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한 공룡에게 ‘황의 법칙’ 통할까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승인 2013.12.3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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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창규 KT호 어디로 가나…낙하산 논란 없지만 숙제 산적

“삼성 출신이 오기는 힘들지 않겠나.” KT 회장 인선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 정보통신 분야의 한 유력 인사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하나는 통신업계의 반발이다. 기간 통신사인 KT의 수장을 단말기 제조사인 삼성전자 출신이 맡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여겼다. 사업적으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만큼 양측이 서로 경계하는 분위기 또한 강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회사 내부의 반감이다. 효율성을 강점으로 내세우는 삼성의 기업 문화가 공기업 성격이 강한 KT와 맞지 않다고 봤다. 특히 무노조 경영에 익숙한 삼성 출신이 노조를 기반으로 한 직원 3만여 명의 거대 조직을 제대로 장악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KT의 CEO추천위원회가 2013년 12월16일 최종 면접을 통해 선택한 인물은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이었다. 황 내정자는 25년 전부터 삼성전자와 인연을 맺어온 대표적인 ‘삼성맨’ 중 한 명이다.

애초부터 KT의 차기 수장 경쟁이 ‘내부 인사’ ‘관료 출신’ ‘삼성 인사’ 3파전으로 진행된 만큼 황 내정자의 낙점이 생뚱맞다고 볼 수는 없다. 정치권과 업계 일각에서는 ‘황창규 내정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가 회장으로 내정되자 현 정권 최고 실세로 꼽히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와의 친분설이 흘러나온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황창규 KT 회장 내정자가 2013년 12월18일 서울 광화문 KT 사옥에 들러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 연합뉴스
사분오열된 KT 어떻게 추스르나

하지만 황 내정자를 두고 ‘낙하산’ 논란이 일지는 않는다. 이석채 전 회장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황 내정자는 현 정권과 특별한 이해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와 최종 경합을 펼친 김동수 전 정보통신부장관과 임주환 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원장이 지난 대선 때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친박(친박근혜) 인사로 꼽힌다. KT 회장 인선과 관련해 정치권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해온 한 여권 인사는 “청와대 내에서는 한동안 황 내정자에 대해 부정적인 기류가 흘렀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낙하산을 내려보내려고 했다면 아마 다른 인사가 낙점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 내정자가 전임 KT 수장들과 달리 ‘낙하산’ 꼬리표를 달지 않은 채 출발선에 설 수 있게 되면서 좀 더 힘차게 도움닫기를 할 수 있는 유리한 국면이 조성됐다. 그렇다고 그의 앞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첩첩산중에 놓여 있다. 일단 회장 선임 경쟁이 과열 양상을 보이면서 사분오열되다시피 한 KT 안팎을 어떻게 추슬러나가느냐가 중요해 보인다.

이번에 KT의 수장 자리를 놓고 펼쳐진 경쟁은 ‘총성 없는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후보로 거론된 인사만 4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공개 모집을 통해 추려낸 게 20명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인사가 KT행을 꿈꿨는지 짐작할 만하다. 특히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인사들은 본인은 물론 그를 따르는 인사들까지 똘똘 뭉쳐 회장 낙점받기에 사활을 걸었다. KT의 한 임원은 “캠프까지 차린 곳도 있다”고 전했다. 한 유력 후보가 사무실까지 내고 마치 선거 운동하듯 조직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후보들의 행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문제는 외부와의 전쟁이 아닌 내전을 치른 경우 그 후유증이 더 심각하다는 점이다. 수장 인선을 지켜보던 KT 내부에서도 크고 작은 동요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누가 어디에 줄을 섰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중요한 것은 누가 그런 말을 했느냐가 아니라 왜 그런 말이 나왔느냐를 살피는 데 있다. ‘편 가르기’가 횡행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황 내정자가 권위를 앞세우기보다 소통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그래야 신뢰를 구축할 수 있다. KT뿐만 아니라 업계 전반에 걸친 이해의 폭도 넓혀야 한다. 이를 통해 ‘통신에는 문외한’이라는 우려를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횡령·배임 의혹을 받고 있는 이석채 전 KT 회장. ⓒ 연합뉴스
낙하산 인사 막아내는 것도 주요 과제

황 내정자는 통신업계에 특별히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해두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이 공룡처럼 비대해진 KT를 개혁하는 데 일정 부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터줏대감 노릇을 해온 기존의 업계 인사들에게 휘둘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벌써부터 한 고위 관료 출신 인사가 KT의 임원 인선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말이 들린다. KT 사정에 밝은 업계 관계자는 “자신이 수석부회장을 맡아서 내부 조직을 책임질 것처럼 말하고 다니면서 인사 파일까지 달라고 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번에 회장 후보로 거론됐던 이 인사는 친박계 핵심 정치인과 고교 동창이자 행정고시 동기로 가깝게 지내는 사이로 알려졌다. 그는 이석채 전 회장 체제에서도 KT 고위직에 오르려고 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이 인사의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본인만의 생각인지는 임원 인사가 발표되면 곧바로 판가름이 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정보통신 분야에서 일했던 여권의 한 인사는 “가고 싶다는 의지 표현이자 본인의 희망 사항일 뿐”이라고 밝혔다.

일단 황 내정자는 2013년 12월19일 사내 임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인사 청탁이 있을 경우 처벌하겠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인사 청탁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는 것이다. 그동안 KT는 ‘낙하산 천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살아야 했다. 정권의 입김에 따라 없던 자리도 만들어낸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아직까지 업계 인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정치적 외풍이 불어올 때는 이를 막아내야 하는 것도 황 내정자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인 셈이다.

정보통신업계에서 황 내정자와 가까운 인사로는 최두환 전 KT 종합기술원 원장이 거론된다. 부산고와 서울대 전기공학과 동문으로 학창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한다. 연구원 출신인 최 전 원장은 박근혜정부의 핵심 과제인 창조경제를 지원하기 위해 출범한 성장사다리펀드 투자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다. 홍원표 삼성전자 사장도 황 내정자와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홍 사장은 KT에서 2002년부터 5년간 와이브로사업본부장으로 일했다. 이후 삼성전자 무선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때 삼성전자 사장으로 있던 황 내정자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이들을 비롯해 황 내정자와 가까운 인사들 중 누가 새롭게 출항을 준비 중인 황창규호에 승선할지 아직까지는 불분명하다. 삼성전자와는 일정한 거리 두기에 나설 것으로 보여 홍 사장이 당장 합류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정보통신 분야의 유력 인사는 “누가 발탁될지 깜깜하다. 삼성의 경우 인사를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단행하는데 황 내정자도 그런 스타일이 아닐까 싶다. 황창규호에 누가 탑승할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고 밝혔다.

메모리반도체의 집적도가 1년에 두 배씩 늘어난다는 ‘황의 법칙’을 현실에서 입증해 글로벌 스타 CEO로 발돋움한 황 내정자가 KT에서도 또 다른 ‘황의 법칙’을 입증해 성공 신화를 이어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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