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 공화국’ 랜드마크에 욕망이 들끓다
  • 이규대 기자·이혜리 인턴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3.12.11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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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지배하는 3.53㎢ ‘특별구’ 대치동 전국 학부모 선망과 동경의 대상

“대치동을 격파하지 않았다.” 승자(勝者)는 이렇게 말했다. 2014학년도 수능 자연계열에서 만점을 따낸 전봉열씨(20)의 얘기다. 자신의 성과가 가난을 극복한 ‘인간 승리’의 결과로 잘못 보도되자 이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고등학교 때 인강(인터넷 강의)을 수없이 들었고 반수, 삼수 모두 서울의 유명 학원에서 했다”고 밝혔다. 전씨는 자신이 사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을 ‘대치동’이라는 공간을 끌어들여 표현했다.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라는 상징성이 그의 심리에 강렬히 각인돼 있었던 것이다.

대치동의 영향력은 면적 3.53㎢의 법정 행정구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금 대치동은 ‘사교육 공화국’ 대한민국의 심리적 랜드마크다. 하나의 상징이자 기호로 군림한다. 시민들의 ‘마음의 영토’를 장악하고 있다. 대치동에 있든 그렇지 않든, 교육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학부모와 학생의 마음에는 대치동이라는 공간이 새겨져 있다. 올해의 수능 만점자가 대치동을 언급한 일은 우리 사회의 잠재의식을 그대로 드러낸 현상인 셈이다.

ⓒ 시사저널 최준필
올해도 어김없이 수능이 치러졌다. 수험생들의 대학 입시 레이스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뜨거운 공간이 대치동이다. 논술학원이 성황을 이루고 각종 입시설명회가 줄을 잇는다. 수능이 끝나도, 수은주가 떨어져도 대치동의 열기는 식지 않는다. 오히려 ‘대목’인 겨울방학을 맞아 한껏 고조될 일만 남았다. 강남 한복판에 자리 잡은 ‘사교육 천국’은 오늘도 밀려드는 학부모와 학생으로 분주하다.

대치동은 어떻게 대한민국 사교육의 상징적 장소로 자리매김했을까. 적어도 1990년대 이전이라면 대입 고사 만점자가 ‘대치동’을 언급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대치동은 ‘사교육 불패(不敗)’ 신화를 추동하는 엔진이다. 대치동이 한국 사회의 변화에 긴밀하게 대응하며 몸집을 불리고 위상을 확대해온 결과다.

대치동의 성장 서사는 그 자체로 한국 교육 정책의 표류기이자 중산층 시민의 욕망이 밴 드라마

다. 올해 수능이 마무리되고 학생들의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직전인 지금,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대치동 코드’에 주목하는 이유다.

과거 대치동은 서울에 속하지 않았다. 1963년 서울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경기 광주군 언주면 대치리’였다. 그 전까지 강남 일대에는 드넓은 논밭이 깔려 있었다. 한국전쟁 후 1950년대에는 서울 도심에 채소를 공급하는 곳이 바로 강남이었다고 전해진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일어난다. 강남 개발이 시작됐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포문이 열렸다. 지하철 2호선을 뚫고 테헤란로를 닦아 교통에 숨통을 텄다. 강남 반포동·압구정동·청담동·도곡동이 ‘영동아파트지구’의 일부로 묶인 것을 시초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광복 이후 50년 서울 개발의 역사를 기술한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의 저자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교수는 ‘강북 억제책’ ‘강남 개발 촉진책’의 주요 수단이 ‘명문고 이전’이었다고 지적한다. 교육은 당시에도 인구 이동의 유인으로 활용될 만큼 시민들에게 민감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때 강북의 명문고 다수가 강남 신시가지로 옮겨간다. 정동에 있던 경기고가 삼성동으로 이전한 것이 대표적이다. 대치동의 경우 1904년 설립된 전통의 사학 휘문중·고가 자리 잡는다.

강남은 1980년대를 거치며 서울의 새 부도심으로 급성장한다. 신흥 명문고가 다수 설립되며 강남·서초구를 중심으로 한 ‘8학군’이 형성된다. 그러나 이것이 곧바로 강남권의 사교육 진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전두환 정권이 과외 및 재학생 학원 수강을 금지하는 등 사교육 억제 정책을 강력하게 집행했기 때문이다. 족쇄는 1989년에 풀린다. 1990년대가 되자 강남 일대에서 사교육이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압구정동이나 청담동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더뎠던 대치동 일대를 중심으로 학원가가 조성됐다.

