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수보다 품질을 높여라
  • 이승욱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3.12.24 17:5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품앗이 입법’ ‘묻지 마 입법’은 이제 그만!

국회 상임위원회별 법안심사소위원회의 개회를 코앞에 둔 지난 12월 초, 국회 의원회관 복도 사이로 서류 뭉치를 수북이 실은 카트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일부 상임위원회 위원장과 간사 의원실 관계자들이 끌고 다닌 이 카트에는 법률안 서류들이 잔뜩 실려 있었다. 카트는 법률안 제출을 앞두고 공동 발의를 할 의원들의 서명을 받기 위해 여러 의원실을 도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떤 의원실 관계자는 법률안 내용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공동 발의자 명단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통상 법률의 제·개정은 국회의원이 대표 발의를 하는 것으로 첫 단추를 꿴다. 그런데 법률안의 상당수가 기존 법률의 단어나 용어를 고치는 수준이라고 한다. 이는 법안 발의자를 남발하는 ‘벼락치기 입법’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한다는 게 국회 내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앞서 언급한 카트에 실린 법률안의 벼락치기용으로 만들어진 법률인 것이다. 야당 소속의 한 의원실 보좌관은 “연말이 되면 국회사무처나 시민단체가 의정 활동 평가를 하는데, 국회의원의 법안 발의 건수나 가결 건수가 수상 여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며 “일부 위원장과 간사들은 단순히 단어 몇 자를 고치는 법률안 대표 발의를 독점하고 일부 의원은 굳이 공동 발의자로 이름을 올리지 않아도 되지만 여기에 응하는 것이 관례가 됐다”고 말했다.

© 시사저널 박은숙
의정 활동 평가를 손쉬운 정량적 평가에 의존하다 보니 의원들은 법안의 질적 수준이나 내용은 차치하고 무조건 건수에만 매달리는 폐해가 이어졌다. 이런 우려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계속 나오고 있다. 심지어 한 언론사 조사 결과, 어떤 국회의원은 자신이 공동 발의한 법안의 내용은 고사하고 제목조차도 모르는 것으로 나타나 실소를 금치 못하게 했다.

19대 국회가 개원한 지 1년 6개월이 흘렀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이 터질 정도로 볼썽사나운 몸싸움이 빈번했던 18대 국회를 청산하고 19대 국회가 새롭게 출범했지만, 여전히 여야의 첨예한 대치 사태가 이어지는 등 국회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입법부로서 국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인 법률안 발의와 법률 제·개정 처리 등 입법 풍토의 개선이 절실하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이병석 국회부의장·전병헌 원내대표 축사

올해로 창간 24주년을 맞은 시사저널은 권력에 대한 비판 기능과 함께 선진 정치의 근간이 되는 올바른 의정 문화를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새로운 의정 활동 평가 제도를 만들기로 했다. 기존의 정량적 평가 대신 정성적 평가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국의 법학 교수들과 변호사들로 구성된 한국입법학회와 공동으로 ‘제1회 대한민국 입법대상’(이하 입법대상)을 제정했다. 입법대상은 국내 최초로 법률(법률안)에 대한 정성 평가 모델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선정된 우수 의원을 시상하는 것으로, 첫해임에도 정치권과 학계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시사저널과 한국입법학회가 주최한 ‘제1회 대한민국 입법대상’ 시상식은 12월18일 오전 10시 국회 의원회관 2층 제2소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입법대상 시상식에는 이병석 국회부의장과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 권대우 시사저널 대표이사, 홍완식 한국입법학회장 등이 참석했다. 첫 입법대상 수상자인 이완영·이자스민(새누리당), 신계륜·김우남(민주당), 심상정(정의당) 의원도 참석했다. 행사 참석자들은 국회의원의 법률안 발의 및 통과 건수 등을 기초로 평가하는 기존의 정량적 입법 활동 평가를 뜯어고친 입법대상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 공감을 표시했다.

이병석 국회부의장은 축사를 통해 “입법대상 시상식의 축사를 부탁받을 당시만 해도 생소한 상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내용을 꼼꼼히 들여다보니 꼭 필요한 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동안의 (정량 평가 방식의) 입법 활동 평가는 대한민국 정치 발전에 기여한 점도 있지만 정작 법률안 발의 건수를 중심으로 한 양적 평가에 그쳤다는 한계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 부의장은 “이번에 처음 도입한 입법 활동에 대한 질적 평가는 대한민국의 의회민주주의와 정치 수준을 향상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는 “법률안 발의 건수를 중심으로 한 정량 평가만을 가지고는 법률안의 내용과 가치를 살피는 데 어려운 점이 많았다”며 “입법대상은 법률의 질적 평가라는 새로운 평가 척도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전 원내대표는 또 “입법대상 제정은 국회가 더 질 높은 입법 활동을 할 수 있고, 국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법률을 만드는 전기가 될 것”이라며 “올해는 수상하지 못했지만, 내년에는 저도 꼭 수상하도록 노력하겠다”고 해 좌중의 박수를 받았다.

기존 정량 평가, 법안 발의 남발 폐해

권대우 시사저널 대표이사는 “입법대상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이 중요한 상이다. 국민은 우리 정치 현실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상황이다. 입법대상을 통해 정치의 품격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날 시상식은 내·외빈의 개회사와 축사 등 개회식에 이어, 최대권 한국입법학회 명예회장(서울대 법대 명예교수)의 기조연설(‘의정 평가의 새로운 지평’), 입법대상 발표 및 시상, 입법대상 경과보고 및 입법 발전을 위한 권고 발표 순으로 진행됐다.

