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두 건의 판결
  • 김선우 | 시인 겸 소설가 ()
  • 승인 2013.12.11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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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해고자들을 처음 만났을 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회사를 위해 평생 일해온 노동자들을 일회용 부품처럼 쓰고 버리는 그런 회사에 뭐 하러 돌아가려고 애쓰냐고. 그때 필자가 들은 첫 대답은 이랬다. “억울해서요.” 그 한마디에 필자는 앞서 그런 질문을 한 내가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워졌다. 이들의 길고 고단한 싸움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그제야 보였다. 이것은 단지 밥그릇 싸움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고자 하는 싸움이구나.

약자들이 자기 밥그릇을 지키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밥그릇의 정의로운 분배는 한 사회 공공선의 기초이므로. 정리해고, 비정규직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누구나 이들처럼 억울하게 해고될 수 있다. 이들이 승리해 회사로 돌아가는 것은 다른 무수한 잠재적 부당 해고자들을 위해서라도 꼭 이뤄야 하는 일임을 그때 깨달았다. 사람으로서 받아야 하는 기본적인 예의가 송두리째 실종되어가는 사회, 그러므로 더더욱 누군가는 희망의 증거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2009년 쌍용차 옥쇄 파업 현장을 담은 영상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알리라. 거기는 전쟁터였다. 힘 가진 이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사람을 짓밟는지, 상식 있는 사회라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국가 폭력의 현장이었다. 조현오 당시 경찰청장이 위법하게 공권력을 투입해 벌인 그 끔찍한 과정들은 이미 청문회에서 드러났다.

얼마 전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에게 떨어진 46억원 배상 판결을 보고 필자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회계 조작과 기획 파산에 이은 정리해고로도 모자라 해고 노동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한 회사의 뻔뻔함도 그렇지만, 파업 노동자들에게 손배소를 제기한 경찰이라니! 경찰은 2009년 파업 진압 당시 사용한 헬기와 경찰 장비 손상, 경찰들의 치료비 등의 명목으로 13억원 손해배상을 청구했는데, 법원은 전면적으로 경찰의 손을 들어주었다. 어떻게 이런 판결이 나올 수 있을까. 평범한 보통 사람인 필자가 가진 상식으로는 위법하게 폭력·과잉 진압을 한 경찰이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위자료를 배상해야 할 일이 아니었을지 궁금했다.

5년째 길거리를 떠돌고 있는 해고자들에게 떨어진 46억 손배 판결에 이어 또 기막힌 소식이 날아들었다. 12월2일 쌍용차 김정우 전 지부장에게 징역 10월의 실형이 선고되었다. 대한문 앞 쌍용차 해고 노동자 천막 농성장 철거를 방해했다는 죄목이다. 스물네 분의 영정이 모셔진 대한문 분향소를 강제 철거하고 화단을 설치하는 것을 온몸으로 막다가 연행된 그. 이번에 당연히 나오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판결은 또 뭔가. 이 사회에 ‘법’과 ‘정의’라는 말이 여전히 통용되어도 되는 것일까.

대한문 분향소. 거기는 국가가 보장하지 못한 사회안전망에서 벼랑 끝까지 밀려난 약자들이 스스로의 안간힘으로 만들어낸 한국적 사회안전망의 최전선이었다. 그곳에서 간신히 서로를 지탱하던 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온몸을 던진 사람, 동료들을 더는 죽음으로 내몰지 말라고 40일이 넘는 단식으로 호소하던 사람. 정작 감옥에 가야 할 사람들은 버젓이 돌아다니는데, 김정우 그는 대체 왜 감옥에 있는가. 도대체 어떤 나라가 살고자 몸부림치는 자기 백성들에게 죽으라, 죽으라고 독배를 들게 하는가.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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