전문 학원 중심의 ‘다품종 소량 생산’ 교육

이때까지만 해도 대치동은 사교육의 ‘대세’가 아니었다. 과거 유명 대형 학원이 있었던 곳은 서울의 도심인 ‘사대문 안’이었다. 제5공화국 정부가 재학생의 학원 수강을 금지하자, 사교육은 재수생을 중심으로 발전한다. 비서울 출신 재수생들에게 접근성이 좋았던 서울역·노량진 일대가 사

교육 문화를 대표하는 곳이 됐다. 이를 바탕으로 노량진이 1990년대 ‘학원의 메카’로 부상할 수 있었다.

노량진과 강남의 사교육 문화는 달랐다. 그 태생부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노량진 학원은 서울과 비(非)서울을 아우를 수 있는, 다수 재수생을 대상으로 한 대중 강의 방식이 주류였다. 하지만 강남 사교육은 1980년대 ‘대학생 몰래 과외’에 그 연원이 있다. 부유한 고소득층 자녀를 대상으로 한 맞춤형 강의로부터 시작됐다.

교육평론가 이범씨는 “1990년대 초반 입시학원보다 규모가 작은 보습학원 및 속셈학원이 인가되기 시작하면서, 강남 일대에는 비교적 높은 수강료를 받는 중소 학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다수보다는 소수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정 과목을 전문적으로 교습하고 관리하는 방식이었다.

유명 대형 학원 중심의 노량진 학원가가 ‘소품종 대량 생산식’이었다면, 전문 학원 중심의 강남 학원가는 ‘다품종 소량 생산’식이었던 셈이다. 이범씨는 “1990년대 후반이 되면서 강남이 노량진에 비해 평균적인 강사의 수준도 높고, 강사들의 수입도 높다는 것이 사교육계의 상식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특히 2000년대 초반 본격화된 ‘인강’(인터넷 강의) 보급이 강남 사교육의 위상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 인강 열풍을 주도하며 학원업계의 ‘공룡’으로 떠오른 업체 상당수가 대치동에서 태동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그 의미를 ‘강남 강의의 전국화’에서 찾는다. 강남 지역 인기 강사들의 강의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효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사교육 시장에서 강남의 영향력은 초고속인터넷망을 타고 확대돼나갔다. 과거 대형 학원이 쥐고 있던 대중 강의의 헤게모니를 ‘강남 스타일’의 인강이 상당 부분 잠식했다.

대치동 코드의 정수는 ‘관리’

하지만 대치동이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로 우뚝 서게 된 핵심 요인은 따로 있다. 대치동 학원가 특유의 문화가 2000년대 이후의 한국 사회 구성원들, 특히 중산층 학부모의 욕망과 정확히 조응하는 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치동 코드’가 갖는 진정한 힘은 여기서 나온다.

명문대 진학에 최적화된 ‘관리형’ 사교육이 대치동을 ‘사교육 1번지’로 만들었다. ⓒ 연합뉴스
한국교육개발원의 통계에 따르면 1990년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33.2%였다. 10년 후 이 수치는 68%로 껑충 뛴다. 2005년부터는 고등학생 10명 중 8명이 대학에 가는 시대가 열린다. 1990년과 2005년 사이, 딱 절반에 해당하는 시기에 IMF 외환위기가 있었다. 외환위기는 사교육 시장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학원 강단에 섰던 서울 송파구 청산수학원 최영석 원장은 그때를 이렇게 술회한다. “(IMF 위기는) 믿을 건 자신뿐이라는 풍조를 만들어냈다. 조직이 자신을 더는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자명한 사실을 너무나 아픈 방식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녀 교육에서 목숨을 건 ‘대학 진학열’과 ‘전문직 선호’라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1990년대 후반 학원가에서는 “예전 같으면 학원 문을 안 두드렸을 법한 학생들이 이젠 너도나도 대학 가겠다고 나선다”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대치동 사교육의 정수는 ‘관리’에 있다. 언젠가부터 대치동 학원은 단순히 공교육을 보충하는 곳이 아니게 됐다. 명문대 진학이라는 절대 목표에 도달하는 길을 제시하는 곳, 이를 위한 솔루션을 제시하고 그에 맞게 학생을 관리해주는 곳이 됐다. 소규모 전문 학원 중심의 서비스 구조, 학부모의 막대한 재력이 이런 구조의 정착을 가능케 했다. 대치동 사교육은 공교육의 보완재가 아니다. 대치동 학부모들에게 사교육은 공교육이 보장하지 못하는 ‘명문대 입학’을 가능하게 하는 대체재다.