시사저널과 한국입법학회는 19대 국회가 개원한 올해 5월 말까지 1년간 국회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률안 8200여 건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제·개정 법률 420여 건을 지난 6월부터 집중 평가했다. 이 평가를 토대로 우수 법률 입법화 과정에 공로가 큰 우수 국회의원 5명을 선정·시상했고, ‘좋은 법률’로 평가받은 10대 우수 법률을 발표했다(46쪽 딸린 기사 참조).

신계륜 민주당 의원은 ‘공사 중단 장기 방치 건축물의 정비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제정 법률)’,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제정 법률)’로 각각 제1회 대한민국 입법대상을 수상했다. 김우남 민주당 의원과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은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 안정 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개정 법률)’, 이완영 새누리당 의원은 ‘고용보험법(개정 법률)’으로 수상했다.

이번 입법대상에서 선정된 10대 우수 법률은 공사 중단 장기 방치 건축물의 정비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 도시 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상 제정 법률),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 안정 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고용보험법, 고용상 연령 차별 금지 및 고령자 고용 촉진에 관한 법률,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변호사법, 농어업인 삶의 질 향상 및 농어촌 지역 개발 촉진에 관한 특별법, 아이돌봄지원법(이상 개정 법률) 등이다.

이들 우수 법률은 개별 법률(법률안)에 대한 정성 평가를 통해 선정됐다. 기존 정량 평가 방식은 법안 발의 건수의 폭증이라는 기현상을 낳기도 했다. 실제 지난 18대 국회에서 제출된 법률안 1만3913건 중 1만2220건이 의원 발의 법률안이었다. 19대 들어서도 법안 발의 건수의 증가세는 두드러졌다. 19대 국회 들어 1년여 동안 발의된 법률안이 이미 8200여 건에 이를 정도다. 이는 18대 4년 동안 발의된 법률안의 67%에 달한다.

12월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제1회 대한민국 입법대상’ 시상식이 열렸다. 왼쪽부터 홍완식 한국입법학회장,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 이병석 국회부의장, 권대우 시사저널 대표이사. © 시사저널 최준필
신계륜 의원 “입법대상 신설은 시의적절”

최대권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는 “국회의원 법안 발의 건수라는 지표는 의정 활동의 극히 미시적인 수치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최 명예교수는 “정량적인 입법 활동 평가는 의정 평가의 계량화나 객관화에 성공한 측면은 있지만 건수를 올리기 위한 다른 법률과의 조화 문제, 공동 발의 품앗이, 질적 검토가 미진한 법률안 양산 등 부작용을 낳았다”고 말했다.

제1회 대한민국 입법대상은 법률의 완성도가 높은 법률을 선정하기 위해 법학 교수, 변호사 등 전문가를 중심으로 의정평가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하고 세미나·워크숍 등을 개최해 정성적인 입법 활동 평가 모델을 개발하는 데 주력했다.

이를 토대로 법률의 완성도가 높은 법률, 관계자 의견 수렴 등 절차적으로 신중한 법률, 국민들로부터 우수한 평가를 받은 법률, 사회 변화를 적절히 반영하는 법률, 시장과 복지를 균형 있게 조율할 수 있는 법률 등의 우수 법률을 선정했다.

시사저널과 한국입법학회는 입법대상 시상식에서 잘못되거나 관행화된 입법 풍토를 개선할 수 있는 대안을 국회와 국회의원에게 권고했다. 임지봉 한국입법학회 연구이사(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회에 너무 많은 법률안이 발의되는 기현상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부 제출 법률안의 입안 절차와 마찬가지로 의원 발의 법률안의 입안 때도 규제 심사나 입법 평가 제도를 도입할 필요성이 있다”며 “공동 발의 남발은 법안 발의의 실적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규제 제도를 도입해 국회의원이 많은 법률안을 발의하기보다는 좋은 법률안을 발의하기를 권고한다”고 밝혔다.

그 밖에도 과다한 특별법 및 특례법·특별조치법 양산 지양, 개별 법률 제정보다는 일반법 개정을 통한 입법화, 국민과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법률안 입안 절차 개선 등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수상자인 신계륜 의원은 “이번 수상에 송구스럽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다. 국회의원으로서 법률안을 심의하다 보면 너무 많은 법률이 올라온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지금까지 입법 활동에 대한 평가가 정량 평가에 치우치다 보니 법률안의 질보다는 아무 법률안이라도 발의하는 게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런 의원들의 인식을 정확히 지적해주고, 의원들이 직접 해야 할 걱정과 우려를 잘 전달해준 것에 감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입법대상의 제정은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국민 참여형 입법대상으로 발전시킬 것”

대한민국 입법대상은 앞으로도 국회의원의 입법 활동 평가의 질적 개선을 도모하기 위해 평가 모델을 개발·보완하고 객관성을 높일 수 있도록 발전시켜나갈 계획이다. 올해 19대 국회 1차년도 평가에 이어 19대 국회의원의 임기가 끝나는 2016년까지 총 4차례 연례 평가를 실시하고, 이를 토대로 19대 국회 전반의 입법 활동에 대한 총 평가를 할 예정이다.

홍완식 회장은 “국민이 소망하는 대의민주주의 선진화가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입법대상 평가 모델 개발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이라며 “국민이 우수 법률과 입법 활동 우수 국회의원을 평가·선정할 수 있는 국민 참여형 평가 모델 방식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