러브레터>가 2위, <올드보이>가 3위에 올랐다. IPTV 호황으로 영화 수입이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서 옛 영화까지 앞다퉈 시장에 뛰어들며 다양성 영화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는 의견이 많다.

후유증을 예상하는 목소리도 벌써 나온다. 창고 영화의 ‘묻지 마 개봉’이 영화 산업에 독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영화를 주로 수입하는 한 영화사 대표는 “관객의 향수와 IPTV 호황에 기대 무리하게 수입하고 개봉했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다. 예전 DVD 시장이 처음 열릴 때 고전 영화의 마구잡이 수입과 개봉이 이뤄졌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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