공립학교 교사 출신으로, 20여 년간 대치동에서 과외 수업을 해온 한 강사는 이렇게 말한다. “1990년대만 해도 대치동 학원은 학교 공부를 보충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대치동 사교육이 공교육을 본격적으로 흔들기 시작했다. 주객이 완전히 전도됐다. 위기를 맞은 공교육은 사교육에 대항하는 경쟁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교사들을 계량화된 수치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학교 현장에서 교사에 대한 존경은 땅에 떨어졌다. 지금 대치동에 공교육 교사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치동 부모의 욕망은 곧 전국의 다수 중산층 부모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 많은 학부모가 자녀가 명문대 진학을 바탕으로 향후 고소득 전문직으로 진출하기를 바랐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각자도생’의 중요성을 깨달은 학부모들에게 대학 입시의 중요성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치동 사교육은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 됐다. 많은 학원 관계자는 2000년대 초반 이후 사교육 시장 전반이 대치동과 같은 ‘관리형’을 닮아가는 추세라고 말한다.

12월4일 학생들이 대치동 학원가를 지나가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불안정’ 입시 ‘불안’ 해소하려 대치동 찾아

대치동이 사교육 1번지로 자리매김한 것은 ‘학력고사 이후’의 입시 제도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수능이 등장하기 전 대학 입시는 단순 암기 위주였다. 과거 전국 각지의 비평준화 명문고들이 명성을 드높인 데서 알 수 있듯, 단순 암기식 교육에서는 공교육의 ‘야자(야간 자율학습)’가 제공하는 자기 학습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사교육의 힘을 빌릴 유인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다.

암기 위주 교육은 사회적으로 자주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이를 혁파하고자 1993년 수능 제도가 도입된다. 암기 능력 위주의 평가를 벗어나 대학 교육 수학에 필요한 사고력과 응용력 등을 평가하겠다는 시각이 지속적으로 확대됐다. 문제는 그런 능력을 공교육이 배양하는 것도, 어떤 일원화된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 학력고사 체제 이후 한국의 대학 입시 제도는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며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혼란을 불러왔다.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온라인상담소

‘노워리상담넷’을 운영하는 박재원 소장은 “상담을 청하는 학부모 대다수가 불안감을 호소한다”고 말한다. 워낙 자주 바뀌는 입시 제도 탓에 자녀의 대입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두려움을 느끼는 학부모가 많다는 것이다. 박 소장은 “입시 제도가 변화할 조짐이 보이면 대치동에서는 그와 관련된 사교육 상품을 기가 막히게 만들어낸다. 다른 지역 학원들이 기존의 관성을 버리기 힘든 반면, 소규모 전문 학원 중심의 대치동은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2000년대 이후 대학 입시는 전형 방식 면에서도 다양화됐다. 학교 공부 이외의 평가 기준을 입시에 도입하겠다는 취지였다. 수시 모집 전형 확대, 입학사정관제 신설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사교육 시장 관계자들은 공교육을 통해서는 이런 전형 방식을 대비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한다. 대치동의 한 학원 강사는 “논술이나 면접, 이른바 ‘스펙’을 갖추는 것을 공교육이 과연 감당할 수 있겠나. 학부모 입장에서는 당연히 사교육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변화된 대입 전형에 대비하는 데에도 대치동의 맞춤형 사교육이 적합하다는 것이다. 현재 대입 전형의 종류는 3000개가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문제는 대치동 사교육이 대치동을 벗어나서는 ‘수요-공급’의 접점을 찾기 어렵다는 데 있다. 소수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 맞춤식 사교육은 일반 사교육에 비해 훨씬 비쌀 수밖에 없다. 이런 소규모의 학원이 대량으로 공존하는 형태의 학원가가 존속되려면 서울 강남권처럼 사회적으로 부유한 계층이 소비자로 있는 곳이어야 한다.

2011년 강남구의 초·중·고등학교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78만원 상당이다. 전국 평균이 24만원인 것과 비교해 3배가 넘는다. 고액 과외나 컨설팅 비용 등과 같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교육비를 포함하면 그 차이는 더욱 클 것으로 예측된다. 2000년대 후반부터 2011년까지 대치동에서 강의를 했던 최영석 원장은 “대치동 사교육은 다른 어떤 지역의 그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대치동을 벗어나서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12월4일 대치동 학원가 일대 도로에서 학생이 마중 나온 부모의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가닿지 못할 가능성, 가당치 않은 불가능성

결국 대치동식 사교육은 돈을 가진, 아니면 교육 때문에 일반적인 수준 이상의 교육비 지출을 감내하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적인 서비스인 셈이다. 그럼에도 3.53㎢에 불과한 ‘사교육 특구’는 대한민국의 교육 문화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대한민국 가정의 다수가 대치동처럼 교육시킬 수 없음에도, 대치동과 같이 교육시켜야 명문대에 합격할 가능성이 커지도록 시스템이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시인 오은은 <부르주아>라는 시에서, 현대판 ‘부르주아’의 목소리로 이렇게 노래했다. ‘그렇게 우리는 가닿지 못할 가능성으로, 가당치 않은 불가능성으로 남는다. 그게 바로 우리다.’ 대치동 사교육은 21세기 대한민국이 잉태한 부르주아 문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인의 문장을 빌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대치동은 대다수 학생·학부모에게 가닿지 못할 가능성으로, 가당치 않은 불가능성으로 남는다. 그게 바로 대치동 사교육이다.’ 과연 대치동은 격파되지 않는 것일까, 격파되지 못하는 것일까.  


대형 학원 흔들려도 ‘대치동 신화’는 끄떡없다 


2000년대 초·중반 사교육 붐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 중심에는 특목고 신드롬이 있었다. 특히 정원이 적은 과학고보다는 외국어고(외고) 입시를 중심으로 학원가가 불타올랐다. 한 학원 강사는 “외고에 가면 내신 성적 면에서 불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다들 외고를 원했다. 선발된 집단 안에서 공부하다 보면 내신이 중요한 서울대까지는 아니어도 수능을 잘 봐 연·고대 정도는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팽배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대학 진학 상황을 보면 외고 출신들의 명문대 진학률이 매우 높았다.

특목고 열풍은 중학생들, 나아가 초등학생들도 너나없이 사교육으로 몰려드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특히 2007년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사교육 시장은 기대감으로 들끓었다. 보수 성향의 정부가 집권하면 사교육을 육성하는 정책을 펼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때 서울 각지의 주요 대형 학원들은 해외 자본을 등에 업고 급격하게 기업화한다. 표준화된 교육 시스템을 확보해 전국 각지에 지점을 설립하는 프랜차이즈형 학원으로의 진화를 모색했다. 일부 해외 자본은 한국형 프랜차이즈 학원 사업 모델을 향후 중국에 적용할 목적으로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했다고 전해진다.

예상은 빗나갔다. 이명박 정부는 특목고 입시에서의 수학·영어 시험을 단계적으로 금지시켰다. 사교육 억제책이었다. 학원가에서는 “촛불 정국으로 타격받은 정권이 사교육을 잡는 것으로 지지를 확보하려 한다”는 말이 돌았다. 당시 특목고 입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확장을 준비하던 대형 학원의 수강생 수는 2009년 이후 격감했다. 사교육 시장 확장을 예상하고 외부 자본을 끌어들여 대대적으로 외형을 불린 학원들은 엄청난 손실을 봤다.

대치동은 달랐다.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 여파로 시장 위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치동 신화’는 굳건했다. 한 학원 관계자는 “다른 지역 대형 학원들은 당장의 입시 제도에 충실한 형태로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제도가 변화하면 학생이 우수수 떨어져나간다. 하지만 대치동은 맞춤형 교육을 제공하기 때문에 제도 변화의 여파를 덜 받는다”고 말했다. 대입 제도가 혁명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이상, 명문대 입시를 위한 맞춤형 교육을 제공하는 대치동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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